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다리를 엽전으로 놓으려 했던 인동장씨

 

위도이야기

▲위도 벌금-정금 사이에 잠수교가 놓여 있다.

위도면 벌금리 조금치에서 정금으로 가는 길엔 긴 돌다리가 놓여져 있지요? 위도 팔경의 하나인 <정금취연>이란 정금의 밥 짓는 연기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모양인데요. 그런데 이 정금마을에 최초로 정착해서 살았던 성씨는 아마도 인동장씨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 재경위도향우회 회장님이기도 한 고 장복규 님의 설명에 따르면 장씨 집안에 큰 어른들이 서울에서 높은 벼슬을 하다 유배를 당해 위도로 내려 오셨다 하는데요. 그 옛날 정금에 정착하게 된 인동장씨 어른들은 청어의 산지이기도 한 위도에서 청어를 잡아 큰 돈을 모으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던지 벌금 조금치에서 정금으로 넘어가는 그 돌다리를 엽전으로 놓으려 했다지 뭡니까!? 정금 다리를 엽전으로 놓는다! 그거 참 대단한 부자가 아니면 그게 불가능한 일일텐데요. 하지만 결코 그 소리가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닌 듯 합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자면 정금에 유배를 온 사람은 장희빈의 숙부인 장찬이란 분인데요. 장찬이라는 분은 역관 출신으로 한성부윤, 그러니까 서울 부시장쯤 되는 벼슬을 했던 분입니다. 이 장찬이라는 분이 그리 좋은 이유는 아니지만 부득이 위도로 귀향살이를 오게 되었는데요. 정금에 정착하게 된 장찬이라는 분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땅을 자기 재산으로 불하 받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장찬이라는 분이 그랬는지, 아니면 그분의 후손들이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정금에 살던 어떤 장씨 어른은 청어잡이를 해서 떼돈을 모으게 됐답니다. 그래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던지, 부안고을에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쌀 천석(아니면 삼천석)을 기부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게 되는데요.

그 당시의 기록은 고 장복규님 집안에 현재 고문서로 남아 있답니다. 고 장복규님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게 떵떵거리고 사시던 집안 어른이 몰락하게 된 원인은 왕등으로 금을 캐러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일순간에 망하게 됐다고 하시는데요.

지금은 발전소가 들어서 있습니다만 그 옛날 파장금으로 넘어가던 고개에서 바라보면 노을이 질 때 왕등의 한 계곡에선 반짝이는 금빛이 보였다 하는데, 글쎄 정금의 장씨 부자는 배를 짓고 인부들을 모아 왕등으로 금 채굴을 떠났던 모양입니다.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바람에 정금 다리를 엽전으로 놓겠다고 했다는 인동 장씨 어른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생을 마감하게 됐다고 합니다. 정금 장씨 부자님의 전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치부할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장찬은 누구인가?
조선 숙종 때 역관…한성 부윤…장희빈의 종숙부. 숙종 18년(1689) 위도면 정금리로 유배. 지금 그의 후손들로는 위도의 인동 장씨들. 인동장씨들의 현재 선산… 정금마을에서 청어를 막으로 잡았다.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엽전으로 벌금리와 정금리 사이의 다리를 놓겠다 한 사람인데. 결국 쌀 천석을 내서 부안군민들을 구휼함.
그런데 이 장찬이 망하게 되는 원인은? 왕등도에 있는 금을 깨러가다가 바다 뒤집혔다하고 묘를 파장금에 놨다가 장복규씨가 파서 이장했다함. 그리고 이집 밭에 비석 같은 게 있었다는데 장복규씨도 작고하셨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1
숙종 22년2월7일(계사), 장령(掌令) 이민영(李敏英)·지평(持平)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위도(蝟島)에 정배한 죄인 장찬(張燦)은 백령(白翎)의 배소(配所)를 떠난 지 여섯 달이 되었는데도 중도에서 지체하니, 이런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찌 감히 이토록 법과 명을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장찬은 나문(拿問)하여 처치하고, 그 압송하는 서리(書吏)도 유사(攸司)를 시켜 가두어 죄주게 하소서. 장찬이 배소에 도착하였다는 서장(書狀)이 기한이 지나도 오지 않는데, 금부(禁府)에서는 깨달아 살펴서 처치하는 일이 없어서 죄인이 제 편한 대로 하게 하였고, 연로(沿路)의 각 고을과 그 도의 감사(監司)는 금부에 알리는 일이 없었으므로 게을리한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 금부의 당상(堂上)과 당해 감사·수령(守令)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이에 숙종은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끝의 세 가지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장찬은 장희재(張希載)의 종숙부(從叔父)인데, 이때 남구만(南九萬) 등이 장희재를 감쌌으므로, 그 겨레붙이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이렇게 법을 업신여겼다.

/서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