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공사(共生共死)의 맹우(盟友) 여러분
대륙(大陸)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중국 상해에서 백정기 의사가 1933년 3월 17일 의거한 날
침략거두 아리요시(有吉) 일파 도륙을 모의하며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6월5일,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서는 항일 독립투사인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1896-1934 ) 의사 의열사 준공식 및 영정 봉안,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백씨 종친회와 유족대표, 영원면 주민들, 정읍시민 들, 광복회원, 보훈처 관계자, 3.1운동 관련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등 800여 명이 참석해 의사의 항일독립투사로서의 우국충정과 애국혼을 기렸다. 의열사는 44억원을 들여 6천300여평의 부지에 사당과 기념관, 청의당(聽義堂)과 내.외삼문(義烈門. 崇義門), 어록비와 동상, 순국추모비, 관리사와 주차장, 휴식광장 등을 갖춰 8년만에 준공했다.
백정기 의사는 1896년 음력 1월 19일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 부안읍 신운리)에서 白士順(父),
尹玉文(母)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사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907년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1909년 영원면
앵성리의 曺八洛과 결혼하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 활달하고 총명하여 주경야독으로
사서를 통달한 백의사는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운명을 개탄하면서 애국심에 불타는 동지들
을 규합, 1919년 3.1운동이 폭발하기 직전 동지들과 함께 만주 심양으로 떠났다.
1920년, 귀국하여 지하운동을 하다가 이듬해 봄 구속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석방되었다.
1923년에는 일황을 주살할 계획으로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동경대지진과 왜병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북경으로 건너갔다.
1924년에는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과 ‘正義
公報’를 발간하였다. 한편 상해에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 직공이 되어 중국동지 盧劍
波, 대만동지 范本粱, 아나키스트연맹과 손잡고 노동자의 사상계몽에 진력한 결과 의사를
따르는 군중이 십만을 헤아렸다고 한다.
1928년에는 남경에서 조선, 중국, 일본, 필리핀, 안남, 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동방무정
부주의연맹’을 조직햇을 때와 1930년 ‘재북만주무정부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을 때에도 의
사는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호소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화남아나키스트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과 제휴하여 항일해방연맹을 조직하고, 1차 상해사변이 일어난 후에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Black Terorist Party)를 조직함하였으며, 이여산 동지와 천진에 들
어가 1만5천톤급 일본 수송함에 폭탄을 던져 대파시키고, 왜군병영과 일본영사관을 폭파하
였다.
1933년 3월17일, 의사는 일본이 중국 군벌들을 매수하기 위하여 有吉明 주중일본공사가 마
련한 상해 무창로에 있는 六三亭이라는 일본 요정에서 일군정요인과 중국의 친일거두들을
초대하여 대연회를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정화암과 밀의한 후 이강훈, 원심창, 동
지들과 함께 그날 밤 9시 일격 전멸을 시도하였으나 적의 역습을 받아 체포되어 日本長畸法
院에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그 이듬해인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에 39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의사의 유골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7월6일,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지금의 효창공원
에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1956년 10월30일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에 鷗波白貞基義士殉國
紀念碑가 세워졌다. 1963년에는 정부에서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4년 6월5일, 鷗波白貞基義士義烈祠를 준공하고 影幀을 奉安했다.
