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풍어를 기원하며, 원당제-용왕제-띠뱃놀이 속으로

위도면 대리마을의 정월초사흗날 풍경

“돌아보건대, 무릇 대저항리(대리의 옛이름)의 원당은 큰 바다의 험준한 봉우리 위에 위치하여 신령스럽고 기이한 기운이 특별히 이곳으로 모여들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숭배합니다. 당신(堂神)이 신령하여 O…O 기도가 있으면 반드시 응답하니, 팔도 연로(沿路)에 있는 큰 O…O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O…O, 모두들 그(堂神)의 그윽한 가호를 받아 재물이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향과 예물을 올려 축원하기를 누가 정성껏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원당을 세운 지가 이미 오래되어 비바람이 새고 스며들어 보수하여 고치는 것이 시급한데,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마음 속의 경영한 바를 괴롭게도 (실현할) 좋은 방도가 없습니다. 원컨대 각처의 크고 작은 배 여러분들께서 특별히 함께 구제할 의리를 생각하시어, 각각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내어서 마땅함에 따라 도와주시어, 이 원당을 일신할 수 있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제물을 준비하고 있는 제관ⓒ고길섶
▲띠뱃놀이전수관에서 음식(피장국)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고길섶
▲돼지고기를 삶으며 원당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동네사람ⓒ고길섶

1900년에 작성된 문서 <원당중수기(願堂重修記)>의 서문입니다. 위도면 대리(大里) 마을의, 당시 화주(化主, 무녀와 함께 굿을 준비하고 이끌어가는 사람) 서익겸의 집안에 내려오는 고문서입니다. 원당을 보수하고자 하는 사정을 알리고 비용을 십시일반으로 모금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원당이란 소원을 빌기 위하여 세워놓은 집을 말합니다. 대리마을의 원당은 칠산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동쪽 당젯봉 봉우리에 있으며, 위도에서 역사가 깊고 영험하기로 소문난 당입니다. 열두서낭을 모신 이 원당에서 음력 정월 초사흗날 원당굿을 하고 이어서 마을에 내려가 용왕굿을 한 다음 앞바다에 띠배를 띄워보냅니다. 이와같은 일련의 제의 행위는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뱃사람들의 풍어와 무사고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1900년 당시 원당 중수 비용을 댄 뱃사람들의 거처를 보면 대리 마을의 원당이 서해바다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도의 선주들뿐만 아니라 줄포와 비응도, 군산, 계화도, 완도, 그리고 멀리는 황해도 옹진에서까지 비용을 댔다는 기록이 <원당중수기>에 나타납니다. 위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기어장이었던 칠산어장의 중심지였습니다. 칠산어장은 남으로는 영광 앞바다의 안마도에서 북으로는 고군산열도의 비안도에 이르기까지 넓은 어장입니다. 지금은 쇠퇴하였지만 칠산의 조기어장은 1920년대 절정에 달했습니다. 황해도 옹진의 선주조차 머나먼 이곳 대리마을 원당의 중수 비용을 대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여기에 있었던 듯합니다.

▲원당제의 모습ⓒ고길섶

▲원당에서 칠산바다를 향해 절을 하는무녀ⓒ고길섶

의미가 변하고 있다

그후 108년이 지난 오늘날 2008년의 정월 초사흗날 대리마을 풍경은 어떨까요? 위도띠뱃놀이가 1978년 10월 춘천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지 30년이 되며,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지 23년이 되는 오늘입니다. 1980년에는 위도띠뱃놀이보존회가 결성된 바 있습니다. 그 영광의 세월이 흐르고 흐른 2008년의 정월 초이튿날 오후 띠뱃놀이전수관에서는 무녀와 화주, 화장 등이 제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숙’ 또는 ‘지숙’이라고 불리는 수퇘지는 굿에서 가장 중요한 제물입니다. 수퇘지 한 마리와 함께 쌀, 과일 등 제물들은 요즘에는 육지인 부안시장에 나가 장을 봐 옵니다. 장을 봐 올 때에는 부정타지 않게끔 조심하면서 엄숙하게 진행합니다. 술쌀로 제주(祭酒)를 빚고 통돼지를 잡아 제사에 쓰도록 손질합니다. 돼지머리와 내장을 삶은 가마솥은 그 열기가 더해져 위도 특유의 음식 피장국을 펄펄 끓입니다.

