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꽃피운 해양문화의 번성지

 

▲대항리 어살ⓒ부안21

부안문화의 특징

고려 때의 대 문장가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서기 1200년 초에 궁재(宮材: 궁중에서 쓰일 목재)의 벌목 감독관으로 변산(邊山)에 와있으면서 변산은 물론이요 보안, 부령 (당시 지금의 부안은 保安縣과 扶寧縣 두 고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두 고을을 두루 편력하며 그 아름다운 풍광에 놀라 찬탄하고 순후한 습속에 젖은 감회를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시문으로 남겼다. 이때 그는 부안지방의 역사와 생활습속을 총평한 한 수의 시도 남겼는데 이러하다.

습속(習俗)은 단자족(蛋子族)과 비슷한데
고을 역사는 잠총국과 같음을 뉘라서 믿으랴
習俗例多如蛋子
縣封誰信自 叢

이는 ‘생활의 습속(문화)은 옛 중국 남방의 해변 가에 살았다는 단자족(蛋子族)과 비슷한데 고을의 형성된 역사는 옛 중국의 잠총국( 叢國)처럼 오래된 줄을 뉘라서 알랴’의 뜻이다. 단자족은 옛날 중국 남방 해변에 살면서 선상생활을 하였다는 종족의 이름이요, 잠총국은 선사시대에 중국의 촉(蜀) 지방에 있었다는 역사 오랜 나라의 상징적인 이름이다.

이규보가 지적한대로 부안지방의 역사와 문화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있어 왔고 생활문화의 바탕 속에 해양적인 특성이 많이 배어있다. 부안은 3면이 바다다. 변산이라는 경관이 빼어난 명산이 황금어장인 칠산(七山)바다를 향하고 내달으며 반도를 이룬 곳이 부안이고, 그 등 뒤 동북으로 호남평야의 남단을 적시며 흐르는 동진강이 배들과 죽산, 백산사이를 가르며 서해바다로 들어가면서 부안고을이 시작된다. 그래서 산과 바다와 평야의 각기 색다른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꽃피워 왔다.

▲구암리고인돌 군ⓒ부안21

문화유산의 자원들

선사시대의 문화 유적 지금 남아있는 부안지역의 선사시대 문화유적들은 대부분 해안지대에 집중되어 있다. 계화면 계화리를 비롯하여 창북리와 용화동, 동진면 당상과 당하리 반곡리, 주산면 사산리, 보안면의 하입석 등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토기류와 신석기시대의 석기류들, 그리고 하서면 구암리를 비롯한 백련리, 상서면 분작리 용서리 감교리, 행안면 괸돌, 보안면 만화동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거대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들, 또 변산면 대항리와 계화면 계화리 등에 산재해 있는 조개무덤들, 보안면 입석리의 선돌(立石)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변산면 죽막동 수성당(水聖堂) 당집의 주변에서 1992년에 발굴된 원삼국시대의 해양제사의 유적지와 거기에서 발굴된 각종 제기류들은 먼 옛날부터 이 고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는 옛 문화의 유적이요 유물들이다. 이들 수성당 주변에서 발굴한 고대 해양제(海洋祭)의 제기류들은 지금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는 마땅히 그 발굴지인 부안의 수성당 당집 주변에 해양문화유물관이라도 건립하여 그 현장에 전시하는 것이 해신신앙을 연구하는 분들은 물론이요 해양 어로민속에 관심 있는 분들과 격포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원이 될 것이다.

고려청자의 유적지 지금은 문화재청의 수장이 된 유홍준(兪弘濬) 교수는 1990년대 초에 출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남도답사기 1번지’를 부안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강진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두 고을의 문화유산을 갈무리하고 있는 자연적 배경이나 조건 등이 너무나 유사하여 난형난제였기 때문이라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고려청자를 구웠던 가마터까지도 닮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부안의 고려 상감청자와 강진의 고려청자는 고려청자의 명품이라는 데서 우선 같고 강진의 강진만 구강포 연안 사당리 가마와 부안 줄포만의 유천포 유천리와 진서리 가마터 주변의 자연적 배경 또한 거의 비슷하다.

▲유천리 청자가마터ⓒ부안21

그런데 강진의 청자 가마터가 잘 발굴되어 복원 정리도 되고 청자박물관을 비롯한 전시장과 도자기제작소 연구소 등을 정비하여 관광자원으로, 도자기공예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음과 견주면 부안은 아무 것도 이루어 놓지 못한 황무지로 유적지마저 훼손되어가고 있으니 한심하고 부끄러우며 자존심마저 상한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조 전기까지 4. 5백년간 보안면 줄포만 연안은 도자기공예의 중심지였으며 이와 관련된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 부안현 자기소 조에도 보인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확인된 청자의 가마터로 사적 제69호 유천리 도요지에 40여 가마, 제70호 진서리 도요지에 35개소 가마터가 발굴 확인되었고, 그 외 우동리와 감불 신복리 등 줄포만 연안일대가 모두 도자기 공예의 중심지였는데도 방치되어 12세기경 세계적인 자기의 명품을 구어 낸 가마터가 이제는 거의 파손 소멸되어가고 있다.

