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새회상의 산실 변산

 

▲일원대도비ⓒ부안21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은 변산 사자동 봉래정사로 들어와 약 4년 동안을 머물면서 장차 펼 새 회상의 교리를 정리하고 제도 등을 연구하였으며 교전의 일부를 직접 집필하였다. 내변산 사자동 일대의 제법성지가 바로 원불교 새회상의 산실인 것이다.

구도의 길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 사진)은 1891년 3월 27일(음력)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4남 1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鎭燮)이었고 원불교를 창립한 후 제자들이 높여 받들어 부르는 존칭은 소태산 대종사(大宗師)이다.

그가 탄생한 시기는 5백년 왕조가 무너져 가고 외세의 침략과 서양의 신문물이 밀려드는 격변의 시기였다. 박중빈의 구도 생활은 7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춘하추동의 변화와 해와 달의 운행 이치, 밤낮의 교차, 만물의 생성과 소멸 등이 이 무렵의 사색의 주제였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7세 되던 해 어느 화창한 봄날 하늘의 해를 잡겠다고 마을 뒷산 옥녀봉에 올라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우주 자연의 현상 뿐 아니라 인간의 행과 불행, 선과 악,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희로애락 등 모든 일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1세 되던 해 가을 부친을 따라 문중 시향제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어른들에게서 산신(山神)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극한 정성을 가진 사람은 산신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약 5년간 구수산 삼밭재 마당바위에서 기도를 올리게 된다. 산신을 만나 세상의 모든 의문을 기어이 풀고야 말겠다는 일념에서였다.

부친의 권유로 15세 되던 해 제주 양씨 하운(夏雲)과 혼인을 했는데 첫날밤만 치르고는 다시 삼밭재 마당바위에 올라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새해 인사차 처가에 다니러 갔다가 마을 사람들이 사랑에 모여 고대소설을 읽는 것을 들었는데 신통력을 지닌 도사(道士)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후 그는 6여년간 도사를 만나겠다며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녔다. 이 시기에 누구를 만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을사 보호조약으로 나라를 빼앗긴 당시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깊이 체험하였으며 최수운, 최시형, 강증산 등의 후천개벽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다시 고향으로 온 22세 무렵부터는 산신이나 도사를 만나겠다는 것은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후 그는 일상적인 생활궤도를 잃고 상식적인 인간이 갖는 모든 생각과 느낌을 망각한 무아지경의 상태, 즉 입정(入定)의 상태에 들었다. 온몸에 종기가 나 사람들은 문둥병자라 하며 가까이 하기를 꺼렸으며 폐인이 되었다고들 했다.

두 형은 친척집에 입양된 관계로 집안 살림도 떠맡아야 했으니 가정형편은 말이 아니었으나 구도의 열성은 식을 줄 몰랐다. 그의 나이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음력 3월 26일) 동이 터오면서 문득 생각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박중빈은 스승의 지도없이 깨달음을 얻은 경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응보 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원불교에서는 이 날을 개교의 날(대각개교절)로 정하고 1916년을 교단 창립 원년으로 삼는다.

교단의 창립

큰 깨달음을 얻은 그는 어지러운 시대를 뚫고 갈 앞날을 모색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한탄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이제 진리를 깨쳤다. 내가 깨친 이 진리를 세상에 널리 펴서 고해중생을 낙원 세계로 인도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무런 기초도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 사람들은 나를 폐인이라고 조롱했다. 나는 지난날에 어떠한 종교와 관련을 맺었거나 큰 스승 밑에서 공부한 적도 없다. 20여 년에 걸친 나의 구도 생활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나는 본래 권문세가나 명문거족 출신도 아니다. 부모님의 유산도 이미 탕진하였으니 회상 창립에 필요한 물질적 토대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실생활의 대도정법은 알지 못하고 허무맹랑한 미신에만 정신이 빠져들고 있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 바로잡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곧 그가 깨친 진리를 따르는 40여인의 신자를 얻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들이었다. 이 가운데 신심이 굳은 여덟 사람을 택하여 표준 제자로 삼고 수제자 자리는 비워두었다가 2년 뒤 송규(宋奎: 1900~1961, 원불교 2대 교주인 정산종사)를 만나 수제자로 삼고 8인의 제자를 통솔케 하였다.

그가 9인 제자들과 함께 처음 시작한 일은 저축조합을 만들고 미신타파, 허례폐지, 금주단연, 공동작업 등의 새생활 운동이었다. 이렇게하여 몇 달만에 큰 돈을 저축할 수 있었고 이 돈으로 숯장사를 해 다시 큰 자본을 만들었다.

