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산의 고을 지킴이 신들

 

 

고을 지킴이 신을 모신 성황사(城隍祠) 

부안고을의 주산(主山)이며 진산(鎭山)인 성황산(城隍山)은 일명 상소산(上蘇山)이라고도 한다.  해발 115m 높이의 이 아담한 동산형의 산은 변산 반도의 한 자락이 큰다리 두포천(斗浦川)과 삼간평야(三干平野)를 훌쩍 건너 호남평야를 향하고 동쪽으로 달려오다가 동진하구(東津河口)에 다다라 급하게 멈춰 서 부안고을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이 되었다. 울울창창한 노송과 아름드리 잡목으로 덮여있는 이 산의 주봉은 동남으로 약간 기운 듯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서북으로 느릿하게 뻗은 몸통은 삼메봉(三山峰)을 이루어 마치 긴 병풍처럼 부안 고을을 감싸면서 순후하고 아름다운 부안의 역사문화를 꽃피운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 같은 산이다.

▲성황사.ⓒ부안21

옛날 부안의 행정 중심지인 치소의 읍성이 행안면의 역리 근처에 있었으나, 부령현과 보안현이 조선조 태종(太宗) 때인 1416년에 합병되어 부안(扶安)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되면서 그 행정의 중심지인 읍성이 역리의 고성(古城)으로부터 그 동쪽인 지금의 상소산(上蘇山) 성으로 옮겨왔으므로 성황산(城隍山)이라는 이름은 그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었을 것이다.

상소산이라는 원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혹 말하기를 삼국시대에 통일을 하기 위한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와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의 13만 군대를 이끌고 온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이곳에 와 이 산에 올랐다 하여 소정방이 오른 산이란 뜻으로 상소산(上蘇山)이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한낱 승자적인 전설일 뿐이다. 이와 같은 전설은 내소사(來蘇寺)나 우금암(遇金岩)의 명칭 전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성황산(城隍山)이란 이름은 무슨 뜻이며 어떠한 연유로 생긴 이름인가?  이는 이 산에는 부안 고을 사람들의 안과태평(安過泰平)과 원화소복(遠禍召福)을 맡고 있는 고을의 수호신인 성황신(城隍神)을 모신 사당이 있는 산이란 뜻의 이름이다.  따라서 성황산이라는 지명 속에는 그 고을의 진산(鎭山), 또는 주산(主山)이란 뜻과 함께 성황신이 깃들어 있음을 뜻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성황신은 민간신앙에서 마을의 지킴이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당산과 같은 성격의 신으로 여기서는 마을보다 큰 고을 수호의 신이라는 뜻이 더 강할 뿐이다,  고을의 주산에는 성황신사(城隍神祠)를 지어 고을의 수령이 받들어 모신다. 부안고을의 주산인 성황산에도 고을 지킴이신인 성황신을 제사하는 성황사(城隍祠)를 지어 제사하여 왔다.

성황(城隍)이란 말은 성지(城池)라는 뜻으로 역경(易經)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 1681~1763)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 의 성황묘(城隍廟) 조에서 성황(城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황(城隍)이란 글자는 본디 역경효사(易經爻辭)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성지(城池)를 말한 것이다. 전(傳)에 이르는 바 황토(隍土)를 파서 쌓아 성을 만들었다는 것이 곧 이를 말한 것이다. 내 생각에는 성(城)이란 사람이 밀집한 곳으로서 그 신에게 제사하여 오사(誤死)를 예방하고자 함인 듯 싶다.

고 말하였다. 중국의 당(唐), 송(宋), 명(明)나라 등에서 각 군이나 현의 진산에 단을 쌓고 성황신에게 제사하며 그 신의 격에 따라 벼슬까지 봉했던 예를 본받아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 이미 나라에서 성황신을 모시는 사당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조선조 태조 2년인 1393년에는 왕명으로 오악(五岳)의 산신에게 벼슬을 봉하고 국태민안을 빌었으며 세종(世宗) 19년에는 예조(禮曹)에서 각도의 산, 바다, 개천에 단(壇) 또는 사당과 신패(神牌)의 제도를 상세히 정하여 제사 하였는데 이때 전라도 성황으로 나라에서 행한 것은 전주(全州) 성황당의 위판(位版)을 전주성황지신(全州城隍之神)이라 하고 제사를 한 일등이 그것이다.