이매창(李梅窓)과 시비(詩碑)의 문제 이매창은 조선 중기의 명기(名妓)다. 황진이(黃眞伊) 보다는 조금 후대의 인물이지만 시문에 능할뿐더러 처신이 바르고 분명하여 황진이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그는 임진왜란 전후를 살면서 당대의 문장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교산(蛟山) 허균(許筠). 묵재(默齋) 이귀(李貴) 등의 명사와 사랑을 나누고 시문으로 사귀었으며 주옥같은 한시 58수와 이별의 노래로 절창이라는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라는 시조 한 수를 남겼다. 그가 1610년에 38세로 죽으니 부안의 아전들이 1655년에 묘비를 세우고 1668에는 그의 시집 <매창집(梅窓集)>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매창의 시문들이 위항문학(委巷文學)으로 사랑과 이별, 술과 가무를 노래한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이른바 기류문학(妓流文學)이라는 특성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여류층의 문학작품이 두텁지 못한 우리 문학에서는 이 분야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지금 부안 사람들의 매창을 추모하고 기리는 마음은 대단하여(?) 몇 해 전에 매창을 기념하는 매창공원을 조성하더니 1997년에는 서림공원 안에 이미 기존의 시비(詩碑)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안군에서 또 하나의 이매창 시비를 세우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여 한곳에 두 개의 시비가 서있게 되었다. 더욱 해괴한 것은 이 시비에 새겨진 <白雲寺>라는 시다. 이 시는 매창의 시가 아닌 작자미상의 유전시(流轉詩)로 현존하는 매창의 시 어디에도 없는 엉터리 시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군수에게도 그 잘못의 시정을 촉구하고 몇 차례 글로도 썼지만 시정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또 부안의 이른바 문화계나 예술단체 사회단체들이 매창을 아끼고 추모를 한다면서도 이 부끄러운 오류에 대해서는 왜 함구하고 있는 것일까. 이 엉터리 시비를 건립할 당시 함께 맞장구를 쳐서인가, 아니면 관변단체의 속성이 그러한 것인가. 이러한 짓거리들은 매창의 문학을 돋보이게 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욕되게 하는 일이요 후대들을 오도(誤導)하는 일인데 이와 같은 잘못이 매창의 영원한 고향 부안에서 벌어지고 있어 더욱 부끄럽다.

▲우동리 당산제ⓒ부안21

부안의 당산제 부안지방에는 원시종교적 신앙형태로서 마을 지킴이 신앙체인 당산제가 많이 이어져 오고 있어서 우리의 기층문화(基層文化)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문화재적 구실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부안읍성 세 성문안의 솟대당산제를 비롯하여 돌모산의 짐대할머니 당산제, 우동리 솟대당산제, 대벌리 쌍조석간(雙鳥石竿) 당산제와 죽막동 수성당의 개양할머니 해신제, 위도 대리마을 원당의 풍어제 등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당산제다.

당산제에서 모시는 당산신은 마을의 수호신(하늘님)이다. 마을 공동체의 안과태평을 하늘에 축원하는 민초들의 소박한 지킴이 신앙인 것이다. 새해를 맞은 정월 대보름 이전에 행해지는데 마을공동체내의 묵은 갈등을 모두 씻어버리고 화합을 다지는 축제적인 문화행사이기도 하다. 당산신이 깃드는 신체(神體)는 대체로 노거수인데 부안지방에는 돌기둥을 3~4m 높이로 깎아 그 상단에 오리를 앉혀 세운 오리 솟대형의 신체가 많은 것이 특이하다. 부안읍성의 세 성문거리 오리솟대당산, 돌모산 오리솟대당산, 대벌리 쌍조솟대당산, 창북리 중안솟대당산, 우동리 솟대당산들이 그것이다.

제사의 형태는 무당이 사제자가 되어 고사의 형태로 지내는 무격적인 형태와 제관의 주도하에 분향, 삼헌작, 독축의 순으로 지내는 유교식 제의형태가 있다. 제사가 끝나면 남녀로 나뉘어 용줄을 잡아 다리는 줄다리기 놀이와 풍물굿판 등이 흥겹게 벌어진다. 지금도 서남 해안지역의 20여 곳 마을에서 그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어서 정월 대보름 무렵이면 우리의 고유한 향토적인 민속문화와 민간신앙을 공부하는 분들이 많이 부안을 찾는다.

| 김형주 부안향토문화연구회 회장

이 글은 문화저널 6월호(기획연재>지방자치단체의 문화와 전략>부안)에서 옮겨왔습니다.
http://www.munhwajl.com/


/부안21(200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