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오전 11시 40분. 줄포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원난산 가는 버스를 타고 출발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원난산 마을은 인접한 목상·목중·남월·목하 마을과 함께 줄포면의 난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각자 소유한 차량들이 주 교통편이지만 아주머니들이나 노인네분들은 시내버스에 의존하여 줄포 시내를 왕래합니다.
출발시각이 훨씬 넘어서고 있는데도 운전기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손님은노인네분들 몇몇입니다. 한 아주머니가 종이가방 짐을 들고 허겁지겁 차에 올라탑니다. “휴~, 차 떨낄 뻔 했네. 부안에서 약 지어가지고 11시 15분 차를 탔는디, 이 차를 탈 수 있을라나 걱정을 많이 혔네. 이 차 놓치면 1시차를 탈라고 혔는디, 마침 안가고 있네.” 아주머니는 차에 올라타 자리에 앉으면서 손님 모두를 향해 혼잣말로 말합니다. 모두가 안면이 있는 듯 말입니다.
아주머니의 혼잣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고 기사가 왜 안오느냐고 누군가 궁시렁댑니다. “기사양반 저기 식당에 밥 먹으러 들어갔어. 점심 먹고 출발한다고.” 다른 이는 또 동문서답합니다. “아까 넷이 택시타고 간다며 저리로 갔어.” “넷이 타면 돈이 더 안들지. 겨울에는 추워서 기다리느니 택시타고 댕겨야 혀.” 원난산까지 시내버스 요금은 천원이고 택시요금은 4천원입니다. 이내 운전기사가 왔고, 11시 47분에 차가 출발하였습니다. 원난산은 줄포 시내에서 4km정도 되며, 버스로 10분이 소요되었습니다.
열행비만 삭은 채 남아있어
내가 원난산 마을을 찾은 것은 역사적 유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줄포면은 원래 건선(乾先)면이었습니다. 1914년 군, 면, 리 통폐합 때 부안군의 입상면 일부와 고부군의 서부면 일부, 그리고 고창군의 북일면 일부가 편입되어 대동·장동·줄포·우포·신리·난산·파산 등 7리로 구성하여 1931년 7월에 줄포면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줄포는 건선면 시절인 1875년에 줄포항이 구축되고 일제시대 이후에는 객주 및 상권, 경찰서, 백화점, 식산은행, 농산물검사소, 부두노조, 유흥업소, 줄포 5일장, 수산고등학교 등이 있으면서 번창하였습니다. 아직도 부안 사람들은 한때는 ‘잘 나갔던’ 줄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선면 시절의 면 소재지가 난산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한, 기록으로도 더 이상의 자료는 없습니다. 그래서 원난산을 찾아 어떤 흔적이나마 추적해보고자 했으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전날밤부터 자욱했던 안개가 여전히 뿌옇게 남아 마을 앞 고부천 들판 너머 2km의 지근거리에 불과한 고부면 백운리 마을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역사는 이미 잊혀졌고, 어느 마을이나 마찬가지로 원난산 주민들도 자신의 마을 역사를 알지 못합니다. 호박에 탱자가시 박아놓으며 ‘구잡떨던’ 어린 시절과 같은, 자신들이 살아온 생애에 경험된 부분들을 빼고서는.
원난산 마을은 서른 가호 정도 됩니다. 회관에 모여 있던 주민들은 가호수 놓고 논란이더니만 손가락으로 한집한집 세어보면서 서른 가호라 합니다. 왕년(?)에는 120-150가호를 이뤘다 합니다. 지금은 산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만, 33.5미터 높이의 산 아래 제법 큰 마을을 이뤘나봅니다.
난산(卵山) 마을의 어원 유래는 마을 모양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包卵)의 형국이라 해서 지어졌답니다. 진주 강씨가 터를 잡았답니다. 현재 난산리에는 강씨가 없다시피 합니다. 구전에 따르면, 마을 뒤에 달걀 모양의 산이 있었다 하여 난산이라 하였으며, 마을에는 금계포란의 명당터가 있어 착한 김해 김씨 한 사람이 꿈의 계시를 받아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그 뒤 천석부자가 되었다 합니다. 마을의 정자나무가 금계포란의 명당터를 지키는 수호신이라 하여 지금도 정월 보름날 당산제를 지냅니다.
지금은 곡물건조기가 마을 앞에 떡 하니 세워져 있어 마을의 풍경을 가리고 있습니다만, 그 옆의 열효(烈孝) 비각은 조선 전통의 오래된 문화풍속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너저분하게 낡고 삭은 채. 열효인즉슨 열행비(烈行碑)와 효행비(孝行碑)가 한 비각에 함께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효행비는 ‘제능참봉김공동엽효행비’(齊陵參奉金公東燁孝行碑)라 적혀 있고, 열행비는 ‘증숙부인밀양박씨절행비’(贈淑夫人密陽朴氏節行碑)라 적혀 있습니다.
밀양박씨 효행비의 내력은 이렇습니다. 밀양박씨는 박언심의 후손으로 고창의 등선리 출생이며 난산리의 김상철에게 출가하였습니다. 부인은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으나 집안이 몹시 가난한데다가 남편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백방의 노력 끝에 겨우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병을 얻자 부인은 북향(北向)하여 하늘에 빌기를 자기로써 남편을 대신하여 달라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부인은 슬픔에 젖어 함께 죽으려 작정하자 아이들의 만류로 마음을 고쳐먹고 밤낮으로 베를 짜 아이들을 길러냈다고 합니다. 1903년 향년 77세로 부인이 세상을 뜨자 유림이 절행비를 세웠습니다.
군수 난 사람이 보건소 지어주기로 혔담서?
마을 회관에 모여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동네분들. 농삿일 없는 겨울이라 한가지게 보이지만 각자 나름대로 할일들이 많습니다. 병원에 나다니고 시장도 보고 뒤늦은 김장도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손녀는 할머니를 따라와 회관 방안에서 놀고 있지만 여간 무료해하는 게 아닌거 같습니다. 다른 할머니도 갓난아이 손녀를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옵니다. “집에서 마늘 까고 있는데 야가 밖에 나가자고 어찌나 보채야지…” 또다른 할머니는 당신 생일이라며 잡채랑 과일이랑 나눠먹자고 한 보따리 싸가지고 왔습니다. 이 동네분들은 화투나 윷놀이도 할 줄 모르며 그저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보낸답니다. 그러다 회관 방안에 드러누워 낮잠에 빠져듭니다.
과거에 면 소재지였던 원난산 마을, 지금은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이미지로 더디더디 흘러가며 덜한 것도 없고 더한 것도 없어보입니다. 66년을 태붙이로 이 동네에서만 살아왔다는 중노인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중 뜬금없는 화두를 던집니다. “10년 후에 살아있을까.” 할머니들 한마디씩 합니다. “죽는 게 무서워?” “그때는 이 동네가 텅 빌 것여.” 다른 이가 화제를 바꿉니다. “이번에 군수 난 사람이 난산리에 보건소를 지어주기로 했담서?” “그러게, 난 이미 저 세상으로 갔을 때에나 짓겄지.” “먼소리여 내년이면 질턴디.”
저물어 가는 한평생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그이들의 수다는 참으로 다정다감해보입니다.
/글·사진 고길섶 문화비평가
*이 글은 부안독립신문에 게재된 글이며 수정증량했습니다.
2008·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