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도 부안지방에 역참(驛站)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고려시대의 역참조직의 자료에 의하면 전라도(全羅道)지방에는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속하는 역참이 21개소, 승나주도(昇羅州道)에 속하는 역참은 30개소, 남원도(南原道)에는 12개소가 있었는데 부안지방의 역참인 부흥역(扶興驛)은 어느 도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제(金堤)의 내재역(內才), 고부의 고원역(苽原․瀛原․鶯谷), 정읍의 천원역(川原), 고창의 청송역(靑松․茂長), 태인의 거산역(居山), 임피(臨皮)의 소안역(蘇安) 등 부령과 보안현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 고을의 역참들은 보이지만 부안지방에 있었음직한 역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미루어 보건대 고려시대에 부안지방에도 역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역참과 그 기능의 일부가 비슷한 봉수대(烽燧台)가 부안지역에는 세 곳이나 있었다. 월고(月古), 점방(占方), 계화(界火)의 봉수대가 그것이다. 이는 군사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고려 후기인 13세기 초부터 서해 연안에 자주 출몰한 왜구(倭寇)들이 보안현과 부령현을 자주 침범하였으며, 1379년 우왕(禑王) 5년에는 왜구들의 선박 50여척이 검모진(黔毛鎭: 지금의 곰소 옆)의 수군영(水軍營)을 점령하고 부령현의 읍성까지(지금의 행안면 역리) 점령하는 등 노략질이 자심하였던 지역이었으므로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아진다.
부흥역(扶興驛)의 역참은 조선조 때에는 지금의 행안면 역리(驛里)에 있었다. 조선조 초에 이르러 부령현과 보안현이 합병되면서 그 읍성이 지금의 부안읍내로 옮겨지게 되자 고려시대 이래로 부안읍내 동문안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흥역은 당시 부령현의 읍성이 있었던 행안의 역리로 옮겨진 것 같다. 읍성과 역참의 자리가 맞바꾸어진 것이다. 지명에는 역사가 응집되어 있다고 하였다 지금도 부안읍내 동문안 일대를 구역말 또는 구역리라 부르고 있음을 잘 따져보면. 옛날 역참이 있었던 마을이란 뜻의 이름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옛날 고을의 역(驛)은 대체로 읍성을 벗어나 성 밖에다가 설치하는 것이 통례였다.
조선시대 부안의 부흥역(扶興驛)은 전라우도(全羅右道)에 있었던 삼례도(參禮道)에 속한 24개의 역참 중 하나였다. 그 조직은 역장(驛長) 1인, 역리(驛吏․驛丁) 7인, 노(奴)가 72인, 비(婢)가 30인이었으며, 역마(驛馬)가 10필이고 역에 딸린 역전답(驛田沓)은 34석 11두락지(石․斗落地)였다. 그 외에 충신, 효자 열부(烈婦)가 난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주는 복호결(復戶結)이 40결이었다고 하였다. 실지로 이와 같은 정원수와 역의 전답이 확보되었었는지는 미지수다. 노와 비가 합하여 100여 명이 넘는데 이중에 비가 30인이라 한 것은 여자 종을 말하는 것으로 반빗아치(飯婢). 무자이(汲水). 통지기. 기생(妓生) 등을 모두 포함한 숫자다. 옛날 기생은 정부의 기관인 관아에 예속된 노비의 신분이었다 역도 국가기관이었으므로 기생이 배치되어 있었다.
역참을 관할한 정부기관은 고려시대에는 병조(兵曹)의 공역서(供驛署)에서 담당 하였다.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병조의 승여사(乘輿司)가 공역서의 기능을 대신하여 맡아보면서 역승제도(驛乘制度)와 찰방제(察訪制)가 병행 실시되었다.
역참의 중심 임무는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지방으로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역참의 주된 기능이고 그 외에 사신(使臣)의 왕래에 따른 영접이나 환송에 관한 일, 관물(官物)이나 진상공물(進上貢物) 수송의 일을 하였으며, 내외인의 왕래를 규찰함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죄인을 체포 압송도 하고 유사시에는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기까지 하였으니 국가의 동맥이 막힘없이 잘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지로는 역참의 관리들은 고되고 중요한 업무에 상관없이 빠듯한 보수와 천한 대우를 받았다.
역참에서 이들 공문서를 전송하는 방법에는 공문서(公文書)를 가죽부대에 넣어서 전송하는 현령전송(懸鈴傳送)과 가죽이나 뿔(角)로 만든 문첩(文貼)에 넣어서 전달하는 피각전송(皮角傳送)이 있었다. 현령전송은 사안의 완급에 따라서 매우 시급하여 3급에 해당하는 일이면 말방울 세 개를 달아 방울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달리게 하고 2급의 조금 달 급한 사안이면 두 개의 방울을 달았으며, 급하지 않은 1급의 사인이면 방울 한 개를 달아 전송하였다.
이와 같은 현령전송이나 피각전송은 파발마(擺撥馬)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파발마에 의한 전송은 외교관계가 많았던 서울과 의주(義州) 사이의 역참에서 주로 행하여졌으며, 그 외의 역참에서는 파발꾼이라 하여 역리(驛吏)에 의하여 전송하였다. 각 역참에는 걸음을 빨리 거를 수 있는 주졸꾼(走卒軍)이 배치되어 있어서 이를 급주보발꾼(急走步撥軍)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보발꾼이 방울소리를 딸랑딸랑 내면서 급하게 오면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두 길을 비껴주었다고 한다.
파발에는 말을 타고 전송하는 기발(騎撥)과 사람의 걸음으로 전송하는 보발(步撥) 두 가지 방식의 파발이 있었다. 파발은 25리 마다에 참을 두어 릴레이식으로 전송하였고, 기발마는 말 다섯 필씩 방울을 울리면서 달렸으며, 보발은 30리마다 참을 두어 전송하였는데 각 참에는 발장(撥長) 1명과 군정(軍丁) 약간 명을 상주시켜 놓았다. 지금도 고을마다 한두 군데씩 남아 있는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있는 곳은 그곳에 역참이 있었거나 역참과 관계가 있었던 곳이다.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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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0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