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형국의 마을 산세는 황금벌판의 꿈으로 사라지고

 

▲조포 1구 마을 모습

계화면 조포마을

▲동네 언니가 이웃 유치원생 동생을 집에 데려다주고 있다

계화면 창북리에서 계화리 쪽으로 조금 가다 우회전하여 줄곧 달리다보면 비교적 큰 마을이 나옵니다. 주변 일대가 워낙 넓은 간척지 논이다보니 마치 육지 속의 섬 같습니다. 이 마을은 필시 오래 전에는 섬이었을겁니다. 줄무늬잎마름병이 휩쓸고 간 아픈 농지에도 가을은 왔는지라 누렇게 영근 황금벌판의 농부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락 수확을 이미 마친 농가는 보리 심는 ‘전쟁’으로 한창입니다. 비 오기 전에 보리를 심어야 하므로 논바닥에 깔린 짚더미를 빨리 치워달라 서로들 아우성입니다. 동북으로는 동진강이 바다와 만나고 있고 서로는 계화도가 보이며 남으로는 부안읍내로 향하는 곳, 바로 이곳 벌판의 붉은 해거름은 심사(心思)가 뒤엉킨 농심을 위로하는 듯 합니다. 10월 18일 조포마을의 풍경입니다.

보부상이 동진강을 거슬러 오르다 정착

동진면 양산리 새포마을이었던 것이 1983년 2월 15일 계화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승격되면서 계화면 양산리 조포마을로 부르게 되었으며, 조포마을은 4구까지 있으나 석산을 가운데 두고 주로 석산의 동-남-서향으로 마을이 잇달아 형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을의 산을 석산이라 합니다. 계화도 간척사업할 때 높은 석산이 다 깎여 지금은 야트마하게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산의 이름이 무어냐 물으니 대부분 없다 하거나 석산이라 하나 산 위 평지에서 게이트볼에 열중하고 있는 한 노인양반이 조포산이라 합니다. 이 마을이 새포로 불리다가 조포로 불린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에 조포산이라 함은 신뢰성이 떨어져보입니다.

▲마을 골목길에서 팥을 말려 까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포마을은 300여년 전 시산 허씨의 성을 가진 보부상이 동진강을 거슬러 오르려다 새 모양을 한 포구를 발견하고 그 형상이 기이하여 정착하며 살아 새포로 불렸다 합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바다 가운데 새 등처럼 물에 떠 있는 형상이었다 합니다. 그 후 남양 홍씨, 경주 최씨, 반남 박씨가 씨족을 이루며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부안군 향리지>는 “이 마을에 있는 산의 형세가 와우형국(臥牛形局)인데, 나들이를 내보냈던 어미소가 새끼소를 기다리는 안타까움과, 아침에 풀을 뜯던 어미소와 저녁 무렵 송아지의 한가로움이며, 또한 험한 파도가 몰아칠 때 막아주는 역할도 했다는 포구의 애환이 담겨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을이 커 한때는 고기잡이로 번창하기도 했고 새포장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빚 독촉을 받으면 “새포 장날 만나세” 하면서 미루었답니다. 김형주 선생이 지은 <김형주의 부안이야기>(밝, 2003)에는 새포 옆 길노리(吉老里)에 옛날 장이 섰었으며, 길노리 마을은 1898년 큰 해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마을 2구 쪽에는 아직도 ‘새포정미소’라는 낡은 현판이 건물벽에 붙어 있는데, 이 옆자리에 크고 작은 배가 드나들면서 어장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부안에 조선시대의 사창(社倉)이 다섯군데 있었으며, 그 하나는 북창(北倉)이라 하여 새포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인근에 상당히 큰 부락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창이란 곡물을 비축해두어 춘궁기나 흉년에 백성들에게 꾸어주던 곳을 말합니다.

<부안군향리지>는 “70년대 이전에는 천수답에 의존한 마을 주민은 쌀 한 톨 얻지 못하는 흉년이 계속되면서 3~4년에 한번씩 양식을 장만하기도 하였지만 거의 초근면피로 연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을의 산은 바위산이었으니 연명할 초근면피나 제대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치더라도 아마 계화간척공사를 추켜세우기 위한 진술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부안군향리지>는 “계화간척공사 전의 생활상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섬진강 수몰민들의 이주터

▲마을 석산에서 게이트볼 게임을 하고 있는 노인들

계화도 간척지는 ‘쓸모없는 땅’으로 보였던 갯벌을 ‘광활한 옥토’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계화도 간척사업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계화도농업종합개발사업’(동진강수리간척사업)의 이름으로 발상되었으며, 1963년 3월 15일 물막이 공사를 착공하고 1974년 11월 13일 내부 개답공사를 착공하여 ‘황금벌판’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1977년 12월 20일에 내부 개답공사가 완공되었는데, 총 매립면적 3,968ha에 농지조성이 2,708ha였습니다. 조포지구에 조성된 가경지는 241ha(72만3천평)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더러 이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짓도록 했을까요. 계화도 간척사업과 동시에 진행된 사업이 바로 섬진강 다목적댐의 건설이었고, 이에 따라 임실군과 정읍군에 걸쳐 2,786세대 19,851명의 수몰민이 발생하였는 바, 이중 228세대가 1966년에 조포지구에 우선 입주하였습니다. 이들은 ‘계화도 간척지구 조포 협업농장 규약’에 따라 조포 가경지를 협업농장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매년 협업농장에 국고보조를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자 섬진강댐 이주민 236세대와 파월장병 가족 5세대에 개인별로 가분배함으로써 협업농장은 1968년 해산합니다.

