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단(厲壇)
여단(厲壇)이라 함은 제사를 못 받아먹는 이름 없는 떠돌이 귀신인 여귀(厲鬼) 즉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이나 각종 사고 등으로 제명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비명횡사한 귀신들에게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주는 제사의 제단(祭壇)을 말한다.
이들 여귀들에게 제사 지내 주는 제도는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없었는데 1401년 조선조 태종(太宗) 1년에 권근(權近 : 1352~1409)의 주청으로 명(明)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처음으로 서울의 북교(北郊)에 제단을 쌓고 제사지낸 것이 그 시초며 이후 각 군현(郡縣)에 명하여 여제(厲祭)를 지내도록 하여 생긴 제도다. 이에 따라 우리 고을의 주산인 성황산에도 여단을 쌓고 여제를 지냈을 것이나 부안의 여단은 1401년보다는 훨씬 후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부안의 치소(治所)가 성황산 밑으로 옮겨온 것이 1416년이므로 그 이후에 설단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안의 여단은 성황산 정상의 북측에 설치하였을 것으로 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여단 재현북(厲壇 在縣北)」이라 하여 막연하게 치소의 북쪽에 있다고만 하였을 뿐이며, 군지 <부안지(扶安志)>에는 「재상소산북(在上蘇山北)」이라고 그 장소를 좀더 구체적으로 밝혔고, <부풍승람(扶風勝覽)>에는 「재부령면 상소산북록(在扶寧面 上蘇山北麓)」이라 하였다. 여기서 부령면이라는 지명은 1943년 부안읍이 읍(邑)으로 승격되기 전의 지명이다.
여단은 상설되어 있는 제단이 아니라 평상시에는 아무런 시설물이 없는 노천이며 제사를 지낼 때마다 새로 단을 쌓아 그 위에 성황사(城隍祠)에 모셨던 제신(祭神)의 위판(位版)을 모신다. 성황신을 여단에 모시는 것은 모든 떠돌이 귀신을 성황신으로 하여금 불러 모으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그리고 단의 좌우로 무축무사(無祝無祀)의 귀신, 즉 떠돌이 귀신들의 위패를 배열하고 제사를 지내는데 봄에는 청명일(淸明日), 가을에는 7월 15일, 겨울에는 10월 초하루 3회의 정일제로 행하며, 전염병이 돌거나 괴변이 생기거나 전쟁이 벌어지면 그때마다 날을 받아 제사를 지냈는데 지방에서는 고을의 수령이 제주(祭主)가 되어 행사하였다.
여단제(厲壇祭)의 순서는 제일 3일 전에 성황사에서 발고제(發告祭)를 지낸 다음 본제를 지냈으며, 여단에는 성황신을 중심으로 여귀들의 신좌(神座)를 단의 북쪽에서 남을 향하여 좌우상향(左右相向)으로 나열하였다. 그러면 어떤 것을 여귀라 하였는가 참고로 밝혀 본다.
단의 좌측에는 칼에 맞아 죽은 귀신, 물에 빠져 죽은 귀신, 불에 타서 죽은 귀신, 도둑 만나 죽은 귀신, 재물 때문에 핍박받아 죽은 귀신, 남에게 처첩을 강탈당하고 억울하게 죽은 귀신, 형을 받아 죽은 귀신, 원통하게 죽은 귀신, 천재지변으로 죽은 귀신,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의 위패를 세우고, 우측에는 맹수나 독사에게 물려 죽은 귀신, 추위에 얼어 죽은 귀신, 굶주려 죽은 귀신, 전쟁하다가 죽은 귀신, 목매어 죽은 귀신, 바위나 담에 깔려 죽은 귀신, 아이 낳다가 죽은 귀신, 벼락 맞아 죽은 귀신, 높은 곳에서 추락하여 죽은 귀신, 자식도 없이 죽은 귀신의 위패를 세웠다.
