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창시절 부안읍 풍경

 

아쉽고 안타깝게도, 내가 어릴 적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던 우리 부안의 옛 모습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나는 희미하게나마 살아있는 기억을 되살리며 눈을 꼭 감고 60여 년 전으로 추억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빨강색 보면 폭탄 떨어트려”

나는 1945년 해방되던 해 읍내에서 2km쯤 떨어진 신운리(운기부락 또는 구름터)에서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우리집은 농사를 지었는데 어머니, 오빠 셋과 함께 살았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1950년에는 6‧25가 터졌다. 어느 날 우리 꼬맹이들은 여느 때와 똑같이 동네에 모여서 재미있게 놀았는데 갑자기 비행기 여러 대가 굉음과 함께 새카만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옆에 있던 언니가 “빨리 숨어!” 하면서 나더러 “너 그 빨강치마 벗어! 빨강색 보면 폭탄 떨어트려!” 하는데 너무 놀라서 빨강치마를 팬티 속에 집어넣고 창고 구석에 숨어서 벌벌 떨던 기억이 선하다. 지금도 비행기 소리가 나면 그때의 무서웠던 기억 때문에 몸이 움찔해지곤 한다.
우리 집은 담이 예뻤다. 지금은 대부분 시멘트 블록 담이지만 그때는 가시 돋친 탱자나무나 측백나무를 심기도 하고, 볏짚을 한줌 한줌 엮어 나래를 만들어 울타리를 치곤했었다. 우리 집 탱자나무 울타리는 봄에는 하얀 꽃이 예뻤고, 가을에는 노랗게 익은 탱자가 주렁주렁 열려 우리의 군것질 거리가 되기도 했다. 오후반 학교 갈 때는 탱자를 따서 친구들과 먹으며 등교하기도 했는데 맛은 지금 귤보다 신맛이 훨씬 강했다.

 

자갈투성이 도로와 등굣길

먼지 가득 날리던 자갈투성이의 도로도 기억에 생생하다. 트럭이 큰 돌덩어리를 도로 군데군데 부어놓으면 길가에 살던 분들이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기 전에 쇠망치를 들고 나와 돌덩어리를 모두 부숴 도로에 깔았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우리에게 이 자갈밭을 걷기란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었다. 차가 지나갈 때는 돌멩이가 튀어 위험하기까지 했고, 자갈이 부스러져 모래와 흙이 되면 차가 지날 때마다 먼지가 하얗게 날렸다. 그때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손으로 입을 막고 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렇게 집에 오면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는 도로에 반들반들한 바둑돌이 깔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작고 예쁜 돌들을 주워서 마당에 깔아놓고 모여앉아 공기돌 놀이를 하기도 했다.
신운리 우리 집에서 읍내 학교로 이어지는 등굣길은 애틋한 추억이 가득하다. 나는 이 길을 초 ‧ 중 ‧ 고 시절 내내 걸어 다녔는데, 오가는 길에 ‘구구단’이나 ‘조선왕조계보’, ‘웅변대회 원고’들을 모조리 외우곤 했다.
집을 나서면 곧 공동묘지를 지나야 했다. 지금은 큰 도로가 생겨 없어졌지만 현재 신운주유소 뒤편에 해당하는 그곳에는 지금도 고분 몇 기가 남아 으스스하다. 우리 동네엔 나까지 3명이 한 반이 되어 함께 다녔는데, 특히 운동회 연습 때문에 늦기라도 하는 날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꼭 잡고 노래를 크게 부르며 공동묘지 앞을 지나오곤 했다.

 

