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에서 물고기를 잡다

 

▲대항리 합구마을, 포구에 어살목을 세워놓았다.

신전에서 물고기를 잡다(神箭打魚 )

孰編山木包江渚
누가 산나무 엮어 강물 둘렀는가

潮退群鱗罄一漁
조수 빠지자 많은 물고기 한꺼번에 잡히네

却笑陶朱勞水畜
비웃노라 도주공의 물고기 기르는 수고를

坐敎滄海自驅魚
앉아 있으면 창해가 자연히 고기 몰아오네

위의 칠언절구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사암 박순이 동상 허진동의 ‘우반십경’에 부쳐 지은 시로, 그 당시 곰소만의 어살 풍경이 선하게 그려지는 작품이다.

<역주>
– 신전(神箭):목이 좋은 어살을 일컫는 말
– 도주공(陶朱公):춘추시대 월왕 구천의 신하 범려. 그는 벼슬을 그만 두고 도(陶) 땅에 가서 주공이라 변성명하고 큰 부자가 되었으므로 도주공이라 불렀다. 그 뒤에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도주공에 비긴다.

▲사진설명(위부터 차례대로)/김홍도(1745-1806)필 고기잡이/변산면 대항리 어살/대항리 어살 주인 김효곤 씨가 어살에 걸려든 물고기를 건지고 있다./어살에 걸려든 물고기/변산면 격포리 궁항 독살터

어살(漁箭)

어살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에 울타리처럼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엮어 함정을 만들어 놓고 밀물을 따라 밀려온 고기떼가 썰물 때 이 함정 안에 갇히게 하는 어로방법이다. 요즘처럼 어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우리의 어업이 주로 연근해 어장에서 이루어지던 시절, 어찌 보면 원시적이랄 수 있는 이 어살이야말로 조수간만을 따라 회유해 들어오는 고기떼를 일시에 다량으로 포획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어로방법 중의 하나였다. 그러기에 “좋은 목에 있는 어살은 못자리하고도 안 바꾼다.”는 옛말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어업을 어전(漁箭)어업이라 하는데, 조기어장으로 유명한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곰소만은 예전에 전국 어전어업의 중심지였었다. 곰소만은 수심이 얕은데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어살 목으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어살 중에서도 이곳 곰소만의 어살 규모가 가장 컸었고, 해세(海稅)의 납입도 가장 많았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누런 황금조기나 삼치, 청어 등이 어살 가득 걸려들었다”는 이곳 촌로들의 증언으로도 곰소만의 어전어업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어살이 부가가치가 높고 국가적으로도 귀중한 세원이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직접 경영하는 어살이 많았었다. 왕실이나 권문세가들이 요즈음 재벌들이 땅 투기하듯 목 좋은 어살을 장악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살을 놓고 서로 이익을 다투다보니 피해를 입는 쪽은 자연 힘없는 어민들이었다. 이들이 부과한 과중한 세금, 그것도 어세로 어물을 부과해야 마땅함에도 호피나 포목 따위를 부과해 이를 견디다 못한 어민들의 야반도주가 속출하였을 정도로 어살운용의 폐해가 심각했었다. 그 예로 효종 때 부안에는 어살이 20군데가 있었는데, 그 중 11군데는 궁가에 점유 당하고, 8군데는 성균관에서 붙였으며, 단지 1군데만 부안현에서 붙였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숙경공주 집에 빼앗기자, 전라 감사 정지화는 빼앗겼던 옛 어살 1군데를 본 현에 다시 붙여 달라고 상소를 올렸음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성행했던 곰소만의 어살도 갯벌의 황폐화로 인한 연안 어족자원의 고갈과 나일론그물의 보편화로 차츰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대항리 갯벌이나 계화도 갯벌에서나 볼 수 있다. 나일론그물로 옛날의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대신했지만 기능은 예와 다름이 없는 어살이다. 또 예전에는 어살에 조기, 삼치, 청어 등이 많이 걸려들었지만, 요즈음은 전어, 숭어 등이 걸려든다는 점이 다르다. 또 변산의 궁항이나 죽막동, 마포 등지의 해변 바위지역에는 어살의 원조인 독살(石箭)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독살은 대나무나 싸리나무 대신 돌로 담을 쌓는다는 점이 다를 뿐, 어살의 원리와 같다.


/ 허철희  
(글쓴날 : 2003년 03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