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두 볍씨자국토기편은 전영래 박사가 습득, 소장하고 있다.
부안의 문헌에 볍씨자국토기편은 보이는데 사진자료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전영래 박사를 수소문해 여쭈어 봤더니 당신이 소장하고 있노라고 했다.
사정을 말씀드리고, 박사님 댁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이 위의 사진이다.
박사님은 ‘출토’가 아니라, ‘습득’이라고 ‘습득’을 유독 강조 하셨다.
김제 벽골제 민속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볍씨자국토기편은
위 사진의 것을 모조한 것이다.
말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김제 벽골제 민속박물관에 들를 때마다 김제가 부럽기만 하다.
3면에 바다를 끼고 있고, 너른 들을 끼고 있는 부안…
일찍이 해양문화가 발달하고,
김제와 더불어 농경문화를 꽃피운 고장 아닌가?
계화도유적, 대항리패총, 곳곳에 산재한 고인돌,
볍씨자국토기편, 죽막동제사유적,
그리고 김제의 벽골제와 동시대의 축조물로 부안 들판을 적셔온 ‘눌제’ 등,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위의 유물들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부안에 해양문화전시관, 농경문화전시관을 세워도
손색이 없지 않겠는가?
한반도에서 최초로 부안에서 발견된-볍씨자국토기편
주산과 보안의 면계에 ‘소산산성(所山山城)’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고지도에는 ‘묵방산(墨方山)’으로 표기되었다. 묵방산은 태인허씨 선산인데 부안사람들은 지금도 묵방산이라 부른다. 소산산성은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주산(舟山, 배메산231m) 줄기의 동쪽 끝인 소산(所山, 146m)의 정상을 테머리식으로 두른 토성이다. 사산(蓑山)으로부터는 동남으로 약 2.5km 떨어져 있고, 동으로는 고부천을 사이에 두고 두승산과 마주보고 있다.
1965년 이곳 성터에서 볍씨자국토기편이 채집되었다. 삼각형 석도편, 망치돌, 편평석기 등의 석기류와 옹형, 단지형, 발형, 배형 등의 적갈색 무문토기편, 김해식 타날문토기, 홍도, 흑도편, 백제계 도질 단지편, 회색 와질토기편 등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벼농사를 표명하는 고고학적 자료이다.
볍씨자국이란 토기를 빚을 때 토기에 묻었던 볍씨가 그릇을 구운 다음 그 찍힌 자국이 석고에 뜬 것처럼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볍씨 자체의 실물은 아니나 그 형태를 볼 수 있어 탄화미와 함께 벼농사를 증명하는 직접적 자료이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많은 볍씨자국토기가 발견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1920년대 김해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탄화미가 전부였다. 이처럼 고대미(古代米) 자료가 불충분하자 일본학자들은 벼농사의 일본→한반도 전래설을 공공연이 주장하며 그들의 우월성을 과시했다. 그러던차에 당시 전영래 전주시립박물관장에 의해 1975년 두 건과 1976년 한 건이 보고되어 일본학자들의 학설을 일축해버릴 수 있었다.
세 건의 볍씨자국토기편은 부안의 소산리와 반곡리, 고창의 신림면에서 발견된 것으로 소산리 볍씨자국은 길이 6.5mm, 폭 3.8mm로서 장폭비(長幅比) 1.71이고, 반곡리 볍씨자국은 길이 6.2mm, 폭 4.0mm, 장폭비 1.55가 된다. 이들의 장폭지수를 일본의 것과 대비시켜보면 소산리는 후쿠오카의 「아따즈께(板村)」유적의 1.82와 비슷하고, 반곡리는「下須川」유적의 1.56과 비슷하다. 이러한 계측치는 모두 「O.S 자포니카」품종에 속하는 것인데, 소산리는 그중 IB형으로 일본 최고의 벼농사유적인「板村」과 그 입지반출유물(立地伴出遺物), 볍씨의 유형 등이 비슷함으로 그 연대도 기원전 2∼3세기경으로 보여지고, IA형인 반곡리는 4∼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부안지방고대위곽유적과 그 유물(전영래)
삼한시대 저수지 ‘눌제’
고부에서 줄포쪽으로, 관청(마을)을 막 벗어나면 드넓은 벌판이 전개된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도로가 여기서부터는 더 좁아지는데, 특히 고부천 다리를 지날 때는 버스끼리는 도저히 비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아 불평을 쏟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도로의 역사를 안다면 불평만 쏟을 일이 아니다(지금 한창 도로 확장공사를 하고 있지만…).
