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댕이에서 보름달 만나다

 

보름날은 매년 찾아오지만 집에서 먹는 찰밥과 나물반찬 빼놓으면 보름달은 없다.

어렸을 때 연을 날리다가 보름 전에는 액맥이를 해서 연줄을 끊어버린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멀리 사는 친구들이 자기집 나무에 연이 걸려 있다는 말을 듣고서도 아마 내 연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날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원에 살 때는 방패연을 많이 띄웠고 정읍에 살 때는 가오리연을 날렸다. 가오리연을 만들 때는 대나무를 적당히 다루고 연줄과 꼬리로 징평(평형)을 맞추어서 만든다. 연줄 싸움을 위해서는 연줄에다 풀도 먹이고 할머니가 쪼아준 사금파리를 연줄에 먹이곤 했다. 연줄을 감는 좋은 연자새 만드는 것이 지금 아이들의 컴퓨터 게임보다 더한 정보였다. 

보름 행사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오후에야 나서니 동문안 당산제가 끝났다는 얘기를 듣는 것을 시작으로 여룬개를 찾아갔더니 뒷풀이가 한창이고 수락동도 이미 끝나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원도청에 가보니 질펀한 뒷풀이가 이어지고 풍물을 치는 박형진 형과 유기농을 하는 이백연 형을 반갑게 만난다. 사진작가 허철희 선생도 여기서 뵈올 수 있었다. 밤에 까치댕이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돌개(석포) 에서 여룬개(운호) 지나서 까치댕이를 만난다. 까치댕이는 지금은 작당(鵲堂)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마을은 까치 모양이고 몇 년 전만 해도 당산나무에 까치들이 많았다고 한다. 까치댕이는 20호 정도가 아름다운 바다를 껴안고 있는 작은 포구 마을이다. 손으로 쥘듯한 작은 마을과 불빛에 묶여진 아름다운 배들이 가지런히 매어 있다. 대개의 동구(洞口)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몬댕이에 할머니 당산이 있어서 풍요를 제사하고 아뢸 수 있도록 했는데 까치댕이에는 바다 들머리에 할머니 당산이 있어 바다 사람의 생명지킴이와 풍어를 구하는 일을 맡고 있다.  

전국토를 요세화 할 때 까치댕이의 까치 주둥이 부분에 군인들이 초소를 만들자, 이 일로 까치댕이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이곳 저곳에 청원을 내서야 초소가 옮겼다는 얘기도 듣는다.

까치댕이를 찾을 때는 이미 용줄을 꼬아 놓았고 제사도 끝나 줄다리기만 남아 있었다. 참나무로 모닥불을 큼지막하게 지피고 참나무 숯불로 돼지를 구어 먹는다. 배고픈 때라 정신 없이 고기를 먹었다. ‘천둥소리 풍물패’의 소원을 비는 비나리와 가락으로 판이 무르익고 10시가 가까와서야 세 번 줄다리기가 끝났다. 다리기가 끝나면 술 마시고 질펀한 굿판을 펼치니 첫 번째 판은 여자가 두 번째는 남자가 이겼다. 마지막 줄다리기는 뜸을 들일대로 드렸다. 다리기가 끝나면 사람들이 흩어지니 늦으막이 해야한다는 공감대가 흐르면서 굿판이 벌어졌다. 80이 넘어 허리가 굽은 할머니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도굿대 춤을 연신 춘다. 세 번째 판은 여자들이 이기면서 보름 행사는 어둠으로 사라졌다.

부안에서 밤에 벌어지는 보름행사는 까치댕이 만 남았다. 밤에는 연속극 보느라 사람들이 나오지 않으니 낮에 할 수밖에 없단다. 그동안 10년 동안 동네 사람 몇이서 고집스럽게 옛것을 고수했더니 오늘처럼 외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와서 감격스럽다고 얘기한다. 

날씨가 흐려서 보름달은 볼 수 없었지만 까치댕이에서 10년을 고집스럽게 외로운 보름행사를 준비한 동네 사람들, 나이 40으로 이 마을에서 가장 젊다는 이형, 노구를 이끌고 신명나게 춤을 추던 할머니가 까치댕이 보름달이다. 어렸을 적, 너무 떨려 흥분했던 가슴에 까치댕이 보름달을 담는다.


글쓴이 :   정재철  
작성일 : 2003년 0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