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고을의 주산(主山)이요 진산(鎭山)인 성황산은 산 전체가 공원이니 이름은 서림공원(西林公園.)이다. 그 빼어난 경관과 울창한 숲 사이로 뻗어난 등산로를 따라 거니노라면 마치 어머니의 가슴에 안긴 것 같은 포근함이 있어 우리들의 요람이요, 안식처이기에 충분하다.
산 너머 저쪽에서 밤새워 어둠을 살라 먹고 해맑은 고운 얼굴로 다시 솟는 해를 맞아 하루의 생활을 활기차게 시작하려는 착하고 부지런한 부안 시민들이 새벽 네 시면 벌써 공원 숲길의 적막을 깨며 등산로를 메우면서 산에 오르기 시작한다. 남녀노소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답게 인사 나누며 걷고 뛰고 야호! 호연지기 함성도 지르면 생동의 기가 넘치는 삶의 발걸음이 더욱 힘차니 실로 부안의 하루는 서림공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산이래야 높이 115m에 몸집의 크기는 고작 33만 4천여 ㎡에 지나지 않지만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명산이라(山不在高 有仙則名)고 한 누실명(陋室銘)의 머리말처럼 여기 성(聖)과 영(靈)의 기(氣)가 깃들여 있고 선인(仙人) 같이 착한 사람들의 숨결과 체온이 항시 가득한데 어찌 크고 높지 않다 하여 명산(名山)이라 하지 않으랴. 더욱이 여기에는 우리 고을을 진호(鎭護)하는 수호신을 모셨던 성황신사(城隍神祠)와 국토의 신을 제사한 사직단(社稷壇)이 있었으며, 여귀(厲鬼)를 달래고 우순풍조, 시화연풍을 축원하는 기우단(祈雨壇)과 국난에 목숨을 바친 영영들의 영혼이 깃든 충렬탑이 있어 국권수호의 제례문화(祭禮文化)가 행하여 온 성스러운 곳이니 더 일러 무엇 하겠는가.
성황산의 정상을 중심으로는 이와 같은 성스러운 국가적인 제단의 문화가 행하여져 왔고 산의 남쪽 기슭의 서림정(西林亭), 이끼 낀 너럭바위, 가야금 거문고 타고 놀던 금대(琴台), 그 아래 혜천(惠泉)을 중심으로는 시인묵객들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의 풍류문화가 피어났었다. 벼슬아치들과 기생들의 놀이문화도 함께 하였음은 암석마다에 새겨 놓은 시귀(詩句)들과 그 옆에 16기에 이르는 역대 현감, 군수들의 휼민(恤民), 선정(善政), 청백(淸白)의 시혜청덕영세불망비(施惠淸德永世不忘碑)가 즐비한 것만으로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민초들은 선정비를 무색하게 굶주리고 헐벗기만 하며 살아 왔었다.
우리 조상들은 산은 성스러운 곳이며, 덕성(德性)을 배우는 곳이라고 여겼으며, 그 중에서도 산의 정상은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 왔다. 그런 까닭으로 산의 정상에는 놀이판이나 벌리는 정자를 짓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산에 오른다는 뜻의 등산(登山)이란 말이나 덮어 누른다는 뜻의 정복(征服)이란 말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산에 들어간다는 입산(入山)이란 말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그만큼 산을 신성시하였고, 자연 앞에 겸손하였다. 수백 년 동안 부안을 진호하는 지킴이 신이 깃들어 있다고 받들어 온 진산(鎭山)인 성황산의 정상에는 지금 어느 마음이 가난하고 겸허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하여 3층 8각형의 이름도 없는 정자 하나가 우뚝하게 세워졌다. 우리 누정문화의 원류도 모르는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 중의 하나다.