이 도로는 일찍이 삼한시대에 축조된 눌제(訥堤)의 제방이다. 눌제가 저수지로서의 기능이 쇠하자 남쪽 4km 전방에 흥덕제를 축조하여 눌제의 역할을 하게 했으며, 눌지(池)는 농경지로, 눌제의 제방은 정읍 줄포간의 지방도로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눌제는 제방이 1200步(步:약 1,5m)이고, 주위가 40리였다’고 한다. 제방의 길이가 약 1.8km나 되는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수지였던 것이다.
전라북도에는 눌제 외에도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의 碧骨堤 익산의 黃登堤가 있다. 이 세 저수지를 더불어 三湖라 일컬었으며, 湖南지방, 湖西지방이라는 호칭은 이때 유래되었다고 한다.
눌제 유역인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에서 기원전 2.3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볍씨자국 토기편이 전영래 박사에 의해 습득되었다. 이는 이 지방이 우리나라 벼농사문화의 발상지임을 증명한 셈이다. 또한 눌제는 堤防文化의 嚆矢이기도 하다.
조선 중엽의 실학자 유형원은 반계수록의 田制後錄에서 “이 3堤에 저수를 해 놓으면 노령 이상은 영원히 흉년이 없어 가히 중국의 곡창인 蘇州나 杭州에 견줄 수 있으니, 온 나라 만세의 큰 이익이 되는 국세의 과반이 湖南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눌제는 곡창 호남을 적시는 젓줄로 마한-백제-고려-조선의 중요한 국가시설이었던 것이다.
눌제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아래에 덧붙인다.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가 아뢰기를 “김제군 벽골제와 고부군 눌제가 무너지고 터져서, 일찍이 풍년을 기다려 수축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둑의 모양이 위가 좁아 둘려 있는 길 같고, 아래는 넓어서 언덕 같아 물이 위로 넘지 않으면 반드시 언덕을 무너뜨릴 염려가 없는데, 어찌 덧쌓기에 급급하신지요. 또 고부군의 눌제는 무술년(태종 18, 1418) 가을에 거의 1만 명을 부려서 한 달 만에 이루고, 옛적 정전의 10분의 1법에 따라 나누어 경계를 삼고, 사전 9결을 받은 자가 (1결씩 받은 자 아홉이) 함께 공전 1결을 가꾸어 바치는데, 그 토지가 비옥해 공사(公私)의 수확이 모두 풍족하여 그 이익의 큰 것을 돌을 세워 공적을 기록했으니 또한 벽골제와 맞먹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비를 만나 무너졌으니, 이는 둑이 굳세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감수하는 자가 물을 잘 소통시키지 않았기 때문으로, 책임의 소재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일을 맡았던 자가 도리어 제방의 위치가 마땅치 않았다 하여 힘을 덜 들이고, 무너진 것을 보수함이 편한 줄을 생각지 않고 망년된 생각 내어 수만의 무리를 동원하여 옛 둑 아래의 넓은 들로 옮겨 쌓아서 보안현 바로 남쪽 뜰까지 끌어넣고, 산과 들을 파서 도랑을 내어 서쪽으로 검포바다(곰소 앞 바다, 즉 줄포만)까지 통했으나, 그것으로 무너져 터질 근심을 면할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
/허철희buan21@buan21.co.kr/풀씨 9호 기고 글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4년 02월 22일 2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