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회가 저지른 ‘인재’의 장소, 그 오늘날

 

▲산(바디재) 위에서 내려다본 우동리 풍경ⓒ고길섶

 

잃어버린 옛 우반동 경관

물은 반계로 이어져 절정을 이루고(水接磻溪勝)
산은 우반 골짜기에 깊이 숨어 있도다(山藏愚谷深)
시냇가에 핀 꽃은 지나가는 객의 발길을 사로잡고(磵花迷客路)
숲속에서 들려오는 퉁소 소리는 마음을 시원하게 하네(林籟爽人心)

조선 인조 때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이 지은 시입니다. 우반 골짜기라 함은 당시 보안현의 우반동(지금의 보안면 우동리)에 있는 골짜기를 말합니다. 옛날에는 이쪽 사람들이 산속에서 퉁소를 즐겨 불었나 봅니다. 진서면의 산속마을인 대소도 퉁소와 관련이 있으니 말입니다.

각설하고, 조선시대의 시인이나 묵객(墨客)들이 우반동의 경치를 보고 감탄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시로 표현하고자 하는 감흥에 빠져들었나 봅니다. 우반동의 경치에 반해 글로 남긴 사례가 많습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 권극중(權克中, 1560~1614)은 “변산의 남쪽에 우반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아름다운 포구(浦口)와 산수가 어우러져 절정을 이룬다”고 찬탄하였습니다.

▲절경이었던 옛우반동을 잃어버린 우동리ⓒ고길섶

 

반계 유형원, 그 사상의 거처

17세기 실학의 거장인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1653년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우반동에 내려와 살면서 전국 유람과 농촌생활을 경험하며 국가의 법제를 전면개혁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한 <반계수록>을 저술합니다. 우반동은 그의 사상의 거처입니다. <반계수록>을 번역한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는 1959년에 쓴 해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반계는 당시 보통 양반들이 항상 탈세 행위를 함으로써 빈궁한 농민들에게 국가 부담을 송두리째 전가시키는 악랄할 행위를 극도로 증오한 것은 물론이요, 또 적극적으로 자기의 축적을 많이 빈민들의 구제에 활용하였다. 그는 또한 이 축적으로써 큰 배 4∼5척과 많은 준마들과 조총, 궁시 등 무기를 장만하여 자기의 노비들 및 동리 사람들과 함께 사적으로 수군 및 육군의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우반동의 조총 사격술과 기타 무예는 후세에까지 오랜 전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저수지 제방이 경관의 흐름을 단절시켰다.ⓒ고길섶

빼어난 경관환경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흥청망청하지 아니하며 사회개혁의 역저를 저술하고 치밀하게 실천한 반계의 의지가 대단해보입니다. 앞의 김세렴은 유형원의 고모부이며 유형원에게 글을 가르친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반동의 지형적 경관은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柳成民)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저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앞은 툭 트여 있으며 조수(潮水)가 흘러들어 포(浦)를 이룬다. …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마치 두 손을 공손히 마주잡고 있거나 혹은 고개를 숙여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혹은 나오고 혹은 물러나 그 모습이 변화무쌍하다. 아침의 구름과 저녁의 노을이 자태를 드러내면 진실로 선인(仙人)만이 살 곳이요 속객(俗客)이 와서 머무를 곳은 아니다. 한 가운데에 있는 장천(長川)이 북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향하니 이로 말미암아 동서가 자연히 나뉘는데 이 장천이 또 하나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부안김씨우반고문서>).

▲전봇대들로 흉물스러운 굴바위 가는 길ⓒ고길섶

옛 문헌의 기록들에 따르면, 지금의 우동리인 우반동은 참으로 빼어난 경치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 같습니다. 선조시대에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 1523~1589)은 자신의 시에서 ‘우반십경’을 거론합니다. 우반십경은 사포(沙浦)의 떠들썩한 상선, 죽도(竹島)의 고기잡이 등불, 검모포 수군의 저물녘 호각소리, 수락사의 새벽 종소리, 선계의 맑은 폭포, 배고개의 울창한 소나무숲, 황암의 고색창연한 고적, 창굴암의 고승, 심원에 노니는 사슴, 어살가득한 고기잡이 등을 일컫고 있습니다.