부안 사람들은 서림(西林)이란 말과 매우 친숙하다. 서림공원과 서림정(西林亭)은 말할 것도 없고, 서림회, 서림신문, 서림새마을금고, 서림자율방범대, 서림택시, 서림약국, 서림다방, 서림가든 등에 이르기까지 단체나 상호 등의 이름에 붙여진 서림이란 이름만도 20여 개가 넘는다. 이는 서림공원을 그만큼 좋아하고 사랑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제 서림(西林)이란 말은 부안을 지칭하는 대명사격의 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면 서림이란 말은 언제 어떤 연유로 생겨난 지명인가를 살펴보자. 서림이란 말은 말 그대로 서쪽의 나무숲이란 뜻의 말이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안현의 관아(官衙 : 지금의 군청 청사에 해당)를 기준으로 그 서쪽에 있는 숲이란 뜻의 말이다. 이에 대하여는 1913년(계축)에 부안읍에 사는 풍산(豊山) 신기종(辛基鍾)이란 분이 썼다고 하는 <서림정흥폐기(西林亭興廢記)>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서림정흥폐기>의 원문을 여기에 다 옮기기는 어렵고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150여년 전인 1848년(헌종․14․무신) 풍양조씨 삼암(三嵒) 조연명(趙然明)이란 현감이 서림에 많은 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이름을 서림정(西林亭)이라 하였다. 그 후 유지들 33인과 더불어 삼십삼수계(三十三修稧)를 조직하여 봄, 가을로 나무를 많이 심어 가꾸고 시회(詩會)도 열고 하였으며, 1867년(고종․4․정묘)에 우당(雨堂) 이필의(李弼儀, 만직(萬稙)이라고도 함) 현감이 이어서 나무를 심고 정자를 중수하였고, 1875년(고종․12)에는 동련(東蓮) 이헌영(李憲永) 현감이 <삼십삼수계>를 다시 일으켜 나무를 심고 정자를 중수하였다. 그 후 1893년(고종․30) 7월에 바람으로 정자가 무너져 빈터에 주춧돌만 남았는데 조연명(趙然明)의 종질되는 지천(芝泉) 조용하(趙庸夏)가 1896년에 부임하여 종숙인 삼암공(三嵒公)의 치적을 이어 중단된 <삼십삼수계>를 다시 일으키고 정자를 중수하였으나, 1910년에 정자는 헐어지고 빈 주춧돌만 남아 서글프기 그지없다.
대체로 이와 같은 내용이다. 이 <서림정흥폐기>에 의하여 우리는 오늘의 서림공원을 이룩한 분이 현감 조연명(趙然明)임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림공원의 연혁(沿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그후 일제(日帝) 때인 1927년에 당시 부령면장(扶寧面長) 신성석(辛聲錫)이 주동하여 서림정각(西林亭閣)과 망해루(望海樓)를 복원하였으나 일제 말기에 이곳에 그들의 조상신을 제사하는 신사(神社)를 짓기 위하여 훼철하여 버렸으며, 지금의 서림정은 1949년 이후 축소 복원된 것이다.
오늘의 성황산(城隍山)과 서림공원(西林公園)의 우거진 숲, 산새 지저귀는 오솔길, 걸어도 뛰어도 즐겁고 흐뭇하기만 한 우리들의 쉼터, 공원길을 아침저녁으로 거닐 때마다 나는 150여 년 전 현감 조연명(趙然明)공과 우당(雨堂) 이필의(李弼儀)공 등의 심고 가꾼 애림의 치적과 후손들을 위한 큰 덕행에 감사하곤 한다.
그러나 그 후 정자(亭子)를 중심으로 하여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즐비하게 서 있는 그럴듯한 빛나는(?) 업적을 새겨 세운 여러 개의 비석들을 보면서 1869년에 삼암공(三嵒公)과 우당공(雨堂公) 두 분의 임정(林亭)을 가꾼 치적을 기려 세운 「현감 삼암 조후연명․현감 우당 이후필의 임정유애비(縣監 三嵒 趙侯然明․縣監 雨堂 李侯弼儀 林亭遺愛碑)」는 초라하게 마모되면서 한쪽 구석으로 밀려 버려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띠이지도 않게 대접받고 있음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조상이 남겨준 빛나는 얼과 문화를 바르게 되살리지도 못하고 제대로 드러내어 대접하지도 못하는 일들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미선군수들이 진실로 문화를 아끼고 사랑함에서인지 아니면 표를 의식해서 인지는 몰라도 나무를 심고 꽃길을 조성하며 등산로에는 아스팔트를 바르기도 하는 등 서림공원에 많은 관심을 기우리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매창의 시비(詩碑)가 이미 세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시비를 불과 100여 미터를 사이하고 또 하나의 시비를 세우는 것도 쉽게 납득이 안되는 일인데 매창의 시가 아닌 것을 매창의 시랍시고 새겨 세워놓은 웃지못할 부끄러운 일까지도 벌려 놓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오늘의 서림공원을 있게 한 조연명. 이필의 두 현감의 망가저 가는 임정유애비(林亭遺愛碑)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으니 문화에 대한 인식이 이래가지고서야 우리고장 문화의 융성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싶다.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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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