진정한 자유와 독립의 투사, 아나키스트 백정기 의사 6월 5일 구파 백정기의사 사당준공식 및 영정봉안제에 즈음하여조광환 기자 dh1894@hanmail.net 흥행에 크게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그 동안 한국 영화에서 금기 시 되어 온 소재를 뛰어넘었다는 평을 받은 ‘아나키스트’는 1920년대 중국을 무대로 하여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격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한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다. 아나키즘과 무정부주의 우리에게 아직도 생소한 단어인 아나키즘(anarchism)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사람은 일본 도쿄대학의 게무리야마 센이치로였는데 1902년에 그가 편의적으로 번역해 놓은 ‘무정부주의’ 라는 용어가 마치 정부 조직이 없는 혼란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많은 오해를 낳았다. 아나키즘은 그리스어의 ‘아나르코anarchos’ 에서 나온 말로 ’없다an‘와 ’지배자arche’라는 뜻의 합성어로서, 글자 그대로 ‘지배자가 없다’ 는 뜻이다. 본질적으로 지배권력 없는 사회를 추구하여 개인의 도덕적 품성에 의한 자발적 합의와 그에 기초한 연대와 협동이 아나키즘의 이론적 배경이다. 특히 경제학상의 전통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경제적 정의를 통한 완전한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점에서 ‘자유사회주의’라고 일컫기도 하며 때문에 중앙 집권적이고 권위적인 공산주의와는 전통적으로 대립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우리나라에서는 아나키즘을 공산주의의 한 아류로 인식하여 왔기에 얘기하는 것조차 터부시해왔던 것이며, 그런 만큼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연구와 평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의 아나키스트와 항일독립투쟁 독립운동가이자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활약한 이회영 선생은 “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를 배격하지, 자율정부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일제시대 아나키즘은 강제적 식민지 권력을 부정하는 독립운동 이념으로 봐야하며 결국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주된 활동 목적은 일제 타도에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고, 그 결과 다양한 방법의 독립투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는 신채호,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유자명, 정현섭 등이 있는데 마침 정읍시에서 백정기의사의 순국 70주기를 맞이하여 오는 2004년 6월 5일 정읍시 영원면에 백정기 의사 사당인 의열사(義烈祠)를 짓고 준공식과 영정봉안제를 가진다하니 뒤늦게나마 다행스럽고 또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정작 아나키스트로서의 백정기의사의 면모나 그의 항일투쟁 등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실체적 규명작업이 없이 외형적인 사당건립공사만 서두른 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아쉬움에 갈증을 푸는 정도로 백정기 의사에 대해 살펴보고 훗날 기회가 되면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해야할 과제로 삼도록 하겠다. “무장투쟁이 아니고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 백정기의사는 1896년 전북 부안군 남하면 내진리에서 가난한 농부 백사순(白士順)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살 때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해서 살았다. 비록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했지만 머리가 명석하고 기개가 있어 13살 되던 해 영원 일대 부호로 알려진 창녕(昌寧) 조(曺)씨 문중의 규수 팔락(1966년 작고)과 결혼하게 된다. 그는 사서(四書)와 더불어 신학문을 배워 정치에 대한 식견을 넓혀갔으며 일제의 식민지가 된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깨쳐나갈 방도를 찾고자 1919년 2월 서울에 올라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자마자 급히 귀향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평화적인 만세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백의사는 무장독립투쟁이 아니고서는 독립을 쟁취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을규(건국 초대감찰위원)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등과 함께 1919년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기관을 습격을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만주(滿洲) 봉천(奉天, 現 沈陽)으로 망명하였다가 1920년 겨울 다시 서울에 들어와 군자금모금 활동을 하던 중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체포되어 서울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鑛夫)로 위장하여 신분을 속여 다행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아나키스트 백정기 그 후 백의사는 일제의 세력이 미치는 국내에서는 항일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시 신의주, 봉천(奉天)을 경유하여 1921년말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당시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이회영(李會榮), 유자명(柳子明), 이을규(李乙奎), 정화암(鄭華巖), 신채호(申采浩) 등과 만나게 되는데 그 때의 일을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하루는 몽사를 얻으니, 가군께서 사랑에서 들어오시며 희색이 만면하여, “내 일생에 지기를 못 만나 한이더니, 이제는 참다운 동지를 만났다.”하시며 기뻐하시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홀연히 깨니 남가일몽이라. 