을사오적 이완용과 부안

 

▲이완용/사진출처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서문당)

자를 경덕(敬德), 호를 일당(一堂)이라 한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인 이완용은 변산과 인연이 깊다. 그와 변산과의 인연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의 이력을 더듬어 보자.

그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牛峰) 이씨 호석(鎬奭)과 신씨(辛氏) 사이에서 태어나서 열 살 때부터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의 양자가 되었고, 1870년에 양주 조씨 병익(秉翼)의 딸과 결혼했으며, 1882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규장각 대교 검교, 홍문관 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 등을 거쳐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거쳐 1887년에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이 되어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다. 이 해 12월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890년 10월에 귀국하여 우부승지,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육영공원 판리, 외무협판 등을 거쳐 1895년 5월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바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는데, 미국으로 가려다가 당분간 정세를 관망하는 사이에 아관파천(1986. 2)이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불려간 그는 재빠르게 친러파로 변신하여 여러 벼슬자리를 누리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그는 친러파로 몰려 한직인 평안남도 관찰사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게 되었다.

▲채석강 해식단애ⓒ부안21

이완용 부자와 채석강

이완용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의 부친이 부안의 동진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연유로(지금도 동진면에는 ‘李完用洑’라 불리는 곳이 간사지 부근에 있다고 한다.) 이들 부자가 부안을 자주 들렀다. 부안에 오면 으레 변산 관광을 즐겼는데, 그 중에서도 채석강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관광 오는 거야 뭐랄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때마다 산해진미는 물론이려니와 기생 붙여 침소 마련해 주어야지, 심지어 돗자리까지 다 마련해 주어야 하니 이를 주선해야하는 부안현감도 그랬겠지만 주민들은 오죽 곤혹스러웠겠나…? 참다못한 주민들이 ‘이놈의 채석강 때문에 우리가 죽어난다.“며 채석강의 아름다운 단애 몇 군데를 곡괭이로 부숴버렸다고 한다.

▲남여치ⓒ부안21

이완용과 남여치

그런 그가 변산의 또 하나의 비경인 서해낙조를 놓칠 리 있겠는가? 낙조대에 올라 ‘서해낙조’를 감상하고 아침에는 ‘월명무애’를 볼 요량으로 남여(藍輿, 의자와 비슷하나 위를 덮지 않은 승교)를 타고 그 가파른 쌍선봉 중턱을 오르자니 남여꾼들의 노고가 오죽했을까. 변산면 지서리에서 쌍선봉을 바라보고 내변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남여치(藍輿峙)’라는 고개이름은 여기서 유래(참고문헌 전라북도 전설지)되었다고 한다.

▲이완용휼민선정비ⓒ부안21

이완용휼민선정비

매국노로 악명 높은 이완용의 선정비가 줄포면사무소 뜰에 세워져 있다고 해서 몇 년 전 그곳을 찾은 적이 있다. 그러나 줄포면사무소 뜰 어디에도 그런 비석은 없었다. 그날이 일요일이라 숙직실에 들렀더니 마침 아는 이가 당직을 서고 있어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선정비에 어렵사리 사진기를 들이댈 수 있었다. 선정비가 창고바닥에서 반일감정의 눈길을 피해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1994년 ‘나라 바로 세우기 및 일제 잔재 없애기 운동’의 일환으로 군의 지시에 따라 다시 철거했는데, 차마 버릴 수는 없어 창고 구석에 뉘어 놓았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창고 구석 바닥에 비가 뉘어져 있고, 그 위에는 비료가 쌓여 있었다. 그러면 어떤 연유로 이 선정비는 세워진 것일까?

1898년(무술년) 어느 가을밤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줄포에 큰 해일이 일어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잃고 인근 야산으로 피신하였으며, 줄포항의 배들은 지금의 십리동 마을과 장동리 원동 마을의 똥섬까지 밀렸다. 이 가운데에는 비단을 실은 중국 배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전라도관찰사인 이완용은 줄포에 와서 참상을 살피고 난민 구호와 언뚝거리 제방을 중수토록 하였다. 제방은 예전보다 더욱 견고하게 수리되었고 이후 일제 때 서빈들 매립공사가 이어져 오늘의 줄포 시가가 형성되었다.

이듬해 정월 부안 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사업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장승백이(현 장성동) 당산나무 아래에 세운 이 비석의 앞면은

觀察使李公完用恤民善政碑
郡守兪候鎭哲
己亥正月 日

이라 새겨 있고 뒷면은

海若不口我公巡審我候董築
民庶基兼一奚一驢民奠舊閭
軫厥凍 澤流一坊勒石銘口
口惠俱損泳焉涵焉蘇陳岡專

이라고 새겨져 있다.

광복이 되자 매국노를 칭송하는 이 비석은 수난을 맞기 시작했다. 유실 위기에 처한 이 비석은 한 개인(신창근)에 의해 보관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에 당시 줄포 면장(김병기)가 이 비석을 3,000원에 구입하여 줄포면 청사 뒷편에 세워두었다. 20여년을 면청사 뒷편에서 사람들의 눈길도 끌지 못하던 비석은 1994년에 또다시 수난을 맞아야 했던 것이다.’


/허철희(2005·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