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성황산에는 옛날부터 부안 고을을 수호하는 성황신(城隍神)을 모셨던 사당이 설치되어 있어서 산 이름을 성황산이라 부른 것 같다고 말하였거니와 성황산에는 성황사(城隍祠) 외에도 몇 가지 자연신인 산천신(山川神)이나 이름 없고 주인 없는 떠돌이 귀신들을 제사 지내주는 여단(厲壇)과 가뭄이 심할 때에는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단(祈雨壇)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행사가 이루어졌었다. 그 중에서도 사직단(社稷壇)에서 행해졌던 사직제(社稷祭)는 종묘제(宗廟祭), 문묘제(文廟祭)와 함께 국가에서 행하는 삼대 대제(大祭)의 하나였다.
사직단(社稷壇)은 사신(社神)인 토지의 신과 직신(稷神)인 오곡의 신을 제사하는 제단이다.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하는 사직제는 멀리 삼국시대부터 행하여져 왔었는데 임금이 제주(祭主)가 되어 제사지내는 서울의 사직제와 지방에서 각 수령들이 제주가 되어 제사하는 지방 사직제가 행하여졌으며 제단은 궁궐을 중심으로 서쪽에 설치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모든 고을에서도 반드시 관아의 서쪽 노천(露天)에 제단을 설치하였었다.
부안군의 사직단은 <동국여지승람>의 사묘(祠廟) 조에 의하면「현의 서쪽에 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정확한 위치나 이정의 표시는 없고 1887년에 간행된 군지 <부안지(扶安志)>에는 「재현서일리(在縣西一里」라 하여 관아로부터 서편으로 일리(一里)에 있다 하였으며, 1932년에 간행된 군지(郡誌) <부풍승람(扶風勝覽)> 권1, 단사(壇祠) 조에는 「재부령면 서외리 향교서(在扶寧面 西外里 鄕校西)」라 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향교의 서편에 있다 한 것으로 보아 속칭 삼메산(三山)에 사직단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직단이 있었던 자리는 흔적도 없어 찾아보기 어렵다.
성황사(城隍祠)와 여단(厲壇), 기우단(祈雨壇) 등의 사(祠)와 단(壇)이 모두 성황산의 정상에 있었으므로 부안읍성의 안에 있었음에 비하여 사직단은 성밖 부안향교(扶安鄕校)의 서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1966년 부안군 번영회가 발행한 <부안대관(扶安大觀)>의 사적(史蹟) 사직단(社稷壇) 조에는「흙으로써 축조된 방형(方形) 삼기(三基)의 제단(祭壇)이 남향으로 설치되었고 옆에는 제기고(祭器庫)가 있었다.」하였는데 “삼기(三基)의 제단(祭壇)”이라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사직단의 제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 두 개의 단으로 설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직단은 단을 남향으로 하고 흙으로 쌓되 기단은 석축으로 하여 이기(二基)를 만들며 동쪽에 사신(社神)을 모시는 사단(社壇), 서쪽에 직신(稷神)을 모시는 직단(稷壇)으로 하고 각각 사방 이장(二丈) 5치. 높이 삼척(三尺)의 방형(方形)으로 쌓으며 사방으로 3층의 계단을 설치한다. 그리고 단상에는 각각 이척(二尺) 5치 정도의 석주(石柱)를 세우며 사단(社壇)에는 국사(國社)의 신위를 남에서 북을 향하게 봉안하고 후토신(后土神)을 배향하였으며, 직단(稷壇)에는 국직(國稷)의 신위로 후직신(后稷神)을 봉안하였다. 이는 각각 부부의 신으로 짝을 이루게 함이다. 위판(位版)은 길이가 2척 2촌 5푼, 너비가 네 치 5푼, 두께가 7푼이며 받침의 둘레는 사방 여덟 치, 높이 네 치 6푼의 밤나무로 만든다. 이상이 사직단 설치의 기준 크기인데 지방의 사직단도 이에 준하여 설치했을 것으로 본다.
사직신은 토지와 곡식의 신으로 종묘와 함께 국가의 운명을 맡고 있어 국권을 상징하는 신이지만 토속신앙에서 보면 생산, 부활적 재생, 풍요, 번영의 기능을 하는 지모신(地母神)이다. 흙이 씨앗을 받아 하늘의 햇볕으로 곡식을 풍성하게 생산함은 지모신의 영력이며, 이 지모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성(性)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이 신비롭고도 경외로운 성신앙의 상징물이 남근(男根)이어서 지모신의 기능 강화를 위하여 남근을 사직단에 바친 것이라고 보아진다. 이와 같은 생산과 부활, 다산적 풍요를 기원하는 원초적인 성기신앙의 잔존 문화의 유물 유적들은 지금도 전국적으로 120여 곳에 남아 있으며 성기신앙적인 제의가 행해지고 있는 곳들도 많다.
사직단의 제사는 봄, 가을, 동지, 제석(除夕) 네차례의 정일제가 있고, 그 외에 전쟁, 극심한 가뭄, 무서운 전염병 등 국가적인 재난이 있을 때에도 국가의 보위와 제액소복(除厄召福)을 비는 제사를 별도로 지냈다. 1889년(己丑) 7월 25일자로 부안현감(扶安縣監) 윤필영(尹泌永)이 하서면 금광동에 사는 유학 임우인(林遇仁 兆陽人)에게 보낸 추계 사직제 축관(祝官)으로 위촉한 첩지(帖紙)에 의하면 추계 제일이 8월 5일로 되어 있고, 춘계의 제일은 2월 5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역대 임금들이 한발이 심하여 특별히 사직신(社稷神)에게도 비를 빌었던 몇 가지 기록들이 보이는데 참고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제17대 인종(仁宗) 12년(서기 1134년)에 가뭄이 심하여 왕이 부덕(不德)을 자책하며 종묘와 사직에 비를 비는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19년에는 종묘와 사직, 산천, 불우(佛宇)에서 비가 그치기를 빌었다(祈晴於 宗廟社稷 山川佛宇) 하였으며 조선조 3대 임금 태종(太宗) 7년에도 가뭄으로 인하여 왕이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하였고, 숙종(肅宗) 임금 30년에도 역시 가뭄으로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어서 사직단은 기우단으로도 겸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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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