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2/영광굴비, 조기어장의 중심지인 위도는 한 때 영광군에 속했었다.
사진3/곰소만, 해마다 살구꽃이 필 무렵부터 조기떼가 몰려 들었다.
사진4/곰소염전, 칠산바다 갯벌 한 자락을 막아서는 소금을 구웠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은
젓갈과 염장가공기술을 발달시켰다.
사진5/칠산어장의 중심 어장인 위도 파장금항, 조기떼가 몰려오던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조기철엔 ‘파시’가 들어섰다.
사진6/위도띠뱃굿. 한 해 동안의 묵은 재액을 싣고, 풍어의 꿈을 싣고 떠나가고 있다.
농어목 민어과에 속하는 조기류에는 황조기(참조기)를 비롯하여 그 사촌격인 백조기, 부세, 반어, 황세기, 강다리 등이 있다. 몸의 길이는 큰 것이 25∼30cm 정도, 그러나 이렇게 큰 조기를 요즈음에 보기란 쉽지 않다.
조기는 역시 참조기가 맛이 좋다. 고서에는 참조기를 석수어(石首魚)라고 했는데 이는 머리에 돌처럼 단단한 뼈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 밖에 노랑조기, 황금조기 등으로 불리는 참조기는 몸 빛깔이 황금빛을 띤 회색이다. 육질이 향긋하고 쫄깃하고 맛이 좋아 제사상에 올린다. 그 유명한 ‘영광굴비’는 바로 이 조기를 말한다.
그 다음으로는 부세로 생김새도 참조기와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어렵다. 이 점이 바로 불량상혼을 부추겨 속아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좀 자세히 조기를 관찰해 보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부세는 황금빛이 돌지 않고 등이 검다. 그리고 참조기 이마에는 다이아몬드무늬가 있는데 비해 부세의 이마는 밋밋하다.
반어는 몸매가 날씬하고 머리도 옆으로 납작하며, 비늘이 뻣뻣하다. 몸은 전체적으로 흰빛이며 비늘 끝에 검은 점이 박혀있다.
백조기는 색깔 자체가 하얗고 머리와 몸이 약간 납작하며 체형이 긴 타원형으로 쉽게 구별을 할 수 있다.
황새기와 강다리는 크기가 작다. 강다리도 머리가 몸체보다 더 크지만 황새기는 더 크다. 주로 젓갈로 많이 쓰인다.
여기서는 참조기인 황금조기를 얘기하고자 한다. 황금조기는 제주 남쪽의 따뜻한 바다에서 겨울을 보낸다. 그리고 봄이 되면 산란을 위해 이동하는데, 3월에서 7월까지 칠산바다를 거쳐 연평도로 떼지어 올라갔다가, 8월에서 12월까지는 다시 제주 남쪽의 따뜻한 바다로 내려간다. 그 길목에 위치한 칠산바다는 최적의 산란장소로 이 시기에는 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많은 조기떼가 해마다 어김없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위도 노인들 얘기로는 발아래까지 몰려드는 조기떼를 간짓대(장대)로 후려쳐서 잡았다고 한다.
예전엔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변산에서도 황금조기는 흔했었다. 60년대 초에 변산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자면… 그 당시 나는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4킬로 떨어진 마포에서 변산면 소재지인 지서리까지 4킬로를 걸어서 국민학교에 다녔었다. 2학년 보리누름쯤인 어느 날 하교 길, 고사포 노루목을 돌아들자 요란하고도 흥겨운 굿 소리가 바다 쪽에서 들려왔다. ‘백사장에서 씨름판이라도 벌어졌나!’ 동무들은 반사적으로 허리에 책보를 질끈 동여매고 바다로 뛰어갔다.
