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등도공화국’으로 독립허고 싶당게

 

▲정상에서 바라본 상왕등도 마을. 뒤는 하왕등도

 

위도면 왕등도 마을

우리가 왕등도를 찾은 날은 안개가 많은 날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여객선으로 위도의 파장금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곧바로 미리 예약한 어선으로 갈아탔습니다. 왕등도에 들어가는 배가 일주일에 두 대 밖에 없고 섬 주변도 둘러보며 낚시도 할 겸 해서 어선을 빌렸습니다. 제법 빠르게 달렸는데도 파장금항에서 출발한지 40분 정도 지나서야 왕등도가 보이기 시작했고, 여전히 안개는 뿌연하게 섬들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바라본 상왕등도
▲아침 일찍 채전밭 가루약 뿌리는 주민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중종 18년 계미년(1523)에 충청도 관찰사 윤희인이 장계(狀啓: 임금에게 글로써 보고함)하기를 “6월 27일 서천포 만호(舒川浦萬戶) 권한(權暵) 등이 왜선과 직도(稷島)에서 만나 추격하면서 싸웠는데, 왜선이 부안의 왕등도를 향하여 가므로 권한 등이 추격하여 갔습니다”라 하였습니다. 또 며칠 뒤에는 전라도 병마 절도사·군관 나사항(羅士恒)이 왜선과 접전한 절차를 아뢰기를 “왜선의 빠르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왕등도를 향하여 갈 적에 바다가 매우 광활하였는데, 마침 그날 순풍(順風)이 있었으므로 접전하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결단코 따라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 하였습니다. 1747년(영조 23년)에 기록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격포 앞바다를 일러 “무서운 파도와 큰 물결에 의해 표탕(漂蕩)되어 가끔 침몰하기도 하”여 “칠산(七山)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고 전하고 있듯,왕등도 앞바다의 위세도 거칠었을겁니다.

▲일거리를 의논하는 마을 사람들과 부안읍내에서 온 사람들

그래서 그랬을까요? 왕등도에 사람들이 살게된 지는 그닥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삼백년 되었다는 설도 있고 사오백년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격포에서 위도까지는 물리적 거리로 34km 정도로 얼마되지 않지만 그 옛날 물길로는 험난하고도 오랜 거리였을 겁니다. 백제부흥운동 때 복신이 승려 도침과 더불어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여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맞이하여 왕(豐王)으로 세웠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 풍왕이 왕등의 언덕에 올랐다 하여 왕등도라 한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는 왕등도를 한자로 ‘王登島’라 표기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旺嶝島’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전우 간재 선생이 1908년 입도하여 지명이 너무 높다 하여 旺嶝島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행정력이 미치지 않어”

2007년 9월의 왕등도는 한 10년 전의 왕등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듯 합니다. 1998년과 1999년에 왕등도를 찾았던 신형록 씨는 부안21에 기고했던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가장 많을 때는 37가구에 300여명이 살았다하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42명이 살고 있다. 이 42명도 마을에 적을 두고 있다는 공식통계이고, 실제로 살고 계시는 분들은 10명 정도다. 마을에서 젊은 사람은 찾을길 없고 나이드신 분들 몇 분을 볼 뿐이다. 마을 떠나는 이유는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고 한다.” 칠산어장이 한창 활기를 띨 때에는 상왕등도에 300여명의 주민이 살았고, 초등학생 수도 60여명에 이르렀다 합니다. 위도초등학교 분교가 상왕등도와 하왕등도에 각각 있었습니다. 학교는 1990년대 초에 폐교되었습니다.

지금 왕등도에 사는 사람들은 서씨가 두 집이고 나머지는 다 노씨입니다. 멀게는 4-500년 전 혹은 300년 전에 왕등도에 들어온 사람들의 후예들입니다. 처음 입도한 사람들은 노(盧)씨와 남(南)씨였고, 이들은 유배생활을 하며 마을을 형성했다 합니다. 고려시대 말의 백운거사 이규보 역시 왕등도에 유배된 적이 있다 합니다. 굶겨 죽이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유배지가 될 수 있었을까요? 당시에 사람들이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간재 선우선생 유허비와 폐쇄된 초소