여단의 규모는 정사각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2장(丈) 1척(약 6.3m)이고 높이는 2척 5촌(약0.75m)이며 사면에 토담을 쌓아 제단을 보호하였는데 토담 한 변의 길이는 15m로 남쪽으로 문을 나게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525년 중종(中宗) 20년에 평안도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7천7백여 명이 죽는 참사가 있어 나라에서 의원을 파견하고 피병을 명하였으며, 종묘, 사직단, 여단제를 지냈다 하였으며, 1671년 현종(顯宗) 12년에는 전국적으로 기근이 심하고 돌림병이 크게 나돌아 나라에서 동교(東郊)와 서교(西郊)에 여단을 새로 쌓고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치제(致祭)하였고 했다.
기우단(祈雨壇)
기우단은 가뭄이 심하면 하늘에 비를 비는 제사의 단(祭壇)이다. 수리관개(水利灌漑)의 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우순풍조(雨順風調)와 자연의 재앙이 삶을 좌우하였다. 농사에 알맞게 비바람이 순조로우면 농사가 잘되고 고기가 많이 잡혀 삶이 풍요롭고 나라가 태평하였으며. 가믐이 극심하거나 폭풍우나 홍수가 나면 굶주림과 병마에 삶이 고달팠었다.
그러나 옛날부터 농업을 기본으로 살아온 우리나라에는 강우강설(降雨降雪)이 순조롭지 않아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 해가 없을 정도로 가뭄과 장마가 치우쳐 있어서 하늘과 용신(龍神)에게 비를 빌었다. 단군신화(檀君神話)에 환웅(桓雄)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 비바람을 담당하는 자연신을 데리고 하강하였다 함이 옛날부터 우순풍조가 고르지 못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성황사의 제신 중에도 풍운뇌우의 신이 끼어 있다.
삼국시대에도 각국이 시조의 사당(始祖廟)과 명산대천에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가뭄이 심하면 임금과 신하들이 근신하며, 천지, 산천, 종묘, 불우(절), 용신에게 제사하고 무당을 모아 비가 내리도록 비는 취무도우(聚巫禱雨)의 굿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조 3대 태종(太宗)은 재위 18년 동안에 한해만 빼고는 매년 2,3회씩 기우제를 지냈고, 1416년에는 한해에 9회의 기우제를 지냈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기우제는 4월부터 7월까지의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이중에는 간혹 정반대로 장마가 너무나 심하여 비가 그치도록 비는 기청제(祈晴祭)를 지내기도 했다.
1932년에 간행된 부안군지 <부풍승람(扶風勝覽)> 권1, 기우단(祈雨壇) 조에 의하면 부안군내에는 상소산(上蘇山), 계화도(界火島), 웅연(熊淵), 직소(直沼)의 네 곳에 기우단이 있다고 하였다. 이중에서 상소산, 즉 성황산의 기우단은 부안 고을의 관장이 직접 하늘에 제사하는 제단으로 지금 호국영령탑이 서 있는 정상의 자리였으며 그 옆에 성황신을 모신 사당과 여단이 있었으므로 성황산은 부안의 수호신들이 깃들어 있는 성역(聖域)이었다. 그리고 웅연(熊淵:곰소)이나 직소(直沼) 등의 연(淵:둠벙)이나 소(沼)에는 용신(龍神)이 깃들어 있는 곳이므로 비의 신, 농업의 신이라 믿는 용, 용왕에게 직접 비를 축원한 것이다. 직소폭포 밑의 깊은 소는 용소라 부르며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인 1939년 기묘년 가뭄 때에 기우제 지내는 것을 본 기억에 의하면 날이 어두워지면서 마을마다 풍물 굿을 치면서 동내 사람들이 장작이나 보릿대 등을 짊어지고 석동산(席洞山)의 정상으로 모여 비 내리기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풍물 굿을 치면서 하느님 밑구멍을 달군다며 밤이 깊도록 모닥불을 피우는 것을 보았다. 그때 성황산의 기우단은 물론이요 행안산, 승암산, 백산 등 온 고을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에서는 밤이 깊도록 큰 모닥불과 함께 기우제를 지냈고, 천시(遷市)라 하여 부안읍내 웃장, 아랫장이 모두 성황산의 정상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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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