빼어난 인문지리 경관으로서의 우반십경

그러나 지금의 우동리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면 적어도 관광버스라도 드나들어야 할 터인즉 관광버스는 커녕 우신마을 뒤 산자락에 있는 반계서당을 찾는 객들이 간혹 있을 뿐입니다. 내변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우동저수지로 내리치는 선계폭포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만 그 역시 비가 많이 왔을 때나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객들이 여행의 목적지로 삼는 것도 아니거니와 단지 내변산을 향하거나 나올 때 주마간산식으로 흘겨볼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옛날의 우반동의 아름다운 경관은 사라졌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아름다운 경관이 사라지다니 그게 말이나 될 법 할까요? 네, 말이 됩니다. 경관이라는 것은 자연의 모습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관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물리적인 의지에 따라서 더 좋은 경관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가하는 인간의 어떤 행동들에 의해서 경관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새만금방조제 사업은 새만금 내지(동진, 계화, 하서 등지) 뿐만 아니라 변산, 진서, 줄포, 위도 등지의 외지 바닷가의 자연적인 환경마저 거침없이 황폐화하고 있습니다. 우반십경이 ‘선계의 맑은 폭포’만이 아니라 ‘사포의 떠들썩한 상선’도 포함시켰다는 점을 보더라도 자연의 모습에 인문지리적으로 구성되는 게 경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암괴석을 수몰시킨 경고문과 표지판ⓒ고길섶

경관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연 그 자체의 모습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선인들의 우반동 묘사가 과장되었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전경목 교수가 쓴 <고문서를 통해 본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신아출판사, 2001)에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만, 전 교수 역시 “절경이었던 우반동의 경치는 근래 몇 년 사이에 너무나도 몰라보게 훼손되어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을 뒷산의 산허리를 잘라낸 도로나 우동제의 축조를 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옛 우반동을 찾아

우동리야 내가 어렸을 적 굴바위로 놀러도 다녀 이미 익숙하고 지금도 자주 지나치는 곳입니다만, 선인들이 느꼈던 우반동 풍경을 다시 복기해볼 요량으로 ‘옛 우반동’을 찾았습니다. <홍길동전>의 작가로 알려진 허균( 1569~1618)이 쓴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6권의 ‘정사암중수기’(靜思庵重修記)를 그대로 뽑아들고 말입니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부안현 해안에 변산이 있고 변산 남쪽에 계곡이 있는데 우반이라 한다. 그 고을 출신 부사 김공청(金公淸)이 그 빼어난 곳을 택하여 암자를 짓고 정사(靜思)라 이름지어, 노년에 즐겨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나는 일찍이 사명을 받들어 호남을 왕래하였는데, 그 경치에 대해 소문은 많이 들었으되, 미처 보진 못했었다.

나는 본시 영예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매양 상자평(尙子平)의 뜻을 지녔으나, 그 소원을 아직도 이루지 못했었다. 금년에 공주에서 파직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서 장차 소위 우반이란 곳에 집 짓고 살 결심을 하였다. 김공의 아들 진사 등(登)이란 이가,
‘우리 선군의 폐려(弊廬)가 있으나 저는 지킬 수가 없으니, 공이 수리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고군 달부(高君達夫) 및 두 이씨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보았다.

▲기도원이 풍경을 해치는 선계폭포ⓒ고길섶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서 골짜기에 들어서니 시내가 있어 그 물 소리가 옥 부딪는 듯하여 졸졸 수풀 속으로 흘러 나왔다. 시내를 따라 몇 리 안 가서 산이 열리고 육지가 트였는데, 좌우의 가파른 봉우리는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나는 듯 높이를 헤아리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나는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 셋이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돌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허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대해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金水島)가 그 가운데 있으며,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란 데에 이르니, 암자는 방이 겨우 네 칸이며 바위 언덕에다 지어 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우리가 높이 마주 서 있었다. 나는 폭포가 푸른 절벽에 쏟아져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산발(散髮)하고 옷을 풀어헤친 채 못 가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살짝 피고 단풍은 반쯤 붉었는데, 석양이 산봉우리에 비치고 하늘 그림자는 물에 거꾸로 비친다. 굽어보고 쳐다보며 시를 읊조리니, 금새 티끌 세상을 벗어난 느낌이어서 마치 안기생(安期生)ㆍ선문자(羨門子)와 함께 삼도(三島)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행히 건강할 때 관직을 사퇴함으로써, 오랜 계획을 성취하고 또한 은둔처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경관 파괴는 오늘에도 이어져

그러나 빼어난 옛 우반동 경관은 머리 속에서만 펼쳐질 뿐이지 나의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반동 경관을 사라지게 했을까요. 우동리는 지금 원우동, 감불, 우신, 만화 이렇게 네 마을로 이루어집니다. 만화동은 도로 입구에 있는 마을입니다. 유성민이 묘사한 장천(長川)은 선계폭포에서 원우동과 만화동을 거쳐 줄포만 바다로 흐릅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만화동에서 원우동으로 가는 장천에는 과수원과 키큰 탱자나무가 즐비하여 매우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었답니다. 1980년대에도 그 절경을 볼 수 있었다 하나 하나의 작품으로 나무를 관리하던 노인네가 죽고나서부터 어영그영 없어졌다 합니다.

