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막동제사유적

 

▲적벽강 연안, 서해를 향해 달려 나간 끝지점에 수성당이 있다.

 

언젠가 부안을 찾은 풍수대가 한 분이 변산을 한 바퀴 삥 둘러 보고는 이렇게 얘기했다. ‘변산반도는 호랑이 자지고만, 그런데 까지지는 않았어…’. 변산반도가 서해에 불쑥 돌출돼 있다는 얘기다. 지도를 펴놓고 들여다보면 금방 수긍이 가는 얘기다. 그런데 수성당이 있는 적벽강 용두암(사자바위)은 그 돌출된 변산반도에서 다시 한번 서해 깊숙이 돌출되어 있다. 예사롭지 않은 지형이다.

원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제사를 지내왔던 곳

지리적으로 봤을 때, 이곳 수성당이 위치한 지점은 선사시대 이래로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중요 지점이었으리라 여겨진다. 항해술이 발달되지 못했던 6∼7세기 이전, 배들은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부분을 추적하면서 항해했을 것이고, 따라서 특이한 형상(사자가 바다로 뛰어드는 형국)으로 돌출되어 있는 이곳을 항해상의 주요한 표시지점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곳은 삼국시대가 되면 초기백제의 근거지인 한강하류유역으로 북상하는 기점이 되고, 5세기 후반 백제가 남천한 후에는 웅진과 사비로 들어가는 금강입구를 감시하기에 용이한 지점이라 여겨진다. 또한 이곳의 해양환경을 살펴보면 연안반류(沿岸反流)가 흐르고, 조류가 심한데다 주변에 섬들이 많아 물의 흐름이 복잡하며 바람도 강해서 예로부터 조난의 위험이 컸던 곳이다.

부안 죽막동제사유적은 바로 이곳 수성당 옆에 있다. 1992년 전주박물관에서 수성당 주변을 발굴하여 이곳이 선사시대이래로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우리나라의 원시신앙에 대한 연구는 선사시대 이래로 특정의 유물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시작되어 왔다. 그 이유는 원시신앙이 고대인의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집단의 결속과 사회운영원리를 알려줌에도 불구하고 관련 연구자료로서는 소량의 유물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석기시대의 주술적인 신앙과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의 농경제의, 수렵제의, 샤머니즘 등, 다양한 형태의 신앙이 존재하여 왔음이 알려졌다. 그리고 원삼국시대가 되면 여기에 소략한 내용이나마 중국 측의 문헌기록을 더해 초기국가와 삼한사회의 신앙형태로 동맹(同盟), 영고(迎鼓), 무천(舞天), 계절제(季節祭), 소도신앙(蘇塗信仰) 등이 알려져 있다.

▲죽막동제사유적유물-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수성당 주변을 발굴하여 이곳이 선사시대이래로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강화도 마니산의 첨성단이나 태백산의 천제단 등,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바다에 제사를 지내는 곳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죽막동제사유적은 우리나라 원시신앙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고고자료가 되리라 여겨진다. 유물은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삼국시대가 되면 고고자료와 문헌자료가 더 풍부해져서 원시신앙의 배경과 그 양상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나, 문헌자료로 제일 중요하게 평가되는 ‘삼국사기’조차도 편찬자의 유교적 사관으로 말미암아 원시신앙에 대해 의도적으로 내용을 누락시키거나 그 내용을 왜곡시킨 경우가 많았고, 고고자료의 경우 제사 혹은 제의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이 미비하였다. 이렇게 미비한 자료이지만 ‘삼국사기, 본기와 제사지를 분석하여 보면, 국가가 주관한 천(天), 지(地), 시조(始祖)에 대한 제사 외에 다양한 형태의 제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제사지에는 성문 앞, 숲, 대로, 정원 등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이 나오는데 비록 그것이 신라에서 국가나 왕실이 주관한 제사라고 할지라도 ‘삼국사기’ 편찬자의 사관을 감안한다면 백제의 경우에도 같은 형태의 제사가 있었을 것이고, 또 일반 민중에 의해서 주관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고학적 유구(遺構)에서 천안 위례성의 산성과 관련된 제사, 부여 궁남지의 수로와 관련된 제사, 하남 미사리의 부뚜막과 관련된 제사 등이 확인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죽막동제사유적은 바다와 관련된 제사로 주목할만하다. 바다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선사인의 식량획득지로 중요하였고, 또한 물자나 사람의 이동에 중요한 배경이 되어왔다. 그러나 바다는 인간에게 유리한 생존배경이 되어 온 반면에 가변성이 많아서 경외의 대상이 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바닷가에 거주하거나 바다에서 주요활동을 하던 고대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제사를 지냈음이 분명하고, 그 시원은 현재의 자료로 보건대 원삼국시대임이 분명해 보인다. 즉 한반도 남부지방의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소형 토기, 토제모조품을 이용한 제사, 복골(卜骨)을 이용한 복점(卜占) 등이 그것이다. 그 이후 3∼4세기 대에는 삼국사이나 중국, 일본과의 관계가 활발하게 되면서 제사의 성격도 보다 다양해진다. 그리고 삼국시대 이후에도 바다와 관련된 제사는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죽막동제사유적이다.

다음은 전주박물관이 죽막동제사유적지에서 발굴한 제사유물을 소개한 내용이다.

「출토된 토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은 절벽위의 평탄면, 즉 수성당 뒷편의 8× 9m2 범위에 20∼30cm의 두께로 쌓여 있었다. 유물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은 삼국시대의 일부 유물에 한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교란상태로 출토되었다.

먼저 삼국시대 유물로는 각종 항아리, 그릇받침, 독 등의 토기류와 쇠창, 쇠살촉, 안장틀, 말띠두르개, 청동방울, 청동거울 등의 금속유물, 도끼, 거울, 손칼, 갑옷등의 실물을 모조한 석제, 토제모조품이 있다. 그 외에도 구슬류, 중국제 도자기가 소량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금속유물은 큰독의 내부에 넣어져 있는 상태로 출토되었고, 석제 모조품은 좁은 범위에 쌓여 있었다. 그 외의 유물들은 개체별로 좁은 범위 내에서 모여진 상태로 출토되었으나 토제 말, 중국제 청자, 구슬 등은 정형성이 없이 흩어져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토기, 기와, 백자가 여러 군데 흩어져 있었는데, 이미 교란된 것이었다. 토기들은 주로 단지, 접시, 병이고, 자기류는 접시, 잔, 합, 병과 말모양 자기 등이며, 기와류는 막새는 하나도 없이 모두 평기와 뿐이었다. 」

이렇게 죽막동제사유적의 지리적 위치, 해양환경, 유물의 출토상태 등을 고려할 때 죽막동제사유적은 항해나 어업활동과 관련된 제사유적으로 볼 수 있다. 해안가 절벽위을 선택하여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낸 대상은 출토된 유물 중 바다를 통한 외국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중국제 도자기, 석제 모조품과, 수령신앙(水靈信仰)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토제 말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海神임이 분명하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항해하는 선박들과 어업활동을 하는 많은 고기잡이배들의 안전을 위해 지리적으로 중요한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참고문헌, 전주박물관 발행 「바다와 제사」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8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