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고려동종의 용뉴


▲내소사 고려동종(보물 제277호)의 용뉴.
큰 얼굴에 허리를 고리 모양으로 구부린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부안21

 

우렁찬 종소리의 근원, 범종의 용

용은 장식 위치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범종을 메달기 위한 목적으로 종 위쪽에 만들어 놓은 장치를 종뉴라 하는데, 대부분 용의 형상을 취하고 있어 용뉴라고도 한다. 그런데 종 위에 앉아 있는 용을 특별히 포뢰(蒲牢)라고 한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에 의하면 포뢰는 용의 또 다른 화현(化現)이다. 포뢰는 바다에 사는 경어(鯨魚 ; 고래)를 가장 무서워하여 그를 만나면 크게 비명을 지른다고 한다.

종은 그 소리가 크고 우렁차야 한다. 옛사람들은 포뢰 모양을 만들어 종 위에 앉히고 경어 모양의 당(撞)으로 종을 치면, 경어를 만난 포뢰가 놀라 큰 소리를 지르게 되며, 그래야 크고 우렁찬 종소리가 난다고 믿었다. 범종의 소리를 경음(鯨音)이라 하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포뢰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범종 장식물이다. 범종 위에 포뢰를 앉히는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는데, 포뢰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인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조를 보면, “아래로 세 개의 자금종을 달아놓았는데, 모두 각(閣)과 포뢰가 있고 경어로 당(撞)을 삼았다”고 하였다.

▲내소사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오늘날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의미 없는 둥근 통나무 형태의 당으로 종을 치고 있지만, 승주 선암사에서는 비늘문양이 뚜렷한 물고기 형태의 당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 범종각에 매달려 있는 이 당은 물론 근세에 만든 것이지만, 그 형태에 있어서 경어 모양의 당으로 종을 쳤던 옛 전통의 희미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종이 울리면 돌아다니는 중들이 다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은은히 염불하는 소리가 나는 듯 하였으니 그 중심체는 종에 있었다’ 종은 절의 법구(法具)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승도들은 우렁찬 소리가 나는 범종을 제작하려 했고, 그 묘책으로 종 위에 포뢰를 앉혔던 것이다.

포뢰를 앉힌 범종 가운데 볼만한 것으로는 평창 상원사 범종, 부안 내소사 범종, 공주 갑사 범종, 양양 낙산사 범종, 화성 용주사 범종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상원사 범종은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종이다. 용뉴의 머리는 매우 크고 몸은 음관(音管)에 붙어 있으며, 종의 정상에 발을 버티고 있다. 아래턱을 종 표면에 댄 채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있는데, 그것은 분명 크게 놀라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다. 내소사 범종의 용뉴도 큰 얼굴에 허리를 고리 모양으로 구부린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갑사의 범종에는 하나의 몸에 얼굴이 두 개인 용을 앉혔는데, 윗입술을 위로 젖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이상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용뉴는 긴장된 자세로 버티면서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포뢰와 경어에 관한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참고문헌: 허균의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보물 제277호로 지정된 내소사고려동종은 원래는 내변산 청림사에서 주조된었다. 종신 하단에 ‘靑林寺銘’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부안21

 

청림사 銅鐘이 내소사로 간 까닭…

보물 제277호 내소사 고려동종은 높이 1.03미터,
구경 0.67미터의 범종으로 고려시대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
장엄하고 미려한 동종이다.
종신 하단의 撞座와 당좌 사이에는 前後 3種의 鐘銘과 鐘記가 있어.
주조년대 등이 명확하다.
이 명문들을 종합해보면,
이 종은 고려 고종 9년(1222년)에 청림사에서 주조되었고,
청림사 폐사 후 땅속에 묻혀 있다가 조선 철종 4년(1853)에
내소사로 옮겨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종이 내소사로 옮겨진 데에는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를 효산 스님한테 들어보기로 하자.

(1990년 전라북도 발행, ‘전설지’)

靑林寺는 변산 안의 상서면 청림리에 있었던 절로
변산의 4대사찰 중의 하나였는데 언제 불타 없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청림사 터에서 나온 동종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이 절이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절이란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靑林寺銘
扶寧邊山中有靑林
三韓前寺革古鼎今…(하략)

절이 있었던 터에는 청림리라는 마을이 들어서 있으며,
마을 한복판에 묘가 하나 있는데 이곳에 예전에 탑이 서 있었다하여
지금도 ‘탑거리’라고 부르고 있으며,
마을 남쪽 개울가를 ‘부둣거리’라고 부르는데,
이는 아마도 지난날 부도가 있었던 자리가 아닌가 한다.
옛날 청림사가 한창 번창하였을 때는
이 마을 입구의 큰길 거리에 ‘중장(僧市)’이 섰다고 전해지고 있다.
(<東國輿地勝覽>에는 靑臨寺로 기록되어 있음.)

아무튼 절이 불타버리고 절의 경내였던 자리에는 마을이 들어섰는데,
그때 대웅전 자리에는 지금 부안김씨 집안의 재실이 들어서 있다.
이 재실 지을 때 일꾼들이 지경을 닦느라고 땅을 파니
땅속에서 큰 종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종이 바로 보물 제277호 내소사고려동종이다.
이 때가 철종 4년(1853년),
그런데 종을 땅속에서 캐어 아무리 쳐봐도
도무지 소리가 나지 않는 벙어리 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궁리 끝에
종을 치면서 변산 안의 모든 절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개암동의 개암사!’

‘중계의 실상사!’

모든 절 이름을 다 부르며 쳐보아도 소리가 나지 않더니

‘돌개(石浦)의 내소사!’

하고 부르면서 종을 치니까 비로소

‘우웅…’

하고 맑고도 우렁찬 종소리가 변산 안에 가득히 퍼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종을 내소사로 옮겨왔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4년 0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