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5일 지운 선생 22주기를 맞아 부안의 지인들과 함께 지운 선생을 찾았다.
백산면 대수리의 지운(遲耘) 김철수(1893~1986) 선생이 1968년에 손수 지으신 토담집 이름은 이안실(易安室)이었다.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처럼 귀거래(歸去來)를 한 것이다. 도연명은 팽택현의 현령이었다. 그가 받았던 녹봉은 쌀 닷 말이었나 보다. “나는 5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개탄하였다 한다.
“돌아가자!(歸去來兮 귀거래혜)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라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와 땅을 파고 밭을 일구었다. 귀거래사의 진수는 다음 대목에 있다 할 것이다.
술병과 잔을 끌어당겨 스스로 따르고(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정원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구나.(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남쪽 창에 기대어 오만함에 의지하고(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무릎을 겨우 거둘만한 곳을 찾아 편안함으로 바꾼다.(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지운 선생의 ‘이안실’은 분명 이 대목에서 따왔으리.
– 1921년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결성
–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부장
– 1929년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위원장
– 1930년 치안유지법으로 검거 10년형 언도
– 1938년 출감
– 1940년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
– 1945년 광복과 함께 출감
그는 해방정국에서 민족진영의 통합을 위해 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좌절을 넘어 환멸이었다. 이를 어찌 도연명 따위에 견주리오. 그는 귀거래사를 부르며 낙향하여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흙집을 지어 동으로 창을 내고 유유자적, 태연자약하며 ‘오(傲)’에 의지하여 ‘안(安)’으로 바꾸어냈다.
그가 강릉에서 옮겨다 심은 오죽(烏竹)이 토굴처럼 낮은 지붕보다 더 높게 자라났다. 남녘에서 가져다 심은 차나무는 아직도 그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끝이 안보이는 탐욕으로 공멸을 재촉하는 세상 한 켠에서 지운 선생의 이안실은 고대광실보다 더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허정균
(글쓴날 : 2008·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