곰곰 몽중에 하시던 말씀을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이 오려나 하였더니, 그 날 오정쯤 해서 이을규씨 형제분과 백정기씨, 정화암씨 네 분이 오셨다.’ 1924년 일본에 밀입국한 백의사는 동경에서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의 폭파계획 을 수립,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으로 재차 망명하게 된다. 1924년 4월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는데 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백의사를 비롯하여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유자명 등 여섯 명이었다. 백정기의사의 호탕함과 지혜로움 여기서 백의사의 호탕함과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는 2가지 일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이야기로 먼저 정화암의 자서전을 보면, 구파 백정기는 술을 무척 좋아했고 식욕이 왕성했기 때문에 언제나 배고프다고는 타령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나 활기에 차 있었다. 돈이 없을 때에는 천진과 북경 사이를 걸어 다닐 만큼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전에도 광동까지 갔다가 상해까지 수만 리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다. 한번은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고기를 한번 실컷 먹어 봐야지. 화암, 저녁때쯤 성암 댁으로 오시오.”하며 나갔다. 돈 한 푼 없는 그가 무슨 수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광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는 만두와 고기, 굴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호탕하게 경위를 설명했다. 서직문밖 조용한 골목의 푸줏간에 들어가 고기가 먹고 싶어서 외상을 달라고 솔직히 말하자, 푸줏간 주인이 그의 호탕하고도 담백한 성격에 감복하여 고기를 떼어 주고 돈까지 줘서 술과 빵을 사왔다고 했다. 그의 대담성도 대담성이려니와 푸줏간 주인의 대륙적 기질이 감탄스러웠다. 두 번째 이야기로 1923년 늦은 가을 북경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모아호동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북경 모아호동의 아문구 안은 귀족들이 사는 특수지역으로서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친일파 이근홍의 첩이 살고 있었다. 백의사는 이 집을 털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백의사는 상엄한 경비를 뚫고 김창숙과 이을규, 이정규와 함께 잠입해 귀금속들을 빼내어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백의사는 빼앗은 물건을 북경 밖으로 빼내어 처분하고자 했으나 중국 공안국의 수사망을 피해 가지고 나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백의사는 귀금속을 인력거에 싣고 북경 서진문 밖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박 노인 집으로 갔다. 그러나 백정기가 박 노인 집에 도착했을 때는 경찰이 그 곳을 수색하고 막 나오는 길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백의사는 인력거에서 내려 대문 밖에 서 있는 박 노인에게 큰절을 하며 둘러댔다. “삼촌을 찾아뵈려고 조선에서 오는 길입니다.” 박 노인도 재빨리 사태를 눈치 채고 중국 경찰에게 조선에서 온 조카라고 설명하고는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중국 경찰도 이 모습을 보곤 의심 없이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상해의 아나키스트 독립전사 백정기 그 후 백의사는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과 함께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백의사는 1924년 9월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혔으며, 1927년 여름 중국 동지 진망산(秦望山), 양용광(梁龍光), 진춘배(陳春培) 등의 제청으로 의사는 이정규, 이을규, 정화암 등과 함께 농민자위군(農民自衛軍)을 조직하여 농촌계몽과 조직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5월말 남경(南京)에서 중국, 일본, 필리핀, 월남, 인도 등 7개 민족대표 120명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同盟)을 조직하였는데 백의사는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중 양국이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일제를 타도하자고 주장하였다. 1930년 백의사는 상해에서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화암, 이강훈, 엄순봉, 오면직, 김동우 김광주, 나월한, 이용준, 박기성, 원심창, 김광주, 이규창, 장도선, 정해리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이하 남화연맹)을 창립하여 일본 침략세력저지작전과 밀정(密偵) 섬멸작전을 주 임무로 하였다. 만주사변 발발과 때를 맞추어 결정된 남화연맹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산하 기관이었다. 그는 폐병의 고통 속에서도 동지를 위해 속옷마저 전당포에 맡겼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활동자금부족으로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백의사는 1931년 3월경 과로와 영양실조로 지병인 폐병이 재발하였다. 그가 폐병에 걸린 사연은 이러하다. 하루는 백범 김구 선생이 찾아와 말하기를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자 임시정부의 젊은이들이 전차회사에 나가 일하고 있으니 백의사도 거기에 나가 일하면 어떠냐고 하여 그 곳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 때 백의사는 전차회사에 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중노동을 하느라 몸이 몹시 허약해졌다. 여기에 의열단에 있던 김모가 북경에서 폐병에 걸려 상해로 돌아왔다. 그 당시 폐병은 전염성이 강한 불치병으로 규정되어 있던 때인지라 그를 아무도 받아들이지를 않게 되었다. 