띠뱃놀이는 전통적으로 매우 엄격하게 준비하고 진행해왔습니다. 마을의 주민총회를 통해 결정되는 화주와 화장 같은 제관들은 남자 중에서 부정탄 행위를 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어야 하고 까다로운 금기를 지켜야 합니다. 또한 띠뱃놀이전수관과 마을 동서쪽의 당산머리에는 금줄을 쳐서 외부에서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이 금줄은 보통 새끼줄과 달리 ‘왼삿’ 즉 왼새끼를 꼬아 만드는데, 이는 귀신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저런 금기가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금줄을 쳐놓은 당산머리의 마을 입구에서 잡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람이 지켜 서 있던 풍습도 사라졌습니다. 오늘날의 금줄은 마을이 신성한 영역으로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의미 정도로 보입니다.

▲귀신들을 불러들이느라 돼지고기를 굽는 화장ⓒ고길섶
▲원당 바깥에서 흥을 돋구고 있다ⓒ고길섶

엄격했던 제의행사가 덜 엄격해진 제의행사로 변하게 된 것은 띠뱃놀이의 위상 변화와도 관련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위도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화려했던 칠산어장이 쇠퇴하고 고기잡이 배도 현대화됨에 따라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마을의 공동체적 의식행사는 띠뱃놀이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조기잡이 배의 선주들이 비용을 부담하여 행하던 대규모의 별신굿은 이미 50여년 전에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고기잡이에 더이상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서 풍어의 집단적 기원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2003년 위도 사람들이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다고 하여 시끄럽게 했던 일은 고기잡이가 더이상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절실한 판단 때문입니다.

부안 사람들도 함께 고민해야

더구나 마을에 교인들이 상당수 차지하면서 참여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원당에서 만난 한 젊은이는 이 점을 심각하게 짚었습니다. 정월 초사흗날 아침 원당제 행사를 위해 원당으로 올라가는 일행에는 무녀와 제관, 행사관계 주민들과 사진 찍는 사람들, 그리고 몇몇의 ‘정치인’들 외 일반 주민들은 많이 볼 수 없었습니다. 띠뱃놀이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월 초사흗날 행사가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부터 소외되는 듯합니다.

▲용왕제와 띠배를 준비하고 있다ⓒ고길섶
▲허세비를 만드는 동네사람들ⓒ고길섶
▲띠배에 허세비를 실었다ⓒ고길섶

그러나 그럼에도 원당제가 진행되는 동안 마을 바닷가에서는 용왕굿과 띠뱃놀이, 그리고 주민 및 외부 손님들을 위한 음식 준비에 많은 주민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간혹 눈발이 휘날리는 날씨 속에서 어선들은 풍어를 기원하는 오색기들을 나부끼고, 주민들은 띠배와 허세비(띠배에 실어 보내는 짚으로 만든 인형)를 만드느라 한창입니다. 2007년 8월 위도 사람들이 채택한 ‘위도비전 선언문’은 위도띠뱃놀이에도 주목합니다. “우리는 국가 무형문화재인 위도띠뱃놀이가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힘써 보존 발전시키고, 전통을 존중하며 그에 대한 종교적 편견을 두지 않는다.”

2008년의 띠배도 용왕굿과 함께 칠산바다로 멀어져갔습니다. 영광의 세월이 흘러 칠산어장이 쇠퇴하고 후세대들이 섬을 떠나 인구가 급감하면서, 그리고 현대사회의 생활양식이 전통적 생활양식과 공동체적 믿음을 밀쳐내면서 위도띠뱃놀이는 그 의미가 현저하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삶의 진솔성에 밀착한 민속적 제의의 의미가 사라져가는 오늘날 놀이와 축제로서의 상징문화로 거듭나고자 하는 고민이 엿보입니다. 이는 대리 사람들만이 아니라 부안 사람들이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할 일입니다. 위도띠뱃놀이는 우리 부안 해양문화의 훌륭한 자산입니다.


글/사진 고길섶 문화비평가

*이 글은 부안독립신문에 게재된 글이며 수정증량했습니다.
(글쓴날 : 2008·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