덕촌방죽과 영단 굴뚝

장승백이 언덕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덕촌’이라는 마을이 나타났다. 지금의 혜성병원 아래쪽 마을인데 그 앞에 ‘덕촌방죽’이 있었다. 지금은 수리시설(水利施設)이 잘 완비되어서 대부분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동네마다 크고 작은 방죽이 하나씩 있었다. 우리 집 옆 신운방죽에서 나는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봄, 여름에는 고기나 우렁도 잡았다. 투망을 방죽에 던져 고기를 잡던 둘째 오빠는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어느 해 겨울에는 막내오빠가 사촌오빠와 얼음판 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자전거와 함께 방죽 속에 빠진 일도 있었다. 빠져나온 것만 해도 대견한데, 위험한 짓을 했다고 혼날까봐 집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옆집에서 불을 피우고 옷을 말리던 오빠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덕촌방죽은 꽤 컸다. 여름 장마 때나 폭우가 쏟아질 때는 물이 도로까지 넘쳐 강물을 건너는 것 같았고, 겨울철 매서운 방죽 바람은 우리를 괴롭혔다. 하지만 방죽은 철마다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다. 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여름의 하늬바람과 가을의 산들바람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방죽을 비단결로 수놓았다. 저녁 별빛처럼 반짝이던 그 물결의 아름다움이란!
물가 주위에는 다양한 수초가 자랐는데 그 중에서도 ‘마름’은 지금도 손을 뻗으면 곧 닿을 듯 눈앞에 생생하다. 꽃도 예뻤지만 무딘 세모꼴 모양의 열매 또한 매우 탐스러웠다. 방죽 한가운데는 연꽃이 가득해서 꽃이 필 때는 장관을 이루었다. 꽃이 진 후에는 연밥을 따는 아저씨들 곁에서 한 알씩 얻어먹는 맛이 그렇게 고소할 수 없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지금도 시장에 연밥이 나오면 종종 사먹곤 하는데 그때 그 맛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방죽물은 봄에 모내기가 끝날 무렵이면 거의 바닥을 드러낸다. 물이 빠진 방죽이 고기잡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모습 또한 가관이다. ‘통발’로 바닥을 콕콕 찍어 고기를 가두어 잡는 사람, 소쿠리로 고기를 건지는 사람, 맨손으로 잡는 사람도 있었는데 고기는 붕어, 잉어, 메기 등 여러 종류의 민물고기가 잡혔다. 지금은 이 방죽 대부분이 논과 밭으로 바뀌었고 도로가에는 ‘부안 LPG 충전소’, ‘현대 판넬’ 창고, ‘부안 석재’ 등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덕촌방죽을 지나 읍내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지금 삼남중학교 뒤로 가는 길과 등기소 쪽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때는 ‘영단’ 쪽이라고 했다. 지금은 모두 철거되어 넓은 주차장이 되었지만 그때는 ‘식량영단(食糧營團)’이라는 정부양곡도정공장이 있었고 거기에는 빨강벽돌로 쌓아 올린 아주 높은 굴뚝이 있었다. 그 굴뚝을 처음 보았을 때 고개를 한껏 쳐들고 바라보며 “와, 높다!” 하고 감탄했었는데 오래전에 공장과 함께 철거되고 말았다.

부안극장의 추억

읍내로 들어서면 나타나는 ‘부안극장’은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지금의 ‘설악칡냉면’ 자리가 그곳인데 극장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있었고 그 앞이 초등학교 시절 등굣길이었다. 극장은 늘 흥미로웠다. 신작이 상영될 때마다 바뀌는 영화 간판 그림은 특히 감흥이 컸다. 간판그림만 보아도 슬픔이 솟구치거나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실감이 났다.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람을 하는 날은 소풍가는 날처럼 즐거웠다. “오늘 ◯시 수업 끝나면 영화보러 가니 운동장에 모여라.”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는 “와~~~” 하고 함성을 지르곤 했다. 나는 도금봉 주연의 ‘유관순’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몹시도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검정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수많은 군중의 맨 앞에 서서 ‘대한독립’을 외치다 일본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당할 때 우리는 모두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사도세자’라는 사극을 볼 때도 많이 울었다. 영화를 보다가 소리쳐 웃거나 박수치고, 펑펑 울기도 하던 순수하고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몰래 극장에 갔다가 단속 나오신 선생님과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고 적발될 때는 다음날 교무실로 등교해야만 했다.

 

본정통, 구 시장, 동아약국

극장을 지나 삼거리가 있었는데 오른쪽은 군청과 본정통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는 구 시장과 부안초등학교로 가는 길이 이어졌다. 지금은 삼거리의 건물들이 철거되어 넓은 공원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의 동아약국 앞이 시장의 큰 사거리였었다. 당시의 시장은 매우 비좁아서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떠들썩했었다.
지금도 옛 사거리 부근을 지날 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사거리 한 중앙에서 커다란 나무판을 목에 걸고 매일 “진짜 사카린이나 라이타 돌이요~” 하고 외치며 장사하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나는 그 아저씨를 볼 때마다 목판이 얼마나 무거울까, 저렇게 소리치면 목은 또 얼마나 아플까 하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아저씨는 사카린이나 라이타 돌 외에도 검정고무줄 같은 생활 소품도 팔았던 듯하다.
동아약국 옆으로 아이스께끼(지금의 아이스 바)를 만드는 조그만 가게 겸 공장이 있었다. 요즘은 마트에 가면 각양각색의 얼음과자가 계절과 상관없이 냉동고에 가득하지만 그때는 여름에만 팔았고 종류도 막대 얼음과자 딱 한 가지였다. 나는 여름이 되면 그 많은 얼음과자 중에서 ‘아이스 바’라고 쓰인 것을 골라 먹으며 지금까지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어느 아이스께끼 소년을 생각한다.