허균의 글대로 따라가다보니 눈에 가장 먼저 거슬리는 것은 여기저기에 난잡하게 늘어져 있는 전봇대입니다. 전봇대는 근대의 풍경 중 하나입니다만 경관을 해치는 눈엣가시의 하나이기도 하여 우반동 풍경을 조잡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만화동의 고구마공장이 배출하는 오염수는 선계폭포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장천의 생태적 흐름을 파괴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원우동쪽 장천에는 지금도 다슬기, 참게, 가재, 민물고기 들이 살아 있어 하천생태를 복원해주고 있습니다. 이 장천은 우반동의 경관에 한몫하였으나 1957년에 축조된 우동저수지가 기암괴석을 집어삼키며 그 절경을 잃게 했습니다. 일대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빨래도 하고 김장도 하며 장관을 연출했을 장천의 널따란 ‘서다바우’나 징검다리로 놓여졌던 ‘구시렁다리’도 어디론지 묻혀버렸습니다.

▲64년전 우동저수지에서 이주해왔다고 증언하는 오기용 할머니(가운데)ⓒ고길섶

수몰된 저수지 터에는 다섯가호가 있었답니다. 64년 전에 이사나온 85세의 오기용 할머니가 그 기억을 증언합니다. 놀랍게도 이 할머니는 최근의 마을 문제들까지 다 꿰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딸은 개인의 재산 증식이나 땅 소유 욕심이 마을의 경관을 해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동저수지의 축조는 우반동 경관을 파괴한 강력한 사업이었습니다. 높이가 14미터이고 길이가 260미터나 되는 제방은 선계폭포를 비롯한 변산의 절경 흐름을 농경마을과 우악스럽게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폭포 아래의 기도원도 경관을 해치고 있습니다. 우동리 북쪽 내변산 길로 넘어가는 버드재 도로를 내느라 비스듬히 산을 깎아먹은 모습은 마치 얼굴에 난 칼자국마냥 길게 그어져 있는 것이 볼썽 사납습니다.

감불마을을 통해 외포 쪽으로 저수지 물길을 내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하니 그 또한 우려스럽습니다.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사업중인 터에 마을 사람들도 반대하고 장천 오염이 우려되어 녹색농촌체험마을 만들기와 어울리지 않는 김치공장을 보란듯이 허가해준 부안군의 처사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한 주민은 분개합니다.

풍부한 역사-문화들을 기억하라

옛 우반동의 경관은 결국 근대사회로 들어서면서 상실했습니다. 그것은 ‘인재’입니다. 난잡한 전봇대들, 우동저수지, 군사도로였던 버드재길, 그리고 최근의 고구마공장이나 기도원 따위들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근대사회 자체가 끊임없이 개발을 요구하는 터라 경제적 부를 창출하고 더 편리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개발 그 자체를 반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헐어 털어내고 토목공사로 완공하면 된다는 기존의 거친 개발 방식이 오히려 오랫동안 보존되어오던 지역의 경관이라는 훌륭한 자산을 너무 손쉽게 파괴해왔다는 점이 성찰되어야 합니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빼어난 경관의 자산을 파괴하는 일은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입니다. 한 아주머니는 “옛날의 탱자나무길을 잘 보존하였으면 지금은 아주 뒤집어졌을거네요.”

경관관광 이미지로 변산반도를 부각시키려면 우반동 교훈을 깊이있게 성찰해야 합니다. 늦었지만, 50억여원의 돈이 투자되는 녹색농촌체험마을 만들기 사업이 주먹구구식으로 추진되기보다 뭔가 개념있는 마을 리모델링을 통해 옛 우반동의 경관을 되살렸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동리의 문화적 자산은 아주 풍부합니다. 앞에서 거론한 것들 외에도 고인돌이나 선돌, 고려시대의 가마터, 반계 유형원의 서당이나 삶의 흔적들, 역사깊은 우반동 김씨의 고문서와 그 문화, 400년 된 팽나무와 무형문화인 당산제 등을 연결하는 경관생태적 지도그리기는 마을 전체를 조망하여 내려다보고 세세히 둘러보며 깊이 음미해볼만 합니다.

녹색농촌체험마을 만들기 사업을 우동리 마을 전체에 걸친 ‘우반동박물관’으로 연계, 조성하는 것은 어떨까요. 잃어버린 옛 우반동 경관을 되찾기 위해 말입니다. 옛 우반동의 경관 복원은,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풍부한 역사-문화들의 기억들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고, 우동리 마을은 그러기에 충분한 역사적 보고와 이야기거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사진 고길섶 문화비평가

* 이 글은 부안독립신문에 게재한 글을 수정·증량했습니다.
2007·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