고사포해수욕장 솔밭을 지나서 백사장에 당도한 우리는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다. ‘만선(滿船)’이었다. 바다에는 황금조기를 가득 실은 배들이 깃발을 나부끼며 기우뚱거리고 있었고, 모래사장에는 조기들을 군데군데 산처럼 쌓아 놓은 채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한 만선의 깃발은 4,5일 더 올려졌는데, 졸지에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고사포, 성천, 산발리 해안 일대는 작업하는 사람, 구경 나온 사람들로 꽉 차고, 평소 보기 힘든 제무시(GMC)라는 큰 트럭들은 아침저녁으로 조기들을 어디론가 실어 나르느라 바빴다. 덕분에 우리 또래들은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양손에 조기 한 마리씩 들고 한 달음에 집으로, 또 한 달음에는 해변으로 뛰어다니며 조기를 나르다보니 제법 큰 항아리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평생에 그 맛 좋은 황금조기를 항아리 가득 염장해 놓고 아침저녁으로 먹어볼 날이 또 있을까?
그 시절, 조기떼가 몰려들고, 조기울음소리가 칠산바다를 덮을 때면 각지의 고깃배들이 칠산어장의 중심지인 위도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몰려든 7∼800척의 고깃배들은 파장금항에서 건너편 식도항까지 빽빽이 들어서, 밤이면 이 일대가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때 이들이 건져올리는 조기는 배 한 척당 50∼60동, 1동이 1,000마리니까, 7∼800척의 고기배가 건져올린 조기는 4천만 마리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건져올려진 조기는 염장가공되어 ‘영광굴비’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팔려 나갔다. 위도는 원래 부안군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전남 영광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다시 부안군에 편입되었다. ‘영광굴비’라는 이름은 위도가 영광군에 속했을 때 얻은 이름이다.
이 시기에 위도에는 파시(波市)가 들어섰다. 위도의 파시는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 3대 파시 중의 하나인데 1970년대 중반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파시가 들어서면 기름, 장작, 발동기, 각종 어구, 식량, 부식물, 각종 잡화를 파는 상인들이 모여들고 술집, 다방, 세탁소, 정육점, 이발관, 미용실 등이 들어서 파장금항은 중도시를 이루었다. 그 당시 그 좁은 파장금항에 술집 색시만도 4∼500명이 북적거렸다니 위도의 파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많던 황금조기는 도데체 어디로 다 갔을까? 해양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남획’으로 인한 수산자원의 고갈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제 어부들은 바다에 그물을 드리우고 기다리지 않는다. 빠르고 큰 어선, 거기에 어군탐지기까지 동원하여 고기떼를 쫒아다니며 저인망으로 바다 밑바닥까지 훑어버리니 남획에 원인은 있다고 볼 수 있다.
주강현 박사는 “현명치 못한 어부들은 그물코를 촘촘하게 짬으로써 자연이 주는 ‘이자’로 살아갈 생각을 포기하고 ‘원금’을 뜯어먹는 우매한 짓을 범하였다.”며 촘촘한 그물로 소년어(少年魚)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버리는, 그야말로 ‘어부의 도’가 바닷물에 수장된 오늘의 어로 현실을 개탄한 바 있다.
그렇다고 그 많던 조기떼가 그렇게 짧은 기간 내에 자취를 감춰버릴 수 있겠는가? 갯벌의 훼손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과거 갯벌에 대한 연구가 전무할 때, 갯벌은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왔다. 해양생태계의 황폐화를 몰고 온 잘못된 생각이다. 바다생물 60% 이상이 갯벌에서 산란하고, 어린시절을 보낸 다음 먼 바다로 나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해양생태계의 먹이사슬이 바로 갯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직강하된 강을 타고 쏟아져 내려오는 각종 오염물질로 갯벌은 죽어가고 있는데다가 더하여 무분별한 간척으로 우리나라 서해안 갯벌은 해가 다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고기들이 산란할 곳을 잃고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1996년도 해양수산부 자료에 의하면 지금까지 서남해안 30%의 갯벌은 이미 간척되었고, 앞으로 90%에 가까운 갯벌을 간척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자연배양장인 갯벌을 막대한 돈 들여 없애가며 아무리 그럴싸한 해양정책을 새로 수립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기는 고사하고 숭어, 망둥이라도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3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