 

“시원한 얼음과자, 아이스께끼가 왔어요~~”

초여름 어느 날, 넓은 집 마당에 동네 어르신들 몇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며 보리 목을 따던 날이었다. 당시 보리나 벼는 ‘홀태’라는 농기구를 이용해 알곡을 수확했는데 보리는 ‘딴다’고 하고 벼는 ‘훑는다’고 했다. 그런데 보리는 껄끄런 수염이 알맹이마다 붙어있어 무더운 날에 보리 목 따는 작업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때 멀리서 “시원한 얼음과자, 아이스께끼가 왔어요~~” 하는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그 무렵은 아이스께끼를 네모난 나무통에 담아 어깨에 매고 주로 어린 소년들이 동네마다 다니면서 팔던 때였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아이스께끼 소년을 불러와 어른들과 함께 얼음과자를 하나씩 시원하게 먹고 다시 일을 한참동안 거들다가 문득 깜짝 놀랐다. 옆에 임자 없는 얼음과자통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냉 기술이 좋지 않던 그 시절, 나무통 안의 얼음과자는 쉬이 녹기 마련이어서 소년들의 등은 언제나 젖어있었고 물도 뚝뚝 떨어지곤 했었다. “아니, 통만 남겨놓고 소년은 도대체 어딜 갔을까?” 하고 궁금해 하던 차에 얼마나 지났을까, 땀으로 범벅이 된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너 어디 갔다 왔니?” 하고 물었더니 “읍내로 잔돈 바꾸러 갔다 왔어요.”라고 한다.
나는 그 소년의 얼굴만 바라보며 잠시 동안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은 읍내에서 2km 거리였는데 그 더위에 “잔돈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무려 왕복 4km를 뛰어서 다녀왔다니! 그때 그 소년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가끔은 가슴이 멍해지기도 한다.

 

계란을 돈으로 바꾸고

어릴 적 시장 풍경은 모두가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나무시장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구 시장에서 지금의 신 시장으로 넘어가는 길 쪽에 나무시장이 있었는데, 당시 변산에서도 나무를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나와 팔았다. 큰 바늘처럼 가느다란 솔잎을 긁어모아 만든 솔가리 뭉치는 요즘의 석유 드럼통만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만들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나무를 잘라 차곡차곡 쌓은 장작다발은 너무 가지런해서 땔감으로 쓰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구멍이 송송 뚫려 예쁜 참숯은 들고 가기 좋도록 가지런하게 줄에 엮여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나는 어머니 숯 심부름을 자주 했었다.
부안국민학교 도착 직전 왼쪽에 싸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계란을 돈으로 바꾸던 기억도 새롭다. 미술수업이 있는 날에는 도화지를 준비해야 했는데 집에 돈이 없을 때는 계란 1~2개를 이 싸전에 가지고 가서 돈으로 바꾸어 도화지를 사곤 했다. 이렇게 계란이 한 개 두 개 모여 넓고 동그란 망태에 산처럼 수북이 부어둔 쌀 위에 가지런히 쌓여 있던 계란들의 예쁜 모습도 기억에 선명하다.

 

‘태양사’ 사진관 아저씨

싸전을 지나 오른편에 있던 ‘태양사’ 사진관은 온통 추억의 보금자리이다. 사진 재료도 팔고 사진도 찍어주는 곳이었는데 사장님은 우리에게 인기 최고셨다. 우리는 그 무렵 온갖 핑계를 대고 성황산을 숱하게 올라 다녔다. 봄이면 벚꽃 보러, 여름이면 녹음이 푸르러서, 가을이면 낙엽 주우러, 겨울이면 눈이 좋다고 산에 오르곤 했는데, 산에 갈 때마다 태양사를 들러 “아저씨, 우리 성황산 가는 데요~”라고 말씀을 드리기만 하면 “응, 그래” 하시며 바쁜 일 모두 젖혀놓으신 채 카메라 챙겨들고 앞장서셨다. 이리 서라, 저리 서라 하시며 찰칵찰칵,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찍어주시려 애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종종 우리 뒤를 따라 산길을 오른 머슴아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자 역할도 맡아주셨다.
사진이 나오는 날, 태양사는 우리들의 수다로 온통 시끌벅적했다. 지금까지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는 소녀시절의 사진들 대부분은 아저씨의 작품이다. 성황산 입구에서, 벚나무 아래에서, 그리고 서답바위 빨래터에서도 우리는 사진을 찍었었다. 나는 아저씨의 성함을 최근에 알았다. 그분은 우리 친구의 작은아버지셨는데 바로 ‘신현복’(90세) 어르신이다. 자녀분들도 모두 잘 키우시고 지금은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며칠 전 친구와 함께 아저씨를 찾아뵈었는데 그때 모습 그대로 곱게 나이 드신 건강한 모습이셔서 더없이 반가웠다.

