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에서 지킨 조선 유학의 마지막 절개
공자(孔子)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道不行 乘 浮于於海:<논어>, 공야장편)” 라고 말하였다. 한말의 격동기에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참담한 좌절 속에서 공자의 이러한 말을 좇아 서해 절해의 고도 왕등도로 들어갔다가 부안의 계화도에서 일생을 마친 도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말의 거유(巨儒), 간재(艮齋) 전우(田愚)이다.
전우(田愚)는 1841년(헌종7) 8월 13일 지금의 전주시 다가동에서 아버님 담양(潭陽) 전씨 청천공(聽天公) 재성(在聖)과 어머님 남원 양(梁)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청천은 충청도 홍주에서 살다가 전주에 이르러 그를 낳았다 한다.
전우는 태어나서 3일 동안 울지도 않고 젖도 먹지 아니하였으며 두 살이 되어서야 겨우 걸을 수 있었는데 6세에 이르러 말이 능숙하게 되어 벽에 써붙여 있는 여러 글자를 아버지에게 물어서 모두 그 글을 깨치고, 바로 소학을 공부하였다 한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날로 문리(文理)가 익어갔다. 9세 때에 화분에 피어있는 매화를 보고 아버지가 향(香)을 운자(韻字)로 내놓으며 글을 지으라 하니,
聽雪鼓絃琴韻冷
눈소리 들으며 줄을 튕기니 거문고의 운치가 찬데
看花題句墨痕香
매화 바라보며 글귀를 쓰니 먹의 흔적이 향기롭도다
라고 즉석에서 지었다. 이를 본 아버지는 그의 장래를 크게 기대하였다.
어린 전우는 밤이 깊도록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는데 이를 본 아버지는 혹시 병이 날까 걱정이 되어 일찍 자도록 명하였더니 창문을 가리어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며 공부를 계속하였다 한다. 13세에 4서와 5경을 모두 읽었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한 번 읽은 것이면 모두 외웠다.
14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와서 살았다. 이후 한 때 글씨쓰기 공부에 열중하여 이 방면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말기(末技)’에 머물 것이 못된다’하고 곧 글씨쓰기 공부는 그만 두었다.
그는 20세에 퇴계문집을 읽으며 몸을 닦는 학문이 있음을 알고 매우 기뻐하여 이로부터 학문에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내가 20세에 비로소 <퇴계집>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서 뜻이 간절하던 차에 퇴계선생의 현몽으로 학문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고 훗날 어느 선비에게 술회하였다 한다.
21세 때에 당시 유학자였던 신응조(申應朝)의 권고에 따라 충청도 아산의 신양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있던 고산(鼓山) 임헌회(1811~1876)의 문하에 들어갔다. 임헌회는 야에 묻혀지내다 철종 9년에 천거되어 사헌부 대사헌까지 지낸 유학자이다. 그는 전우의 학문됨을 알아보고 뒷날 자신의 도를 이을 사람으로 보았다. 스승에게서 전우는 간재(艮齋)라는 호를 받았다.
임헌회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던 간재는 스승의 뜻을 따라 30세 때인 1870년 <근사록(近思錄)>을 모범으로 하여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송시열 등의 글을 발췌하여 실은 <오현수언(五賢粹言)>을 편찬하였다. 이어 34세 때에 이항로(李恒老)의 제자인 유중교(柳重敎)와 14년에 걸친 ‘심성이기태극설(心性理氣太極說)’에 관한 논쟁을 시작하였다. 간재는 이율곡의 주기론적이기일원론(主氣論的理氣一元論)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전통을 이었으며, 특히 우암(尤庵) 송시열의 사상을 철저히 따랐다.
