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艮齋) 전우(田遇, 1841~1922)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며 스승 임헌회를 따르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러 벼슬을 제수 받고도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
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수구파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개화파로부터 전우를
죽여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전통적인 도학의 중흥만이 국
권회복의 참된 길이라고 여기고 부안, 군산 등지의 작은 섬에서 학문을 폈으며, 72세부터 82
세에 죽을 때까지 계화도에 정착하여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그는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 최후의 정통유학자로 추앙 받고 있다.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은 무과로 급제하였지만 초상화에 뛰어나 고종 어진을 제작하기
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전국을 여행하며 여러 영당이나 사당의 초상화를 이모하거나 생존
인물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다. 또한 채색 화조화에도 뛰어났다.
전우가 계화도에 머물던 80세때(1920년, 계화도에 머물던 시기)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그의
문인 김종호(金鍾昊)가 제발을 적었다. 화면의 3분의 1까지 차지하는 돗자리에 황색 평상복차림에
높은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있다. 얼굴표현은 짧은 필선으로 채색을 반복하여 음영을 표현하였는데
완고한 선비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옷주름은 소략하고 음영을 가하였으며, 배경에도 먹으로 선염을
가하여신체가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채용신은 1900년에 조선 태조의 어용(御用)을 모사하였던 한국 초상화의 마지막 대가이다.
고종은 이때 그의 거처였던 부안(扶安) 근처 채석강(采石江)의 이름을 따서 석강(石江)이 라
는 호를 하사하였다.
그의 생애는 소상하지 않으나 1848년 서울에서 나서 1886년 급제하였고 태조 어진(御眞) 등
을 모사 한 후, 경상도 칠곡 군수, 충청도 정산 군수 등을 지냈다. 정산 재직 시에 면암 최
익현(勉庵 崔益鉉)을 스승으로 모셨고 1905년 참판이 되었으나 시국을 비관, 전주에 은거하
였다. 이후 1941년 94세로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망하기까지 주로 초상작가로 활약했다고 알
려져 있다.
채용신은 화조화는 더러 그렸으나 산수를 그린 예는 아주 드물고 주로 초상 제작에 힘을 쏟
았다. 그의 화업은 둘째 아들 상묵(尙默)이 이었다. 석지는 지방에서 활동한 까닭에 역량에
비하여 중앙에는 비교적 덜 알려졌다.
그의 초상화는 우국선열을 대상으로 한 것이 많아서 면암 최익현상, 간재 전우(艮齋 田愚)
상, 매천 황현(梅泉 黃玹)상이 전하고 있으며 그 외 윤항식(尹恒植)상, 김영모(金永模)상, 전
김문기(傳 金文起)상 등과 여인상으로 운낭자 상과 또 다른 부인상 등이 전해 온다. 석지는
늘 작품에 서명하였으므로 감정이 쉬운 편인데 근래 유명한 이재(李縡) 초상이 그의 작품이
라는 설이 있었으나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채용신은 전래의 초상기법을 단호하게 탈피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채용신화
법이라고 부를 만한 독특한 기법을 확립하였다.
그것은 초상의 안면 묘사를 전통적인 선에 의존하지 않고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나
누어 무수히 자잘한 붓질을 거듭함으로써 얼굴이 기본적으로 면(面)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실체감이 강하게 느껴지며 의복의 주름 처리 역시 같은 면으로
처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화면의 장식성에도 유의하여 흉배와 각대 등에 화려한 니금장식
을 베풀고 바닥에 깐 화문석도 장식효과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
또한 인물이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3차원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여 과거와는 달리 인물
의 배경을 어둡게 선염하는 등 재료만 동양화일 뿐 기법 효과면에서는 서양화와 방불한 것
이 되고 있다.
채용신은 초상화가 갖는 실체감은 전통적인 초상화가 지향했던 정신성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란 측면도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서양화법의 수용이란 점은 그의 시대상을 반영
하는 것인 동시에 매천 황현상 같은 경우 놀라운 정신성이 함께 구현되거 있어서 역시 챙용
신이 조선왕조 초상화의 최후의 거장임을 말해준다.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4년 09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