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양심지킨 시인, 해방 후 치열한 저항의식 표현한 작품 남겨
부안이 낳은 시인 신석정(辛夕汀:1907~1974).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목가시인’ 또는 ‘전원시인’이라는 수사가 붙어다닌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원초적 내면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어들을 찾아 일생을 향토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석정은 간재 전우의 제자로 한학자였던 부친 신기온(辛基溫)의 3남2녀 중 차남으로 부안읍 동중리 ‘노휴재’ 뒤편의 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때부터 그의 집안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안읍에서 한약방을 해오고 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석정(錫正)이었다. 그가 태어난 날이 7월 7일 칠석날이어서 나중에 ‘석정(夕汀)’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보통학교 6학년 때 일본인 선생이 수업료를 안낸 한 학생에게 옷을 벗기는 벌을 주자 전교생을 선동하여 수업거부를 했다는 전력으로 보아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못참는 강직한 면도 있었으나, 그는 어느덧 상소산에 올라 먼 바다를 보며 구르몽과 하이네를 외는 문학 청년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석정은 부친을 따라 행안면 역리 송정마을로 이사하여 살다가 다시 동진면 창북리로 옮겨 거기에서 대부분의 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1924년 17세의 나이에 ‘기우는 해’가 조선일보 투고 작품으로 실리게 되어 그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 해에 석정은 시인 장만영(張萬榮)의 처제인 만경 사람 박소정(朴小汀)과 결혼했다.
이미 아내를 맞아 집안의 가장이 되었지만 마침내 그는 문학에의 큰 길을 찾아 1930년에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그는 한 친척의 소개로 개운사 대운암(현 고려대학교 뒤 소재)의 중앙불교전문강원(中央佛敎專門講院:동국대학교의 전신) 박한영(朴漢永) 문하에 들어 1년 남짓 불전을 공부하고 노장철학을 배우며, 30여명의 젊은 승려들과 함께 ‘원선(圓線)’이라는 문학회람지를 만들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정지용, 한용운 등 당대의 이름높은 시인들과도 교분을 나눌 기회를 가졌으며 김영랑,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도시 생활은 두 해를 넘기지 못한다. 자연에 대한 끈끈한 귀향의식이 작용했던 탓일까, 1931년 ‘시문학’ 3호에 ‘선물’을 발표한 뒤 홀연히 낙향을 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석정은 부안읍 변두리 선은리에 초가 하나를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을 붙이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산, 바다, 들이 어우러진 변산의 한 켠을 지키며 건강하고 싱싱한 시어들을 거두기 시작했다. ‘임께서 부르시면’,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이 이 시기의 그의 대표작이다.
1939년 그의 전원생활은 33편의 시를 담은 첫 시집 <촛불>로 결실을 맺어 많은 이들에게 ‘고향’이라는 원초적 본질을 되뇌이게 하였다.
그러나 석정의 이런 목가적인 시풍을 일제 말기의 암담한 민족 현실은 허용하지 않았다. 친일문학지인 <국민문학>의 원고 청탁을 거절한 그는 이후 해방까지 절필을 하였다. 이 땅의 대부분의 문인들이 친일을 향해 양심을 팔아 부끄러운 붓을 휘달릴 때, 석정은 변산의 한 모퉁이를 부여잡고 끝내 이 땅의 자존을 지켰던 것이다. 그의 나이 40세에 간행된 <슬픈 목가(牧歌)>(1947)는 이 시기의 그의 시작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날 지구(地球)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 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 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 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슬픈 구도’ 전문 (1939 <조광>지 발표)
모든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생산물인 동시에 그 작품을 낳게 한 사회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현실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서정시의 세계도 역시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다만 작품에 그려진 시세계가 현실과 관련하여 긍정적인가, 아니면 부정적인가에 따라 ‘참여’와 ‘순수’로 규정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세계관, 사상 도는 관점이다. 작가가 현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그렇게 보는 사상적 기반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작가에 따라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도 있고 타협을 거부하고 변혁을 꾀하는 경우도 있다.