우리 부안의 성황사(城隍祠)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부안현의 사묘(祠廟) 조에 「성황사(城隍祠)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城隍祠 在縣北五里)」라 하였으니 이때는 이미 어느 고을이나 성황사가 설치되어 있었던 시절이다.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한 것은 지금 성황사(城隍寺) 대웅전 건물 바로 뒤쪽을 가리킨 말이다.

이와 같은 성황당 신사가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있어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高麗史)> 권63. 잡기(雜記) 조에 「문선왕(文宣王 : 文宗) 9년 삼월 임신(壬申)에 신덕진의 신성(新城)에 성황신사를 설치하고 호를 숭위라 내리었으며,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文宣王 : 九年三月壬申 宣德鎭新城 置城隍神祠 祠號崇威 春秋致祭>」라 한 것으로 보아 성황단 신사 모시는 제도는 고려 이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부안 성황산에 성황신 신사가 설치된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1416년 이후에 설치된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부안의 치소가 행안 역리로부터 상소산 밑으로 옮겨온 것이 1416년 이후이므로 그 후 여기에 성지(城池)를 쌓고 진산에는 성황신을 모셨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사(城隍寺) 절이 창건된 것은 1314년 고려 충숙왕 원년에 순천 송광사(松廣寺)의 16국사(國師)의 한 분인 국감국사(國鑑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므로 그러면 절이 성황당의 신사보다 100년 이상 먼저 지어진 것이 된다.  따라서 처음부터 절 이름이 성황사였는지, 후에 성황당 사당이 지어지면서 절 이름도 그에 따라 성황으로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건립연대가 100여년 이상 차이가 남에도 이름이 같다는 것은 후에 절의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여 볼 일이다.

우리 부안 성황당에서 지킴이 신으로 받들었던 신들은 김부대왕(金溥大王)과 그 가족신 그리고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자연신이다.  김부대왕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며, 왕의 이름이 부(溥)다 어떤 연유로 신라의 마지막 비운의 왕인 경순왕이 부안의 고을 수호신인 성황제신(城隍祭神)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적 인물이나 장군 등을 당신(堂神)으로 모시는 경우는 많다.  순창(淳昌)의 성황당신은 고려때의 문신(文臣)인 설공검(薛公儉)이며, 곡성(谷城)의 성황제신은 고려 건국의 1등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이고, 밀양(密陽)의 성황신은 광이군(廣理君) 손긍훈(孫兢訓)이며 의성(義城)은 김홍술(金洪術), 양산(梁山)은 김인훈(金忍訓) 등이 고을의 지킴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으나 그 연유는 앞으로 연구하여 볼 일이다.

성황사(城隍祠)가 훼철되면서 거기 모셨던 제신의 신체인 김부대왕을 비롯한 5위의 소상(塑像)이 성황사(城隍寺)절에 봉안되었는데 1983년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불당의 한쪽에 김부대왕을 봉안하고 그 좌측에 제2부안 최씨, 우측으로 태자(太子), 그 옆에 태자의 누이, 그리고 정후(正后) 허씨(許氏) 순으로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은 민간신앙의 신체가 불당 안에 봉안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습합사례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확인하여 보러 갔더니 1997년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 이들 김부대왕 일가의 소상(塑像)들이 모두 없어져 버려 다시는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신을 지킴이 신으로 모신 것은 자연의 재해를 막고 우순풍조로 농사가 풍년들게 기원하는 뜻이다. 이와 같이 자연신을 지킴이 신으로 받들어온 우리 겨레의 민간신앙은 먼 옛날부터 나라에서도 적극적으로 행하여 왔었음을 알 수 있다.

/김형주


김형주
는 1931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전북대학교를 나와 부안여중, 부안여고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향토문화연구회와 향토문화대학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향토문화와 민속’, ‘민초들의 지킴이 신앙’, ‘부안의 땅이름 연구’, ‘부풍율회 50년사’,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부안지방 구전민요-민초들의 옛노래’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전북지역 당산의 지역적 특성’, ‘부안읍 성안 솟대당산의 다중구조성과 제의놀이’,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부안지역 당산제의 현황과 제의놀이의 특성’ 외 다수가 있다. 그밖에 전북의 ‘전설지’, ‘문화재지’, 변산의 얼‘, ’부안군지‘, ’부안문화유산 자료집‘ 등을 집필했다.

2005·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