▲마을의 운동기구가 설치된 놀이터는 잡초가 무성하다

이때 가분배하면서 개인별로 농지분배 지정서를 발급합니다. 그러나 10여년이 경과하도록 분배농지에 대한 후속조치없이 방치하자 문제가 발생합니다. 분배농지의 90% 이상이 전매되어 이주민은 대장상 명의 뿐이고 소유권 행사는 사실상 매수자가 하여 분쟁이 야기되어 1978년 정부는 농지분배권을 양수한 현 경작자를 인정하여 문제를 해결해갑니다. 이 과정에서 가짜 ‘증권’으로 재산을 날려버린 이주민들도 수두룩합니다. 조포마을 2구에 사는 81세의 한 할머니는 피해 당사자입니다. ‘증권’이라는 말은 그이의 표현입니다. 아마 농지분배증서일겁니다. 할머니는 30여년 전 전남 영광에서 이주해왔습니다.

“싼 논이 많이 있다고 혀서 좋은 논 팔아 여기로 왔지. 근디 그게 가짜 증권을 받아온거야. 망해버렸어. 우리처럼 귀얇은 사람들은 그렇게 다 사기당한거여. 고향에서는 밥 먹고 살았는디, 억장이 무너지지. 홧병에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매달아 죽고… 한 집서 서너집이 살면서 굶기를 밥 먹듯이 했지. 모 심어봐야 다 디져버링께. 어쩌겄어, 밥태기보다 더 작은 조개(아사리) 잡아다 팔아먹고 살았지. 쌀 한 가마 꿔오면 두 가마로 갚아야 허고, 안죽고 산일 생각허면 아슬아슬혀.”

▲세포정미소라는 이름의 옛 흔적이 남아 있다

조포마을에 새겨졌던 계화 간척지의 애환은 오늘날 생존자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조포마을에 정착한 임실과 정읍의 수몰민들이 부안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섬진강댐의 수몰민이 되어 쫒겨나는 과정에서도 보상비나 이주대책 등의 문제로 평탄치 않았으나 객지인 새로운 터전에서도 험악했습니다. 보상비는 이미 빚을 갚거나 생활비에 다 써버렸고 간척지는 제염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등의 어려움은 차치하고 마을의 선주민들이 ‘텃새’를 심하게 부렸습니다. 이주민들을 잡아다 두들겨팼다는 증언은 이주민이나 선주민 공히 하는 말이고, 선주민은 이주민을 ‘사람취급도 안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현대사가 낳은 아픔이었으나 시간이 약인지라 그런 기억은 이미 가물가물해졌고 지금은 모두가 부안사람 조포주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조포마을 1구는 선주민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2·3·4구는 이주민들이 많습니다.

‘부촌’ 속 가난의 흔적

1구에 사는 한 50대 아주머니는 조포마을이 ‘부촌’이라 합니다. “논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임차농사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집들이 부유한 편이지요. 그리고 여성들이 편해요. 논 농사 짓는디 약헐 때 남편허고 같이 허는 거 빼고는 달리 할게 없잖아요.” 실지로 마을을 둘러보니 좋은 집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빈집도 다른 마을에 비해 적은 편입니다. 밭이 별도로 없어 집과 집 사이에 텃밭이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텃밭에는 감자, 메밀, 무, 배추, 쪽파, 대파, 당근, 마늘 따위들이 알뜰하게 커가고 있습니다. 콩은 간척지 논두렁에 심어 그 소출이 상당하답니다.

▲아이들이 없는 마을에 두어명의 꼬마들은 대장과 부하로 역할분담하여 놀고 있다

그러나 2구 마을 다른 언덕배기에는 가난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습니다. 마을의 맨 위에 자리잡고 있는 조포교회의 동향 언덕배기에는 달동네마냥 몇 채의 낡은 쓰레트 집들이 30여년 전 간척지 시대 취락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팔순의 한 할머니는 7살배기 손녀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온갖 곳이 다 아파 매일 병원에 가야하고 힘들어 더 이상 손녀를 데리고 있지 못하겠다고 걱정스레합니다. 집이 커다란 바위 위에 지어진 집이라 마당에도 흙 한줌 없었는데 연탄재가 쌓여 쓸만한 텃밭이 만들어졌고, 그 텃밭에는 마늘 싹들이 겨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녀는 방안에서 혼자놀이에 바쁩니다.

▲연탄재로 만들어진 계화도 간척지 이주민 집의 텃밭

조포마을에는 당집이 있었다 합니다. 마을의 액운이 닥치거나 바다에 나간 남편의 무사고를 비는 아낙네들의 기도장소였겠지요. 그 자리를 오늘날에는 교회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계화도 간척공사가 있었고 새만금사업이 뒤를 이으면서 이 마을은 바다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갈대숲과 조개껍질로 뒤덮였던 마을 주변의 갯벌땅은 오래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계화도 간척공사로 인해 마을이 커져 번창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또다른 풍문이 휩쓰나봅니다. 마을의 어떤 사람은 이곳이 아주 커질거라는 소문을 내게 전합니다. 아마 ‘새만금사업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입지요. 안타까운 바램입니다.

▲큰 바위나 석산 위에 지어진 집들이 많다

 

/글·사진 고길섶 문화비평가

* 이 글은 부안독립신문에 게재한 글을 수정·증량한 글입니다.
2007·11·07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