일제의 암흑기와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은 시인은 또다시 암울한 자유당 독재와 4.19의 좌절 등 암울한 현실을 맞닥뜨렸다. 이 무렵 우리의 시문학은 반독재와 분단극복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신동엽이나 김수영의 참여시 운동이 그 단적인 예이다.
해방후 석정은 1946년 김제 죽산중학교와 부안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1951년 전주에 있던 ‘태백신문’에서 편집고문으로 일하는 것을 시작으로 부안의 청구원 시절을 마감하고 전주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이 무렵 석정은 누구보다도 치열한 현실 비판적 작품을 남겼다. 4ㆍ19 직후에는 교원노조의 결성을 옹호한 ‘단식의 노래’를 썼다가 5ㆍ16 쿠데타 이후 구속되기도 했다.
한 시인이 있어
‘딱터 이(李)’의 초상화로 밑씻개를 하라 외쳤다 하여
그렇게 자랑일 순 없다.
어찌 그 치사한 휴지가 우리들의 성한
육체까지 범하는 것을 참고 견디겠느냐!
‘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 부분
위 시에서 우리는 김수영보다 강고한 신석정의 저항의식을 읽을 수 있다. 이승만 독재에 강한 저항의식을 보인 김수영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범람하는 지역에
도도히 범람하는 처참한 지역에,
자꾸만 짐승들은 울고
목 놓고 짐승들은 자꾸만 울고,
쩌눌린 가슴이라 숨결도 영영 동결되어 가는가?
‘밤의 노래’ 부분
‘슬픈구도’에서 일제 강점기 현실을 밤으로 표현했듯이 이 무렵의 상황도 ‘밤’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인은 낡은 시대를 보내고 새 시대의 도래를 열망하고 있다. ‘보내고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닌 ‘전아사’에서 이를 읽을 수 있다.
포옹(抱擁)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歷史)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階段)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座標)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音樂) 같은 가녀린 소리
철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祖國)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叱責)함은
아아, 어인 지혜(智慧)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黃河)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孕胎)한 함성(喊聲)으로
다시 억만(億萬)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리라.
새벽 종(鐘)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전아사’ 전문
이후 석정은 전주상업고등학교, 전주고등학교, 전북대학교에서 강단에 서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더욱 원숙한 경지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빙하(氷河)>1956, <산의 서곡(序曲)>1967, <대바람 소리>1974 등의 시집을 내었다.
석정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농부의 생활에서 떨어져 전쟁이 휩쓸고 간 척박한 도시에서 시심을 가꾸는 변화를 맞았지만 고향 부안에 대한 애착은 지극한 것이었다. 전주의 비사벌초사(比斯伐艸舍:전주 남노송동에 있는 석정의 집. 이 역시 석정 자신이 이름을 지었다.)에서도 석정은 청구원 마당가의 시누대를 옮겨다 심고 그곳에서 키우던 나무와 꽃들을 키우기도 하였다.
1973년 12월 전북문화상 심사를 하는 자리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진 그는 이듬해 투병 끝에 한평생 지켜오던 향토를 두고 생을 마감하였다. 시인 이동주(李東柱)는 조사에서 ‘남쪽 하늘이 텅 비었구나’하고 슬퍼했다. 그는 창밖에 이는 대바람 소리를 들으며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簫簫)한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다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승거릴지언정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대바람 소리’ 전문 (1974 시집 <대바람 소리>에 실림)
석정이 간 지 4년 후인 1978년에 전주 덕진 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으며, 1991년 8월에는 그의 고향인 부안군 변산면 해창에 ‘석정공원’이 세워졌다. 한편 정부에서는 1997년도에 그의 시의 산실이었던 청구원(지방기념물 84호, 86년 9월 9일 지정)을 매입하여 복원하였다.
/허정균(200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