그의 강직한 인품과 높은 학문은 임금인 고종에게 전해져 1881년 8월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또 9월에는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와 강원도 도사(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54세 때인 1894년에도 사헌부 장령(掌令)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895년 3월 친일개화파 박영효(朴泳孝)가 그를 수구당의 괴수로 몰아 처단할 것을 고종황제에게 주청하였으나 고종황제는 오히려 그를 순흥(順興) 부사(府使)에 제수하였다. 이어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당하자 간재는 상소문을 올려 역적을 처벌할 것을 역설하였다. 한편 1896년에 착수치발(窄袖 髮:옷의 소매를 좁게 하고 머리를 깎음)의 공문을 보고 통곡하며 모든 자손들과 문인들에게 죽음으로 유학의 전통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국운이 기욺에 따라 무너져가는 사직과 유학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그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3차에 걸쳐 ‘척참오적’이란 제목의 상소문을 올려 조약을 파기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또한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 ‘경세문(警世文)’ 등을 지어 이토히로부미를 탄핵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상소를 올렸으나 중간에서 방해를 받아 전달도 되지 못하고 말았다. 매국노들의 사주를 받은 대신들이 오히려 그를 베이라고 고종황제에게 주청하였으나, ‘너희들은 짐에게 선비를 죽인 누를 입게 하려 하느냐’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통탄한다 한들 기울어가는 나라를 붙들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침내 마음 속으로 결심했던 망명(亡命)을 실행에 옮겼다. 1908년 9월 그의 나이 68세에 위도 서쪽에 있는 왕등도(旺登島)로 들어갔다. 왕등도는 본래 왕이 한 번 오를 만한 경치가 좋은 섬이라 하여 왕(王)등도였는데 간재가 이 곳에 온 후 이를 불경스럽다 하여 왕(旺)등도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이듬해 제자들의 간청으로 고군산군도 구미촌으로 거처를 옮긴 간재는 중국의 양계초(梁啓超)를 비판한 ‘양집제설변(梁集諸說辨)’을 지었다.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간재는 분함을 못이겨 며칠을 통곡하다가 다시 왕등도로 들어갔다. 이듬해 11월 일본인 경무부 고등관이 경비선을 타고 왕등도에 들어와 그의 동태를 살폈다. 이 때 간재는 벽에 ‘萬劫終歸韓國士 平生趨付孔門人(만겁이 흘러도 끝까지 한국의 선비요, 평생을 기울여 공자의 문인이 되리라)’라는 시를 게시하여 놓고 있었다. 이를 본 일경도 진짜 한국의 선비를 만났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한다. 이 싯구는 오늘도 계화도의 계양사에 걸려 있다.
1912년 3월에 간재는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왕등도에서 나와 고군산군도에서 머물다 9월에 부안의 계화도로 거처를 정했다. 계화도는 썰물 때면 도보로 왕래가 가능한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제자들이 수집한 간재문집 전고(前稿)를 완성하였다. 이후 1914년에는 그의 입해(入海) 이후의 감상을 적은 ‘해상만필’을 왕성하였다.
1918년 78세의 고령에 이른 간재는 그의 손자를 앞에 불러 놓고 훈시하였다. “나는 한국의 유민으로서 어찌 타국에 입적(入籍)하겠는가. 너도 죽을지언정 도장을 찍어 입적을 허락해서는 안된다.(吾以韓國遺民 豈肯入籍於他邦 汝雖死不可奈章)”이라는 글을 써주면서 왜적(倭籍)으로 입적을 하지 말도록 하였다.
1919년 고종황제의 석연치 않은 붕어(崩御) 소식을 접하자 그는 삼년 상복을 입기 시작했다. 또한 1920년 5월에 동아일보 사장 박영효가 주자학의 의리를 비판한 데 대해 이를 성토하는 등 고령에 이르러서도 그의 기개는 숙을 줄을 몰랐다.
1922년 5월에 제자들이 수집한 원고를 친히 강정(剛正)하여 간재문집 후고를 완성한 간재는 7월 4일 한많은 82년의 생애를 끝내 왜인들이 통치하는 내륙의 땅을 밟지 않고 계화도에서 거두었다. 9월 13일 전북 익산의 선영에 묻히었는데 그의 영구를 다른 사람이 2천여명이었으며 장례를 관망한 사람은 6만여 인파가 넘었다 한다.
조선 왕조의 몰락과 함께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80여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격변의 현대사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간재 선생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에는 김병로, 백관수, 송성용, 윤제술 등이 있다.
/허정균(2005·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