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갯벌 파괴한 새만금방조제, 한국판 모아이 석상
남미의 칠레에서 서쪽으로 3,700km 떨어진 남태평양 한가운데 제주도의 10분의 1 정도 되는 크기의 이스터섬이란 섬이 있다. 1722년 유럽인들이 이 섬을 처음 발견했을 때 섬 사람들은 누추한 갈대 오두막이나 동굴에서 기거하며 전쟁으로 날을 지새고 있었다. 워낙 식량이 부족하여 인육을 먹기도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이 섬 주민들의 야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한 때 번성했던 사회가 있었던 흔적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해안을 돌아가며 2백 개가 넘는 거대한 석상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모아이라고 불리는 이 석상 중에 큰 것은 높이가 10m, 무게가 80t이나 되었다. 채석장에서 석상이 있는 해안까지는 수km에 이르지만, 섬에는 석상을 제작하거나 운반하는 데 쓰일 큰 나무나 튼튼한 덩굴도 없었고 닭보다 큰 동물도 없었다.
47개나 되는 신전과 제단의 흔적, ‘롱고롱고’라 불리는 문자의 사용, 하지, 동지 등의 날에 떠오르는 태양의 각도에 맞추어 세운 300여개의 ‘아후’라 불리는 제사 장소 등을 본 유럽인들에게 이스터섬은 하나의 미스테리였다. 갖가지 설이 난무하였다. 심지어 우주인들이 와서 건설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최근에 와서야 탄소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에 의한 고고학, 고생물학적 연구로 이 섬의 신비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 섬은 원래 여러 가지 나무가 울창한 아열대 숲이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키가 20m가 넘는 야자수가 과거에는 가장 흔한 나무였다. 지상낙원과도 같은 이 섬에 서기 500년경에 폴리네시아인들이 이주해왔다. 자연이 주는 풍요 속에서 인구는 점차 늘어 2만여 명까지 늘었는데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명을 쌓아가며 가계와 씨족을 이루고 각각 고유의 종교의식을 갖게 되었다. 부족 통합을 위한 종교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각 씨족은 경쟁적으로 거대한 석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운반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나무 둥치를 잘라 깔고 그 위로 석상을 굴려 운반하였다. 또한 인구가 늘면서 난방과 조리를 위해 나무를 베어냈다. 씨족 간에 조각상 세우기가 경쟁적으로 벌어졌다. 그 결과 1600년 경에 섬에 있는 모든 나무가 사라졌고 채석장 주변에는 많은 미완성 조각품이 남아있게 되었다.
나무가 줄어들자 집 짓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고 갈대로 된 오두막에 살게 되었으며 멀리 나가 고기잡이를 할 카누도 만들 수 없었다. 먹을 것이 날로 줄어들자 씨족 간에 전쟁이 일기 시작했으며 한 때 나름대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사회는 파멸의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저 석상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묻자 저 산 너머에서 걸어서 왔다고 대답하며 조상들마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스터섬의 이야기는 환경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과거로부터의 메시지이다. 사람의 거주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섬을 지구의 축소판으로 대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며 본격적인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지구는 현재 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기 위해 국제협약이 맺어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서해안의 거대한 방조제들은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갯벌을 매립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숲의 파괴로 인한 섬 전체의 공멸을 눈앞에 두고도 석상을 만들자고 주민들을 다그치는 이스터섬의 추장의 목소리이다.
/허정균
2007·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