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시대에 부안에는 원(院)이 세 곳에 있었다. 동진원(東津院)과 수세원(手洗院), 금설원(金設院)이 그것이다.
원(院)이란 공적인 임무로 지방에 파견되는 정부의 관리나 상인 등의 공공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던 시설로서 국가에서 경영하는 일종의 여관이었다. 지방도로의 요처나 인가가 드문 곳에 나라에서 원을 설치하였는데 역참(驛站)의 일부 기능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역참에서도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부안현의 역원조에 의하면 <부흥역: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동진원 : 동진의 언덕에 있다. 수세원: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금설원: 현의 남쪽에 있다.> (扶興驛 在縣西二里, 東津院 吊津岸, 手洗院 在縣南六十里, 金設院 在縣南)라고 하여 역참 한 곳에 원이 세 곳 있다 하고 그 위치를 간략하게 밝혔다. 여기서 재현서(在縣西)니, 재현남(在縣南)이니 한 것은 부안현의 치소인 지금의 부안읍내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
그런데 부안지방에 있었다는 세 원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동진원(東津院)이 있었던 청운동(靑雲洞)과 금설원(金設院) 뿐이고 수세원(手洗院)은 그 위치를 알 수가 없다. 동진원이 동진(東津)의 언덕에 있다고 한 것은 동진나루 언덕에 있다는 말로 동진대교 남쪽 1㎞쯤의 지금의 청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며 수년 전까지도 청운동 마을의 원터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부안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동진나루의 옆으로 많은 나그네들이 이용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막연하게 그 위치를 <재현남육십리(在縣南六十里)>라 한 수세원(手洗院)이나 <재현남(在縣南)>이라고만 기록한 금설원(金設院)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수세원(手洗院)은 줄포의 난산리(卵山里) 근처가 아니었을까 추정할 뿐이며 금설원(金設院)은 지금의 진서면 곰소 염전의 북쪽을 금설평(金設坪)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진서리(鎭西里) 근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2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부안읍을 중심으로 부안지방의 요로(要路)는 세 곳이었다. 그 첫째 요로는 동진강의 나루를 건너 서울과 동북부 방면으로 왕래하는 동진나루 길이었다. 부안읍성의 동문(東門)을 나서서 혜성병원 옆 장승배기를 지나 고마제를 끼고 동진장터와 청운동의 동진원을 지나면 장등리 앞이 동진나루에 다다른다. 이 길이 부안의 관문격인 제일 큰 도로였다. 그 다음이 읍성의 남문(南門)을 나서 오리정(五里亭), 매창뜸을 지나 학당고개를 넘어 네거리, 돌모산과 공작리(孔雀里), 덕림(德林), 모래뜸 가다리(蘆槁)를 건너 고부군(古阜郡)에 이르는 길이었으며, 세 번째의 요로는 읍성의 서문(西門)을 나서서 행안의 솔매를 지나 나무개(古棧)을 건너 돼지터의 청등(靑燈)고개와 유정재(楡亭峴)를 넘어 사창(社倉), 영전(英田) 기와골, 줄래(茁萊․周乙浦)를 지나 흥덕, 고창에 이르는 요로다. 수세원(手洗院)은 이 세 번재 요로의 끝자락 어디엔가 있었을 것이다.
원(院)의 제도가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시대에 이미 우역(郵驛)의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이후가 아닌가 한다. 그 설치목적과 이념은 중앙정부의 지방통치력 강화에 있었지만 외교적으로 유교사상에 의한 주례(周禮)의 빈객접대와 불교의 사회복지, 포교활동에 사상적인 기반을 두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원(院)제도가 가장 활발하였을 당시에는 전국에 1,310여개 소의 원이 있었다. 그리고 요로의 중요도에 따라 이를 3등급으로 분류하였는데 대로(大路)와 중로(中路), 소로(小路)제도가 그것이다. 서울에서 개성부, 죽산, 직산, 포천에 이르는 길을 대로라 하였으며, 서울에서 양근까지와 죽산에서 상주, 진천에서 성주, 직산에서 전주, 개성부에서 중화, 포천에서 회양에 이르는 길이 중로요, 그 외의 길은 모두 소로라 하였으니 부안의 세 요로들도 모두 소로, 즉 3등급의 도로였다.
그리고 대․중․소 세 요로들에 설치된 원의 유지경비를 위하여 나라에서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하였는데 대로의 원에는 1결(結) 35부(負)를, 중로의 원에는 90부를, 그리고 소로의 원에는 45부의 원위전을 지급하였으며, 원에는 원주(院主)라 하여 이를 관리 운영하는 책임자를 두었는데 원이 있는 곳 주변 마을에서 원주를 뽑았다. 1결의 면적은 벼 약 천뭇 정도가 생산되는 면적이다.<1결만파(一結萬把), 일파란 한 줌의 분>
원의 주된 기능이 공무로 출장중인 관리나 상인(商人) 등을 위하여 요로의 인가가 드문 곳에 여관을 지어 그들을 도적이나 맹수로부터 보호도 하고 숙식을 제공하며 휴식을 취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때때로 일반 여행자들도 원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기로연(耆老宴: 60세 이상의 노인을 위한 잔치)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진제장(賑濟場: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장소)이 되기도 하였다.
원(院)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점차 쇠락하여 주막․주점으로 변천하여 왔였는데 이는 그 이용자가 공직자로 제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역참의 참(站)에 참점(站店)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거기에서 또한 길손을 흡수하므로 그 모습이 점점 사라져 지금은 지명만이 남아 있다. 서울의 동대문 밖 보제원(普濟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弘濟院), 남대문 밖의 이태원(梨泰院) 등이 모두 지난날 원이 있어서 남아 있는 지명들이며, 그 외에도 경기도 이천의 장호원(長湖院), 황해도의 사리원(沙里院). 충청도 (鳥致院)이나 전라도 지리산 운봉의 여원치(女院峙) 등이 이름 있는 역원들이였다.
우리 옛 단편소설류에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라는 것이 있다. 제목부터가 중요한 길목에 설치되어 있는 원(院)에서 밤에 벌어진 이야기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서울 근교 어느 역원 방에서 동숙하게 되는 길손으로 만나 같이 유숙하게 된 거드름 피우는 무식한 서울의 양반과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꾀죄죄한 가난한 시골 선비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해학과 풍자로 밤을 지새운다는 이야기인데 옛 역원 방의 풍습과 정경이 잘 묘사되어 있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김형주
|
(글쓴날 : 200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