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암 사적기

 

•소재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산 961-1

월명암은 노령산맥의 서쪽 끝, 변산반도 봉래산 법왕봉(法王峯) 중턱에 자리잡은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암자로서 신라 신문왕 11년(691년)에 부설거사가 창건하였다. 그 후 많은 세월의 풍마양세로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 중국의 방거사(龐居士)와 더불어 세계 불교 3대 거사로서 흠모와 존숭을 받아 왔다. 그는 본래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불국사의 원정(圓淨)스님에게서 득도를 하고 영조, 영희 두 도반과 더불어 각처를 돌며 도를 닦다가 이 곳 변산에 와서 십 년동안 수도를 하고 오대산을 찿아 가던 도중 만경현 백련지(白蓮池) 옆(현재의 김제 성덕면 고현리 부설) 청신도(淸信徒)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하룻 밤의 여장을 풀었는데 구씨의 무남독녀인 묘화(妙花)는 십팔 세의 벙어리었으나 부설을 보고는 갑자기 말문이 열려 스님과의 삼생연분(三生緣分)이 있다하여 죽기를 한하고 부부의 인연을 맺고 등운, 월명 두 남매를 낳은 뒤 다시 이 곳 변산을 찿아와 각기 한 칸의 토굴을 짓고 도를 닦아 모두 성도하여 부설거사는 열반 뒤에 많은 사리가 나와 여기에 사리부도를 안치하고 묘화부인은 백 세의 장수를 누리며 갖은 이적의 도력을 발휘하였다. 또 등운조사는 충청도 계룡산으로 가서 그곳에서 일대선풍(一大禪風)을 드날렸고, 월명각시는 이 자리에서 육신등공(肉身登空)하였다. 이리하여 이 곳 월명암은 부설거사 일가족이 도를 성취한 자리일 뿐아니라 그 후에도 많은 스님이 도를 깨우치었다.

신라때 의상대사가 주석(住錫)하였으며 조선 선조때 진묵대사가 중창하고, 철종때에는 성암조사(性菴祖師)가 3창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행암(行菴)스님, 학명(鶴鳴)스님, 용성(龍城)스님, 서옹(西翁)스님, 고암(古菴)스님, 해안(海眼)스님, 향봉(香峰)스님, 원경(圓鏡)스님, 능파(능파)스님, 월인(月印)스님, 요허스님, 소공(簫 )스님 등 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출현하여 주석제접(住錫提接)한 곳이다. 그러나 6.25전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월인스님이 본당과 요사채 1동을 수축하였고, 이마저 13년의 노후로 도괴 직전에 놓인 것을 종흥(宗興)스님이 본당은 물론 요사채도 다시 확장 수축하였고, 이어 운해당(雲海堂), 묘적암(妙寂菴) 등을 신축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곳 월명암은 풍광이 좋기로도 유명하니 쌍선봉의 둥두렸한 월출과 망망한 칠산바다의 일몰,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변산의 아침 운해는 가히 선경을 이룬다.

또 부설거사가 예언하기를 이곳 월명암에서 四聖 八賢이 난다고 하였는데, 四聖은 부설, 묘화, 등운, 월명 등 부설거사의 일가족 4권속으로 이미 나타났고, 八賢 중 誠菴, 行菴, 鶴鳴스님의 三賢이 나셨고, 앞으로 五賢과 十二法師가 날 것이라고 한다.

월명암 연혁

•창건주    부설거사    신라 신문왕 11년     691년
•제2창주   진묵대사    조선 선조 26년      1592년
•제3창주   성암화상    조선 철종 14년      1863년
•제4창주   학명선사    1915년
•제5창주   월인화상    1955년
•제6창주   종흥수좌    1983년


/허철희  
(글쓴날 : 2003년 0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