 

성황산 나무는 우리가 심은 것

예나 지금이나 성황산은 아름답지만, 당시는 수수한 자연 모습 그대로였다. 산에 오르는 길은 완전 풀밭이어서 개구쟁이 머슴아들은 풀과 풀을 묶어 장난을 쳤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는 채 종알거리고 걷다가 발에 걸려 넘어지곤 했지만 마냥 재미있어 했다. 지금은 온통 포장된 길을 따라 많은 편의시설이 들어서서 운치가 없어졌으나 당시는 엄마 품처럼 비할 바 없이 포근하고 따뜻한 쉼터였다.

 

대장간과 ‘솔메물방’ 그리고 ‘만복당’

태양사에서 두어 집 건너에 대장간이 있었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홀린 듯이 구경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뻘건 용광로 안에 시커먼 쇳덩어리를 넣고 풀무질 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를 두세 분의 아저씨가 커다란 쇠망치로 장단 맞춰 두드리는 모습은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무용선생님이 두 팔을 휘감으며 춤을 추는 듯, 음악선생님이 풍금으로 땡땡땡 반주하는 듯, 그 영롱한 모습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혼신을 다해 만든 철물들은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호미, 삽, 괭이, 낫, 인두 등 크고 작은 생활필수품들이었는데 그걸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비록 쇠붙이지만 거기에는 아저씨들의 땀과 정성이 배어있어 나한테 뭐라 속삭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대장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솔메물방’이라는 가게가 있었다. 제법 넓은 가게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거의 만물상이었다. 한쪽에서는 옷감 염색약을 팔았고, 반대편에서는 옷이랑 학용품 등 각종 잡동사니를 팔았다. 그때는 광목, 무명, 삼베, 모시, 명주 등의 천연섬유에 자신이 원하는 색감대로 직접 물을 들여서 사용하던 시절이었는데 이 가게에서 염색약을 사다가 썼다. 그 옆에 ‘만복당’이라는 완구점도 있었다.

 

부안국민학교

지금 부안초등학교 후문이 그때는 정문이었다. 학교 건물 뒷편에 정문이 있는 형편이어서 우리는 건물 뒤쪽을 보며 등교하였다. 학교는 동서 방향으로 뻗은 ‘한 일(一)자’ 형으로 앞에 한 동, 뒤에 한 동, 단층 2동이었다. 앞동 중앙에 교무실이 있었고 뒷동과 연결되는 복도문에 종이 매달려 있어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일 때는 땡, 땡, 땡 계속 치고, 수업시작 종은 두 번씩 땡땡~, 땡땡~, 끝종은 한 번씩 땡~, 땡~ 하고 울렸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보면 시작종을 못 들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선생님께서 “그만 놀고 들어와~” 하고 우리를 부르시곤 했었다. 쉬는 시간은 왜 그리도 짧았던지 늘 아쉽기만 하던 그 종소리가 그립고 그립다.
학교 동쪽에는 나무도 많아서 여름에는 놀기가 좋았다. 변소도 하나 동쪽에 있었는데 서쪽에 있는 것보다 규모가 컸다. 남녀 공용인 이 화장실은 건물이 여간 낡은 것이 아니었다. 나무 발판은 삐걱거렸고, 문은 잘 닫히지 않았으며, 깊이도 무척 깊어서 낭떠러지 느낌이 났기 때문에 정말 무섭기 짝이 없었다.
학교에는 우물이 두 개 있었는데 앞동과 뒷동 사이 중앙에 하나 있었고, 서쪽 끝에 또 하나가 있었다. 물도 많고 얕아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썼던 서쪽 우물과는 달리, 중앙에 있는 우물은 너무 깊어서 도르래를 매달아 물을 퍼 올렸다. 이 우물은 너무 깊어서 물이 아예 보이지 않고 컴컴했기 때문에 마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감이 들었다. 이 우물은 동쪽 변소와 함께 나의 기피 대상이었다.