이것을 안 백의사는 김모를 자기 숙소로 데려와 숙식을 같이하고 간호도 해 주었다. 정성껏 간호를 했지만 결국 병이 악화되어 어쩔 수 없이 노자를 마련하여 귀국시켰는데 이 때 폐병이 전염된 것이다. 백의사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고 날이 갈수록 기력을 잃어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아 보니 폐병이란 진단이 나왔다. 자기 자신이 폐병 환자라는 것을 안 백의사는 식사 때나 대화를 하면서도 신중을 기하여 동지들에게 조금의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듯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의 이러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한번은 김두봉의 집에 갔다가 그 집 어린아이들이 병에 걸려 먹지도 못하고 누워서 죽어 가는 꼴을 보고는 속옷과 겉옷을 몽땅 벗고 두루마기만 걸친 채 시장에 있는 전당포를 돌아다니다가 겨우 돈 몇 푼을 얻어 빵과 약을 사들고 김두봉의 집으로 달려간 일도 있었다. 그 옷도 자기의 것이 아닌 동지들의 옷이었고 추운 겨울에 거리를 몇 시간씩 쏘다녔으니 그의 몸은 얼음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국제연대, ‘항일구국연맹’과 ‘흑색공포단’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점령함에 따라 중국 내에 항일 기운이 더욱 드높아갔고, 이를 계기로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공동전선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높아갔다. 드디어 그해 10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결성하였는데 한국 측 인사로는 백의사를 비롯하여 이회영, 정현섭 등이 있었으며, 이 조직의 목적은 일제 군경기관 및 수용기관의 조사 및 파괴, 적요인의 암살, 중국 친일분자의 숙청 등에 있었다. 또 이의 실천을 위해 같은 해 11월 중순 프랑스 조계 포석로 계락리(浦石路 桂洛里)에 있던 당시 백의사의 집에서 소위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Black Terorist Party)이란 행동대를 조직하였다. 항일구국연맹의 흑색공포단은 활동계획에 따라 우선 적의 기관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 우선 북경에 있는 일본 군부와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의사는 원심창, 이강훈 등과 함께 1932년 1월 톈진의 일청기선부두(日淸汽船埠頭)에서 일제의 육군과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한 1만t급 기선에 폭탄을 던져 선체를 파괴하고, 많은 수의 사상자를 냈다. 또한 톈진 일본영사관에도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폭파시키고, 일본군 병영에도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이런 행동들은 항일구국연맹의 활약이라고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들의 활동은 1932년 2월에 발생한 상해사변 때문에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상해사변이란 일제의 만주 점령으로 중국 대륙 전체에 항일운동이 확산되고, 특히 상해의 정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 군부에서 상해마저 점령하려고 일으킨 사건이었다. 일본군이 상해를 침략하자 중국군 19로군이 강력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을 몰아냈다. 이에 일본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이끄는 1만 여명의 지원군을 투입하여 결국 19로군을 패퇴시켰다. 일제는 이 승전을 기뻐해 일황(日皇)의 생일인 1932년 4월29일 상하이의 홍커우(虹九)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기념식을 겸한 승전축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윤봉길 의사와 홍구공원, 그리고 백정기 의사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 행사장에 임시정부에서 보낸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대장 등을 처단하였는데 사실 남화연맹 측에서도 폭탄 투척을 준비하였고 백의사가 바로 그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백의사는 중국인 왕야챠오가 구해주기로 했던 입장표를 끝내 구하지 못해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다. 그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화연맹의 정화암이 일본인 종군기자를 통해 기념식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들고 백의사와 거사계획을 세웠다. 한편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도 기념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남화연맹에 김오연을 보내 거사계획을 파악해보려고 하였다. 이런 김구의 의도를 읽은 정화암은 거사 계획을 숨기면서 역으로 임시정부의 윤봉길이 당일 11시 조금 넘어 거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화연맹은 그보다 앞서 10시경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을 잡았다. 그러나 행사장에는 한인이나 중국인은 물론 상해의 일본인거류민들조차 일본 영사관에서 발행하는 출입증이 있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알려졌다. 폭탄을 구해준 중국 동지 왕아초가 일본영사관에 아는 사람이 있어 출입증을 구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당시사건을 기획한 정화암의 회고를 보자. 4월 29일 ! “당신들의 계획은 대성공을 했소 지금 홍구공원이 수라장이 되었소 “ 임정에서 통쾌한 거사를 해냈다. 그 종군기자는 우리가 그 일을 해낸 것으로 알고 취재하려고 뛰어왔던 것이다. 일본인 종군기자뿐만 아니라 상해 일본 영사관에서도 홍구 공원 폭탄투척 사건의 배후로 남화연맹으로 지목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일본 영사관 경찰은 백의사와 이회영, 정화암 등을 체포하려고 광분하였으나, 1932년 10월 백 의사의 주도로 정화암, 이달 등과 함께 밀고자로 지목되어 오던 이규서, 연충열, 등 친일주구 3명을 처단하였다. 육삼정 거사 1930년대 상해에는 아나키스트의 근거지가 몇 군데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프랑스 조계 복이리로(福履理路)에 있는 정원방이라는 공동주택의 2층 마루방이었다. 