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교통. 통신기관 부흥역(扶興驛)

 

▲상소산에서 본 행안면 역리ⓒ부안21

조선조시대(朝鮮朝時代)에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였던 역참(驛站․郵驛)과 함께 여행자를 위하여 전국의 요로(要路)에는 원(院)을 설치하였었는데 이 역과 원이 우리 부안지방에도 있었으며, 그 자취가 지명 등으로 굳어져 남아 있다 행안면의 역리(驛里)마을이나 부안읍내 구역말(舊驛里) 등이 그 예다. 동문안을 구역말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부안의 행정치소가 행안 역리에 있었던 고려 때에는 부령현의 역원이 지금의 동중리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4권 부안현(扶安縣)의 역원(驛院) 조에 의하면 부안의 역은 부흥역(扶興驛)이라 하였으며, 부안읍내 서쪽으로 2리에 있다 하였으니 <부흥역 재현이리(扶興驛 在縣二里) 지금의 행안면 역리(驛里)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역원은 치소로부터 조금 떨어진 읍성의 밖에 설치하였던 것 같다.

옛날의 역이란 국가에서 발송하는 명령이나 공문서의 전달, 변경(邊境)의 중요한 군사정보, 관리들의 지방출장에 따른 숙박, 관물(官物)의 수송, 사신(使臣)의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 등을 위하여 마련된 국가의 교통과 통신기관의 하나였으므로 매우 중요한 국가의 기관이었다.

이 역참(驛站)의 제도는 멀리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의 소지왕(炤知王) 9년(서기 487) 3월 조에 의하면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유사들에게 명하여 도로를 수리하게 하였다”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에 이미 역참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무왕(文武王) 8년(서기 668년) 10월 조에도 “왕이 욕돌역(褥突驛)에 행차하니 국원경의 사신(仕臣)인 대아찬 용장(龍長)이 사사로이 잔치를 베풀고 왕과 모든 시종들을 대접하여 음악을 연주 하였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이르러서는 지방 행정구역의 확립과 함께 지방의 호족(豪族)들의 세력을 통제하기 위하여 후삼국시대에 흐트러진 역로(驛路)의 시급한 복구와 개편이 요구 되었으며, 왕권의 확립과 중앙정부의 강화를 위하여 역참제도의 조직도 구체적으로 조직화되어 그 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특히 성종(成宗)때에 십도제(十道制), 십이목(十二牧)의 설치와 병행하여 주(州), 부(府), 군(郡), 현(縣)과 관(館), 역(驛), 강(江), 포(浦)의 명칭을 개편하는 한편 서기 983년(成宗:2년) 6월에는 역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공수전(公須田), 관전(館田) 등의 역전(驛田)을 나라에서 지급하여 역참의 조직과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참의 제도는 무신(武臣)의 난(亂)과 몽고의 침략으로 그 지배하에 있으면서 압록강 근처에 수참(水站)의 설치와 함께 몽고식 역참제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참(站)이라는 용어도 몽고식 용어에서 붙여진 말이며, 역을 역참 또는 역관이라 하여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이 이때부터라 한다.

그리고 전국의 도로를 그 쓰임의 중요도에 따라서 대․중․소로 3등분 하였으며, 525개의 역을 22개의 역도(驛道)에 배속시켜 각 역도에는 역승(驛丞 : 察訪)을 책임자로 두고 각 역 에는 역장(驛長)과 역정(驛丁), 역마(驛馬)를 배치하고 그 유지를 위하여 역전(驛田)을 지급하여 운영하는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역참의 제도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고려시대의 제도를 이어 받아 부분적으로 개편하면서 재조직을 하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1597년(宣祖 30)에 이르러 다시 중국의 명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파발제도(擺撥制度)를 시행하였다 파발제도는 공문을 빨리 보내기 위하여 역과 역의 일정한 사이에 참(站)을 두고 파발로 하여금 신속하게 고문 등을 나르게 하였던 제도다.

고려시대 이래로 각 역도(驛道)에는 10여개 내외의 역참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역도의 책임자를 고려시대에는 역승(驛丞)이라 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중종(中宗) 때부터는 찰방(察訪 : 종6품)이라 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의 척관법(尺貫法)에 따라서 주척(周尺)으로 6척을 1보(步)라 하고 360보를 1리(里)라 하였으며, 10리마다에 소후(小堠)를 세우고, 30리마다에는 대후(大堠)를 세우며 30리를 1식(息)이라 하여 약 30리, 즉 1식마다에 한 개의 역을 설치한 것이다. 후(堠)란 이정(里程)을 알리는 표목(標木)을 세우는 것을 말함인데 이 표목에 사람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고 그 복부에 다음 역참까지의 이정을 표시한 것이 후에 노변장승 또는 이정표장승(里程標長丞)으로 변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서울의 주변과 경기도 등의 중요한 연안(沿岸)에는 진(津)과 도(渡)를 설치하여 도승(渡丞 : 종 9품)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의 규찰과 사신 등의 지방순행을 돕게 하였다. 이 도승은 주로 경기도에 두었는데 처음에는 일곱 곳에 두었다가 후에 다섯 곳으로 줄였으며, 명칭도 영조(英祖) 때에 도진별장(渡津別將)이라 고쳐 불렀다.

조선조 후기에 전국에는 41개의 역도(驛道)를 두었으며, 490여 개의 역참이 여기에 분산 배속되었는데 전라도에는 좌도(左道)에 34개 역참, 우도(右道)에 25개 역참이 있어 모두 59개의 역참이 있었으니 부안의 부흥역(扶興驛)은 우도(右道) 25개 역참의 하나였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기사작성 2005·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