이어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1918년 3월부터 길룡리 앞 간석지를 막는 이 방언 공사는 1년 만에 성공을 거두어 2만 6천여평의 농토를 얻게 되었다. 공사는 초기 교도들의 힘을 집약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교단 설립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방언공사를 시작하면서 박중빈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본래 일을 아니하던 사람들이로되 대회상 창립 시기에 나왔으므로 남다른 고생이 많으나 그 대신 재미도 또한 적지 아니하리라. 무슨 일이나 남이 다 이루어 놓은 뒤에 수고없이 지키기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고생을 하고 창립을 하여 남의 시조가 되는 것이 의미 깊은 일이니, 우리가 건설할 회상은 과거에도 보지 못하였고 미래에도 보기 어려운 큰 회상이리라.

그러한 회상을 건설하자면 그 법을 제정할 때에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문명세계가 열리게 하며 동(動)과 정(靜)이 골라 맞아서 공부와 사업이 병진되게 하고 모든 교법을 두루 통합하여 한 덩어리 한 집안을 만들어 서로 넘나들고 화하게 하여야 하므로 모든 점에 결함없이 하려 함에 자연 이렇게 일이 많도다.”라고 그 의미를 설명하였다.

방언공사가 끝날 무렵 1919년 4월 9인 제자들이 “지금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라며 묻자 박중빈은, “병든 세상과 도탄에 헤매는 창생을 널리 구제할 큰 뜻을 가졌다면 온전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천지신명에게 시무여한의 기도를 올려 하늘의 뜻에 큰 감동이 있게 하라.”며 제자들에게 특별기도를 명했다.

기도를 끝낸 마지막 날인 8월 21일 백지장에 찍은 인장(印掌)이 붉은 혈인으로 찍히는 이적이 일어났다. 이를 혈인성사(血印聖事), 또는 법인성사(法印聖事)라고도 하며, 원불교에서는 8월 21일을 법인절이라 하여 이 날을 기리고 있다.

혈인 기도의 결과 회상창립의 법계인증을 얻었다고 원불교에서는 해석한다. 교단 창립의 정신적 기호를 확립한 셈이다. 이후 박중빈은 변산 봉래정사로 들어와 약 4년 동안을 머물면서 장차 펼 새 회상의 교리를 정리하고 제도 등을 연구하였다.

원불교의 기본 교리인 일원상의 진리, 사은사요(四恩四要), 삼학팔조(三學八條) 등의 교리 강령을 제정하였으며 <조선불교혁신론>을 초안하여 불교와의 관계정립을 모색하였다.

한편 월명암에 있던 백학명, 한만허 등의 선사들과도 교유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원불교교서>의 대종경은 이 시기의 그의 행적과 설법이 주가 되고 있다.

소태산 박중빈은 마침내 1924년 갑자년 봄에 변산 봉래정사를 나와 익산 보광사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을 선포하였다. 천도교에서는 최수운 선생이 처형당한 1864년 갑자년 이후를 후천시대라 하는데 원불교에서는 1924년 갑자년 이후를 후천시대라고 보고 있다.

양의 기운이 지배하는 선천시대에는 대립, 상쟁, 상극의 어지러운 시대요, 음이 지배하는 후천시대가 오면 사랑, 화합, 결실의 이상세계가 열린다는 것이 최수운의 ‘후천개벽사상’이다.

이 해 9월에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 총부 건설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목조 초가 2개동을 완공하였다. 이후 1943년 열반에 들 때까지 이곳에 주재하면서 오늘날 원불교의 기초를 닦았다.

호남 지방의 가난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창립된 원불교가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고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룬 것은 그 원동력이 이소성대(以小成大), 무아봉공(無我奉公), 일심합력(一心合力), 근검저축(勤儉貯蓄)의 창립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론이 아니라 초기 교도들의 생활 속에 녹아든 생활철학이었다. 이들은 엿장사, 숯장사, 소작농, 고무공장 직공 등의 험난한 길을 걸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지도 아래 영육쌍전(靈肉雙全), 이사병행(理事竝行),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수행을 체득하였다.

지금까지 세계 역사를 보면 한 종교를 일으킨 1대 교주는 대개 카리스마적 힘은 강하나 조직적이지 못하고 기록 등을 남기지 않는다. 2대 교주가 1대의 행적을 정리하여 교리를 체계화하여 경전으로 만들고 교단을 조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후대에 이르러 창업 교주의 뜻을 재해석하여 분파의 소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원불교의 경우는 다르다. 경전의 일부나마 직접 집필을 했으며, 탁월한 조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소태산 박중빈은 어지러운 시대에 가난하고 못 배운 농민들을 끌어모아 전통적인 가치관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수용한 채 커다란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 한 채 우리 나라가 이 세계의 정신적 지도국, 도덕적 부모국이라는 예언을 남기고 53세에 생을 마감했다.


/허정균(2005·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