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휼민선정비

 

자를 경덕(敬德), 호를 일당(一堂)이라 한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인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牛峰) 이씨 호석(鎬奭)과 신씨(辛氏) 사이에서 태어나서 열 살 때부터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의 양자가 되었고, 1870년에 양주 조씨 병익(秉翼)의 딸과 결혼했으며, 1882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규장각 대교 검교, 홍문관 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 등을 거쳐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거쳐 1887년에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이 되어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다. 이 해 12월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890년 10월에 귀국하여 우부승지,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육영공원 판리, 외무협판 등을 거쳐 1895년 5월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바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는데, 미국으로 가려다가 당분간 정세를 관망하는 사이에 아관파천(1986. 2)이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불려간 그는 재빠르게 친러파로 변신하여 여러 벼슬자리를 누리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그는 친러파로 몰려 한직인 평안남도 관찰사와 전라북도 관찰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는 전라북도 도백이 되어 임지에 내려와서 변산 구경에 나섰다. 가마를 타고 고개를 넘어 내변산으로 들어갔는데, 변산면 지서리에서 쌍선봉을 바라보고 내변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남여치(藍輿峙)’라는 땅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1898년(무술년) 어느 가을 밤이었다. 갑자기 줄포에 큰 해일이 밀어닥쳐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잃고 인근 야산으로 피신해야 했다. 줄포항의 배들은 지금의 십리동 마을과 장동리 원동 마을의 똥섬으로까지 밀렸다. 이 가운데에는 비단을 실은 중국 배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도백인 이완용은 줄포에 와서 참상을 살피고 난민 구호와 언뚝거리 제방을 중수토록 하였다. 제방은 더욱 견고하게 수리되었고 이 후 일제 때 서빈들 매립공사가 이어져 오늘의 줄포 시가가 형성되었다.

이듬 해 정월 부안 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 사업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장승백이(현 장성동) 당산나무 아래에 세운 이 비석의 앞면에는

觀察使李公完用恤民善政碑
郡守兪候鎭哲
己亥正月   日

이라 새겨 있고, 뒷면에는

海若不  我公巡審我候董築
民庶基兼一奚一驢民奠舊閭
軫厥凍  澤流一坊勒石銘口
惠俱損泳焉涵焉蘇陳岡專

이라고 새겨져 있다.

광복이 되자 매국노를 칭송하는 이 비석은 수난을 맞기 시작했다. 유실 위기에 처한 이 비석은 한 개인(신창근)에 의해 보관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에 당시 줄포 면장(김병기)이 이 비석을 3,000원에 구입하여 줄포면 청사 뒷편에 세워두었다.

20여년을 면청사 뒷편에서 사람들의 눈길도 끌지 못하던 비석은 1994년에 ‘나라 바로 세우기 및 일제 잔재없애기 운동’의 일환으로 군의 지시에 따라 다시 철거되어 지금은 면사무소 어느 창고에 있다.


/허철희 
(글쓴날 : 2003년  0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