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향토사학자.전 부안여고 교장)
지난 4월 8일(1999년) 변산 位金山城 아래 개암동,
개암호의 만수로 넘치는 수문 앞에서는 길이 6.5m, 폭 2.1m 크기의
거대한 龍塘旗에 청룡이 용트림으로 오르는 모습을 그린 용신을 모시고
풍년을 기원하는 龍神祭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용은 물을 관장하는 水神이어서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上西面 농민회원들이 한해의 농사일을 시작하는 始農의 의식을 겸한
물내림의 행사로 개암호 깊은 물에 棲依하고 있을 농업의 신인 용신에게
雨順風調와 除厄進慶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농민들의 협동 단합을 다짐하는 한마당 굿놀이 판의 축제를 연 것으로
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농경축제문화의
재생적인 시도였다고 보아진다.
이날 수많은 농민들과 기관장들이 풍물굿패와 하나되어
푸른 물 넘치는 개암호반에서 용그림에 畵龍點睛의 點眼式에 이어
제단에 향피우고 용신에게 술잔 올려 告祝하며 소지축원으로 이어지는
이 굿놀이 축제를 보면서 옛문화에 바탕을 둔 순수한 우리 문화의
한가닥 맥을 다시 보는 흐뭇한 마음 그지없었다.
용은 봉황, 거북, 기린과 함께
옛날부터 상서로운 동물인 四靈의 하나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우리 부안지방의 地名에만도 龍자가 든 이름이 18개나 보인다.
뿐만 아니라 궁궐의 지붕, 사찰의 법당과 처마, 스님들의 부도,
사대부의 묘비 등에 용을 그리거나 새겼으며,
미술작품은 말 할 것도 없고 의류, 문방구류, 장신구 등에도
龍紋은 제각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새겨져 있어
우리 겨레는 먼 옛날부터 다양한 용문화 속에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용은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그럼에도 용은 우리 문화 깊숙이 고급스럽게 파고들었다.
용은 우선 권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최고의 권력자인 帝王을 상징한다.
임금의 얼굴은 容顔이요, 앉는 자리는 龍床이며, 입는 옷은 龍袍라 하고,
임금이 흘리는 눈물은 용누(龍淚 : 용의 눈물)요,
임금이 타고 다니는 수례는 龍輿, 龍車라 했다.
또 登龍門이라는 고사성어는 우리들이 흔히 쓰는 말로써
뜻을 이루어 크게 출세한다는 말로 입신출세를 뜻하는 말이지만
원래는 중국의 黃河 중류 山西省 河津의 서북에 있는
급한 여울목의 이름인데 잉어가 이 요울목을 뛰어 오르면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 하여 생겨난 말로
출세의 길에 올랐다는 뜻이다.
우리 민속에서 용은
농업의 신으로 농사의 豊.凶을 좌우하는 영물로 여겨 왔다.
龍生九子라 하여 아홉 종류의 용이 있지만
특히 날아 다니는 웅용(應龍 : 또는 청룡)이
구름과 비바람을 몰고 다닌다고 믿어
날이 가물면 용이 깃들어 있다는 龍沼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우리 부안의 옛 邑誌에 의하면
곰소와 직소폭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灌漑 수리시설이 거의 없었던 옛날에는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를 지었으므로 날이 가물면 용신에게 기우제를 지냈는데,
용그림을 그려 놓고 지냈다는 최초의 기록이
<三國史記> 진평왕 50년 조에 보인다. ”
여름에 크게 가물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가물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오기를 빌었다.” (夏大旱移市 畵龍祈雨)”,
그리고 <太宗實錄> 21권 신묘 11년 (1411년) 6월 21일 신사조에도
가뭄이 심하여 “종모 사직과 백악, 목멱, 한강, 北郊에 제를 지낼 때
검교참의 崔德義를 시켜 楊津에서 畵龍祭를 지내게 하였다.” 하였으며,
世宗實錄에도 용그림을 그려 세우고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인다.
<山海經>의 <大荒東經>에 의하면
“大荒의 동북 쪽 모퉁이에 凶黎土丘라는 산이 있는데
應龍은 이산의 남쪽 끝에 산다.
蚩尤와 과부를 죽이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下界에 자주 가뭄이 들었는데 응용의 모습을 만들면
큰 비가 내렸다” 하였다.
이로 보아
용그림을 그려 우순풍조를 축원하는 용신제의 용당기 용은 응용을 뜻하며,
이를 우리는 흔히 靑龍이라 한다.
農耕社會 시절의 우리 농촌에는 3,4개 마을을 한 단위로 하여
그 중심 마을에 용당기가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말경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동진면 장신리,
부안읍 서외리, 행중리, 상서면 청등리 등에 용당기가 있었던 마을로
확인되었다.
지금은 유일하게 장신리에만 1936년에 梧堂 趙重泰라는 화가가 그린
용당기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앞에서 말한 상서면 농민회가 제작한 용신기도 장신리 용당기를 보고
거기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그림은 주산면 출신 박홍규 화백이 그린 것이다.
청룡이 붉은색 如意珠를 물었다 토했다 희롱하며
높이 오르는 형상의 이 용그림을 보노라면 우주의 무한함과
오묘한 섭리를 느끼게 한다.
마을에서 용당기를 공식적으로 밖에 내어 꽂는 일은
정초와 칠월백중날 두 차례였다.
정초에는 이웃마을의 農旗들이 형님 마을의 용당기에게
旗歲拜를 하려 오기 때문이며,
백중날은 농사일이 끝난 “호미씻기 날” 이어서 용당기를 세워 놓고
풍년을 구가하는 놀이판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옛날의 농촌에서는 용신기가 있는 마을이 어른 마을이요, 중심 마을이었다.
아무리 양반이 많이 사는 班村이라도 마을의 座上이 풍물굿을 이끌고
용당기가 있는 마을로 기세배를 드리러 간다고 한다.
마을에는 자율적인 농민조직이 있어 가장 어른인 지도자를 座上이라 하고,
좌상을 도와 일을 집행하는 사람을 公員이라 하였으며,
청년층을 대표하는 사람을 소좌(小座 : 수머슴)이라 하였다.
이 농민조직의 위계질서와 규율은 매우 엄격하였다 하며,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위계질서나 綱常을 문란하게 하는 사람은
좌상의 명에 의하여 벌을 받았으며,
때에 따라서는 버드나무 곤장으로 볼기를 쳤다고 한다.
장신리 용당기 한쪽에는 당시 마을 조직의 임원들 이름이 밝혀져 있다.
上西농민회에서 우리 겨레문화의 뿌리에 바탕을 둔 農耕文化를
오늘에 맞게 재생하여
한마당 풍농의 축제로 昇華시킨 開岩湖畔의 龍神祭는
겉치레와 낯내기, 그리고 국적불명의 문화행사에 식상했던
우리들에게 오랜만에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할 것이다.
/허철희
(글쓴날 : 2003년 4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