기록되지 않으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선사(先史)입니다. 왕등도 해양문화의 역사는 거의 기록되어 오지 않고 있습니다. 거의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곤 1세기 전에 왕등도에서 은둔했던 전우 간재 선생의 유허비(遺墟碑) 정도입니다. 간재는 나라가 기울자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라고 하였으니 나도 바다로 가겠다”며 68세의 나이에 왕등도로 들어갑니다. 그날, 1908년 무신년 9월 4일은 거센 파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줄포경찰서 고등계 은성경 형사는 바람이 억세 간재의 출항을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했고, 왕등도에 무사히 도착한 간재가 거북이와 작별인사를 하더라는 은성경 형사의 보고가 있습니다. 이후 계화도로 옮깁니다만, 오늘날 유허비는 있으되 간재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강학소는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마을 뒤 용문암 근처 바위에서 낚시꾼들이 갯바위낚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왕등도는 문자문화와 거리가 먼 것만이 아니라 치안과 행정과도 거리가 멉니다. “여기 사람들은 ‘왕등도공화국’으로 독립허자고 한당게. 한달 전쯤인가, 상왕등도 초소도 폐쇄되어버렸어. 경관 1명과 전경 1명이 상주해 있었는디, 어느날 주민들에게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렸어. 그러니 주민들 사이에 ‘왕등도공화국’ 이야기가 나오지.” 광주에 집이 있으나 왕등도가 고향인지라 여름이면 왕등도를 찾아 몇 달이고 지낸다는 노병진 씨는 소외된 ‘섬나라’의 실상을 거침없이 뱉어냅니다. “여기 오면 감기 한번 안 걸려. 그거는 참 좋은디, 행정력이 미치지 않어. 주민이 미역건조장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면에서는 나와보지도 않고 사업장 측량만 해오라며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어. 10년 전에 정부돈 받아 지은 어민회관도 부실공사야. 물이 줄줄 새. 마을 한가운데 언덕길도 포장을 해줬는디, 부실공사를 했어. 언덕길이 항상 물이 흘러 이끼 껴 걷기가 옹삭혀. 나도 한번 엎어져 박터졌어. 공사하며 화장실 정화조도 파손하여 밑으로는 똥물이 튀어나와. 군에 뭐라 해도 도대체 들어주지를 않네. 접안시설도 좋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여객선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들어오지 않으려고 애쓰고…”

 

현실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생활양식

▲폐허가 된 슬레트집

섬에서 산다는 것은 지역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된 생활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등도 역시 부안지역사회라기보다 낚시꾼이나 몰려가는 여행지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왕등도는 농어, 우럭, 광어, 돔 등이 많이 나와 낚시꾼들이 즐겨찾는 곳입니다. 그러나 왕등도는 그 이전에 주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러다보니 낚시꾼들과의 불화도 있었습니다. “주말이면 수백명이 옵니다. 한명이 적어도 30~40마리는 잡습니다. 그런데 거의 새끼들을 잡고는 좋다고 매운탕 끓여 먹고 가지고 갑니다. 300명이라 해도 9,000마리입니다. 주말마다 9,000여 마리의 치어가 바다에서 없어지니 어장에 고기가 있을리 없지요.” 신형록 씨가 주민에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한때는 주민들에게 낚시꾼이란 ‘백해무익’한 존재였습니다. 온통 쓰레기들까지 남기는 등 낚시꾼들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깔끔하게 새로 지은 조립식 집

지금은 그런 갈등은 사라진듯 합니다. 그렇다고 낚시꾼들이 왕등도 마을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왕등도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보면 어디서 왔냐고 묻곤 합니다. 사람이 그리울 수도 있지만 특별히 반가워하거나 특별히 경계하거나 그러지는 않아 보입니다. 주민들끼리의 소통의 장도 그리 빈번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각자의 바쁜 삶이 있고, 일이 있으면 있는대로, 심심하면 심심한대로 하루의 일상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텔레비전은 잘 나오니 바깥 소식은 그것으로 전해듣습니다. 마을 위 산언덕에는 주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해주는 발전시설이 있고, 그 맞은편 산 정상에는 SK텔레콤 기지국이 있습니다.