1933년 1월 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전개하던 이강훈 선생이 이 곳에서 백의사를 만났다. 1933년 3월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를 중심으로 한 일본 군벌은 주중공사 유길명(有吉明)에게 4천만원이란 거금을 주어 열하성(熱河省)을 근거로 반만항일유격전(反滿抗日遊擊戰)을 전개하고 있는 의용군과 한족(韓族)의 항일독립군을 공격하고 탄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의 협력을 위해 중국 국민정부에 기생해 있는 친일파와 고급 장성을 매수하려는 비밀회합이 상해 공동조계에 있는 육삼정이란 고급 요리점에서 개최된다는 정보를 일본인 아나키스트라고 자칭한 오키를 통해 입수하였다. 이에 흑색공포단은 1933년 3월 5일 백의사의 숙소인 상해 프랑스조계 복이리로(福履理路) 정원방(亭元坊)에서 정화암, 원심창, 엄순봉, 이강훈, 이달, 이수현, 정해리 등과 모여 숙의 끝에 육삼정을 습격하여 유길명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회합에서 백의사는 홍구공원 사건의 불발을 아쉬워하고 있던 차였으므로 이 거사는 마땅히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자기가 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담당할 사람을 결정하지 못하고 이튿날 다시 모여 제비뽑기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죽음의 제비뽑기 이윽고 이튿날 이들은 이미 오래 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죽음의 거사를 위한 제비뽑기에 들어갔다. 먼저 제비를 뽑은 사람이 다음 한 명을 지명하도록 해서 한 사람씩 제비를 뽑았다. 한 사람씩 차례로 제비를 펼쳤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백의사였는데 그는 제비를 펼치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옆에 있던 이강훈의 손을 잡고 함께 동행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육삼정에서 일본군의 수뇌들이 중국의 군벌들과 화합을 갖는 시간은 오후 9시에서 11시까지였다. 백의사가 연회석상에 폭탄을 던지고 나오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동지들과 합세하여 추격해오는 일본 군경을 권총으로 대항하며 저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인 3월 17일 오후 6시 남시(南市) 진진다관(津津茶館)에서 차를 마신 두 의사는 유자명, 오면직과 “죽어 저승에서 만나자”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이규호가 불러온 서역자동차회사의 차에 백의사와 이강훈, 원심창 등 5명이 함께 타고 조계(租界)를 넘어 동일 오후 8시경에 현장 부근에서 내렸다. 의사는 육삼정에서 2백미터쯤 떨어진 무창로(武昌路) 271호 중국음식점인 송강춘(松江春) 2층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일본인 동지 오키를 만나 당일 육삼정의 정세를 파악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오키는 백의사를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이 육삼정을 덮칠 것이라는 정보를 일본 영사관에 밀고한 상태이기에 약속장소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음식점종업원과 인력거꾼, 행인 등으로 위장한 일본 형사들이 함정을 파고 대기 중이었다. 종업원들의 수상한 거동에 백의사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함정에 빠진 것을 눈치 챈 백의사가 품안의 폭탄을 빼드는 순간 일본 형사들이 그를 덮쳤다. 그러자 체념한 백의사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이놈들 참 빠르구나. 한 발만 늦었어도 너희 놈들과 우리가 모두 한 불길 속에 휩싸였을 텐데.” 한편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이강훈, 원심창에게도 인력거꾼과 행인으로 변장한 일본 형사들이 덤벼들어 손쓸 겨를도 없이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비록 거사 직전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이 육삼정 사건은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음모를 폭로시켜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에 큰 영향을 주어 항일전쟁을 하게끔 유도했고,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상 큰 사건이라고 하겠다. 39세의 나이로 나라에 몸을 바치다 체포된 세 사람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 되어 그 해 11월 15일 일본 나가사키 지방 재판서에서 재관을 받았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자기가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모든 죄를 자기 혼자 뒤집어쓰려는 생각에서였다. 검사는 백의사와 원심창 의사에게는 무기징역을, 이강훈 의사에게는 15년 형을 구형하였고, 11월 24일 최종 재판에서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대로 선고하였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건 떳떳한 거사였기에 상고를 포기한 백의사는 복역 중 1934년 6월 5일 향년 39세로 옥중(獄中)에서 순국(殉國)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이 피 흘려 가신 다음해인 1896년에 태어나 평생을 조국 독립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강제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온몸으로 실천하다 간 진정한 자유인인 백의사의 유해는 일본에 묻혔다가 조국광복 후 1년 만인 1946년 7월 6일 이봉창(李奉昌), 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에 봉환되어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룬 뒤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2004년 06월 04일 [정읍통문 http://tongmun.net/] |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4년 06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