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애국지사 운암 이승호 선생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부안동초등학교 교정에는 애국지사 운암 이승호 선생의 송덕비가 서 있다. 2004년 5월 28일 부안동초등학교가 부안읍 봉덕리에 새 건물을 지어 이전하면서 선생의 숭고한 교육정신과 투철한 애국애족정신을 다시 새기고, 그 덕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부안동초등학교 총동창회와 부안동초등학교 운영위원회가 송덕비를 세운 것이다.

아래에 운암 이승호 선생 송덕비 건립문과 이승호 선생 연보 전문을 옮긴다.

건립문

운암 이승호 선생은 1890년 8월 15일 부안읍 선은동에서 전주이씨 양녕대군 15대손 통훈대부행중추원의관 휘 락선과 숙인 밀양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총명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나라의 장래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이 깊어 교육사업과 애국애족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해오던 중 1958년에 개교한 부안동초등학교가 교육환경이 미비하여 교육활동에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사재를 털어 수 천 평의 부지를 희사하여 학생들이 넓은 운동장에서 활발하게 뛰어놀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학교 주위 담장과 사택 신축에 거액을 지원하여 완공케 하였으며, 그 후에도 학교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여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셨다.
또한 1936년에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에 거액을 희사하여 한국의 대학교육 발전을 도모하셨고, 1924년의 큰 흉년에는 벼 300석을 내어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셨으며, 그 이듬해에도 거금을 내어 빈민들의 호세를 대납하셨다.
1920년부터는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을 정기적으로 지원하던 중 왜경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 감옥생활을 하셨고, 1940년에는 창씨개명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친족 수 십 세대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선생의 이런 업적을 높이 여겨 독립유공자로 인정,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오늘의 부안동초등학교가 있기까지는 선생의 남다른 교육열의와 적극적인 지원으로 초석이 다져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04년 3월 부안동초등학교가 부안읍 봉덕리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현대식 건물과 최신의 설비를 갖춰 이전하면서 선생의 숭고한 교육정신과 투철한 애국애족정신을 다시 새기고, 그 덕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전라북도 교육청과 협력하여 이 자리에 송덕비를 세운다.

2004년 5월 28일
부안동초등학교 총동창회
부안동초등학교 운영위원회

 

▲애국지사 운암 이승호 선생

이승호 연보

1890년   8월 15일 부안군 부안읍 선은동에서 출생하심
1920년   임시정부 독립군자금 모집요원(이완식, 김진억, 이문용, 이승필 선생)에게 거액(당시 화폐 3,600원)의 군자금을 제공함
1921년   이완식, 김진억, 이문용, 이승필 선생이 왜경에게 체포됨으로써 선생도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담함
1924년   갑자년 큰 흉년을 당하여 벼 300석을 내어 빈민을 도와준 일이 호남지(湖南誌)에 기록됨
1925년   당시 화폐 1,500원으로 빈민의 호세(戶稅)를 대신 납부한 일이 호남지(湖南誌)에 기록됨
1936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에 당시 화폐 1,000원의 기금을 협찬함
1940년   일제의 창씨령에 항거하여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전개함
1958년   부안동초등학교 교지 확장을 위하여 부지제공 및 기타 시설비를 지원함
1959년   부안군 계화면 계화도에 있는 간재 선생의 사우 계양사의 신축에 협찬하고 그 상량문을 지음
1966년   1월 9일 선은동 자택에서 별세하심
1982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부안21(2005·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