섬 마을은 눈에 띄지 않게 변해갑니다. 그럼에도 눈에 가장 띄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집의 건축양식입니다. 1970년대 이후 많았을 슬레트 지붕 집들은 사라지고 딱 한 채 폐가로 남아 있습니다. 부실한 슬라브 지붕을 새로 수리하고 있는 두 집을 빼고는 점차 집들이 컨테이너박스로 짓는 조립식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건축비도 많이 들고 여름생활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섬마을에 컨테이너집이 늘어선다는 게 그리 살가운 풍경을 연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현실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주민들의 이해타산이 곧 그이들의 생활양식일테지요. 그나마 마을의 풍경을 여유롭게 보여주는 것은 자유롭게 뛰놀고 있는 개 한 마리와 닭 한 마리입니다. 그리고 시멘트 마을길을 유유히 넘어가는 능구렁이 한 마리.

왕등도 마을은 청정해역인지라 활어들도 많이 잡히고 전복의 보고였으며, 키조개, 개조개, 해삼, 홍합 등이 많이 산출되어 왔습니다. 기름으로 동력을 삼는 통통배가 나오기 이전에는 섬 전체가 김과 김 포자로 둘러쌓였답니다. 오염되어 모두 사라진 것이지요. 제사상에 올리는 뜸부기도 많았었고요. 물 빠진 바위 틈에는 홍합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민들은 홍합을 채취해 육지 가족에게 내보냅니다. 산에는 흑염소와 토끼, 더덕과 둥글레와 약초들이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상왕등도 산에는 특이하게도, 뭍에서는 마을 언덕에서 많이 자라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냄새 고약한 나무들이 정상까지 차지하고 있습니다.

 

강건너 불구경인가, 희망인가

지금은 왕등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여덟에서 열 정도 됩니다. 그나마 여름에만 거주하고 겨울에는 부안, 전주, 익산 등 육지로 다 나옵니다. 겨울에는 춥고 여객선도 끊긴답니다. 옛날에 풍랑이 몰아칠 때는 위도에 배를 대피시켜야 했으니 사람 살기가 매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왕등도 사람들은 보통 집이 두 개인지라 두 살림을 합니다. 그러니 생활비가 더 들어갑니다. 왕등도의 삶에 애착을 갖는지 연로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도 섬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이들이 고깃배를 탈리는 없을테고 텃밭을 일구거나 홍합을 땁니다. 여든이 넘어선 한 할머니는 작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매우 야물딱지게 해변 바위에 붙은 홍합을 땁니다. “익산에 있는 집에 가지고 갈거여. 하루면 다 가는디 머. 여기서 평생을 살아 홍합 따는 것은 일도 아녀. 안빌려줄라고 허는디 사정사정해서 이거(홍합 따는 괭이같은 도구) 빌려 왔네.”

▲노령에도 야무지게 홍합을 따는 할머니
▲상왕등도 마을 사람들의 생명수 우물물이 각 가정으로 공급된다

왕등도에서 옛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많은 것들이, 그이들이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가버렸듯, 그이들의 삶의 흔적들도 모두 자연으로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이들의 해양문명은, 그 역사적 기록들마저도 거의 없고, 아주 단편적인 구두 이야기들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불을 지펴야 할 때는 복쟁이 애에서 나오는 어유를 썼답니다. 냄새는 무지 고약했고요. 초근목피 연명은 했어도 육지처럼 굶어죽지는 않았다는 왕등도 사람들, 그이들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언덕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우물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우물물은 마르지 않고 생명수처럼 쏟아져나옵니다. 우물 속으로 연결된 물 파이프들이 각 가정들을 향해 사방으로 뻗어 있습니다. 어쩌면 왕등도 마을은 적어도 이 우물물이 다 마를 때까지는 지속되겠지요. 물론 예전처럼 김 씼느라 양동이 들고 줄서는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밤이 이슥해지고 다음날 아침이 올 때까지 밤새도록 상왕등도 바로 앞바다에서는 상고선(商賈船)과 멀리서 온 고기잡이 배들이 불을 밝히며 파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불야성은 왕등도 사람들의 강건너 불구경일까요, 아니면 어떤 희망으로 다가올까요. 왕등도를 떠나며 던지는 질문입니다.

/고길섶 _문화비평가

* 이 글은 부안독립신문에 게재한 글을 수정·증량한 글입니다.
2007·10·26 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