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이 낳은 대시인 신석정은 1924년 ‘조선문단’을 통해 나온 시조시인 조운과도 알게 되었다. 전남 영광 출신인 그의 대표작으로는 ‘석류’가 유명하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은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조운/석류>
석정은 이를 입신의 경지가 아니고는 얻어 볼 수 없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석정은 그의 시집 ‘촛불’에 나오는 추고삼제 속에서
후원에 따뜻한 햇볕 굽어보면
장꽝에 맨드레미 고옵게 빛나고
마슬 간 집 양지끝에 고양이 조름 졸 때
울 밑에 석류알이 소리없이 벌어졌네
투명한 석류알은 가을을 장식하는 홍보석이어니
누구와 저것을 쪼개어 먹으며
시월상달의 이야기를 남기리…
<신석정/석류>
라고 읊었다. 석정의 ‘석류’도 조운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과 운치가 감도는 작품이다. <이치백의 ‘신석정의 시문학’ 중에서 발췌>
석류(石榴)
석류는 유사 이전부터 인류가 가까이한 과일나무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 예로 석류의 껍질이 신석기시대 유물 중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매우 신성시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성서의 출애굽기28:33에는 대제사장이 입을 겉옷 가장자리에 석류를 수놓게 하였다. 또한 석류의 모양은 솔로몬 성전의 기둥을 장식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석류의 원산지는 페르시아 지방으로, 서쪽으로는 시리아에서 이집트로 전해졌고, 그 다음 그리스로 건너가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퍼졌다.
동쪽으로는 중국의 한 무제 때인 기원전 126년 장건(張騫)에 의해 전해졌다. 장건은 13년간에 걸친 서역(西域) 순례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석류를 중국에 처음 가져왔던 것이다.
이후 중국에 널리 퍼졌고 아름다운 꽃과 독특한 열매 때문에 다산의 의미로 여겨 蓮과 함께 옷이나 생활용품을 장식하는 문양으로 쓰였다. 또한 수많은 시가(詩歌)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동국이상국집에 등장하고 고려자기의 문양으로도 쓰인 것으로 보아 고려 초 이전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석류나무는 석류과(石榴科 Punicaceae)에 딸린 낙엽 소교목으로, 잔가지가 많이 갈라져서 퍼지고 높이 10m정도까지 자란다. 잎은 긴 타원형으로 마주 달리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또한 윤채(潤彩)가 나고 털이 없다. 잔가지는 네모지고 털이 없으며, 끝이 가시로 변해 있다.
석류꽃은 잔가지 끝에 1~5개씩 밑으로 쳐져서 달리는데, 꽃받침이 발달하여 몸통이 긴 작은 종(鐘)모양을 이루며, 끝은 왕관 모양으로 여러 개로 갈라지고 6장의 꽃잎이 진한 붉은 빛으로 핀다.
이런 꽃 모양을 보고 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은 ‘짙푸른 잎사귀 사이에 피어난 한 송이 붉은 꽃(萬綠叢中紅一點)…’이라고 노래하였다. 오늘 날 우리가 흔히 뭇 남성 속의 한 여인을 말하는 ‘홍일점’의 어원이 된 것이다.
석류의 과실은 꽃받침이 크게 자라난 것으로 큰 것의 경우 지름이 10cm정도로 둥글고, 등홍색 또는 황적색이며, 햇빛이 많이 닿는 쪽이 보다 진하게 나타난다.
과일 껍질의 안쪽은 진홍색이며 그 속에는 종자들이 질서 있게 박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보석이 들어 있는 듯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종자는 흰색 또는 붉은색이 도는 외피로 싸여 있는데 즙액이 많아서 수정류라고 하며, 단맛과 신맛이 적당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음용 또는 약용하였다.
약효는 강장제로 알려져 왔으며 특히 고혈압과 동맥경화 예방에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또 설사, 이질, 복통, 대하증 등에 마시면 구충제의 작용도 한다.
꽃봉오리는 빨간색 염료, 의약 및 무두질하는 데 쓰였으며, 과육은 음료와 술의 향료로 쓰였다. 또 열매의 껍질과 더불어 나무껍질도 약용으로 쓰였는데, 전자는 이질 등에, 후자는 구충효과에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 사진 허철희 (2005·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