 

그리운 선생님

당시 교장선생님은 엄성섭 선생님이셨다. 언제나 한복을 입고 복도를 오가며 공부하는 우리들을 지켜보시거나 운동장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을 보살피시곤 하셨다. 인자한 모습으로 교정을 돌아보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몇 분 선생님도 기억에 뚜렷하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허백균 선생님이셨다. 나는 키가 커서 늘 뒤에 앉았는데, 어느 날 수업시간에 칠판에 학습 내용을 적어놓으시고 뒤로 오셔서 “우리 경자는 공부 잘하니까 상을 주어야지”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나는 마음속으로 “상을 어떻게 들고 가지?” 하고 걱정을 했다. 밥 차려먹는 밥상인 줄 알았던 것이다.
5, 6학년 때의 담임은 김성 선생님이셨다. 사범학교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오셔서 5-4반 담임을 맡으셨는데 정말 열정적인 분이셨다. 특히 책을 많이 읽어주셨는데 숨소리를 죽여가며 ‘엄마찾아 삼만리’를 듣던 날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수업을 마치고 우리를 돌려보낸 뒤에 선생님은 언제나 칠판에 한문 몇 자와 고시조나 현대시 한 편씩을 적어두시고 아침 일찍 와서 외우라고 하셨다. 그때 한자를 제법 익혀서 직장 생활할 때도 한자에는 자신감이 생겼다.
5학년 때까지는 남녀 합반이었고, 6학년 때는 남자와 여자반이 따로 나뉘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수업을 하기도 했는데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부안국민학교는 큰 학교, 동국민학교는 작은 학교

당시 나는 웅변에 제법 솜씨가 있었다. 오빠와 함께 부안군 대표로 전북도청에서 열린 4H웅변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6학년 때는 재경부안향우회에서 주관한 제1회 부안군 국민학교대항 학생웅변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모든 학교 출전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1등을 차지했다. 그때 향우회 회장은 신규식 국회의원이었다. 내가 받은 우승기는 학교에 주고 나는 상장과 상품을 차지했다. 대회 장소는 지금 군청 뒤 공회당이었는데, 성황산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부안가정교회’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잠시 동국민학교 이야기를 적어야겠다. 동국민학교는 원래 부안국민학교 분교였는데, 내가 입학하던 해에 분립하여 동국민학교가 되었다. 입학 후 몇 달 안 되던 어느 날, 하루는 선생님들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우리들 이름을 불러가며 두 줄로 세우시더니 “이쪽 줄은 내일부터 저쪽 작은 학교로 가야 된다.”라고 하셨다. 그때는 부안국민학교를 큰 학교, 분교를 작은 학교라고 불렀었다. 이때 분립을 하면서 동국민학교 학생 전체가 똑같이 생긴 교복을 입고 다녀서 우리 학교와 구별이 되었다.

 

대림아파트 자리의 부안여중고 시절

이렇게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안여자중학교에 갔다. 지금의 대림아파트가 당시 중학교 자리였다. 학교 건물은 일제 때 소학교로 쓰던 낡은 판잣집이었지만 교문에 들어서면 ‘소나무 동산’이 첫눈에 들어왔다. 그 밑에는 잔디와 맥문동이라는 약초가 자랐다. 우리는 수업시간 외에는 대부분 소나무가 쭉쭉 곧게 뻗은 이 동산에서 지냈다. 꿈 많은 소녀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수다도 떨고, 혼자서 책을 읽거나 상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마침 교무실에서 음악이라도 틀어주면 동산은 그럴듯한 야외 음악감상실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소나무 동산을 우리 부안군민을 위한 휴식과 문화의 공원으로 만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엉뚱한 아쉬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정문 왼쪽에는 교장선생님 사택과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수질이 좋아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당시 중학교 교장선생님은 은성갑 선생님이셨는데 학생들 신상을 대부분 알고 계셨다. “너는 어디 사는 누구의 딸이지?”, “너희 아버지는 어디에 다니시지?” 묻곤 하셨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되던 1961년에 고맙게도 부안여고가 설립되어 무난하게 여고까지 졸업했다. 소나무 동산 뒤쪽에 여고 건물을 신축할 때는 우리들 손으로 벽돌을 나르기도 했다. 2층 건물이었는데 그때는 세상에서 우리 학교 건물이 최고처럼 좋아보였다.

 

부안은 삶의 모든 기억이 깃든 소중한 앨범

내 어릴 적 등하굣길을 따라가며 학창시절 추억의 여정을 대강 짚어보았다. 나는 이 글을 연필과 지우개, 원고용지를 이용하여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추억을 꾹꾹 눌러 적는 중이다. 사각사각 연필을 깎아 원고지를 빼곡하게 채워나가는 기분이 예나 지금이나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두서없는 글을 마치며 문득 꼭 감았던 눈을 떠보고 싶지만 눈을 뜨는 순간 이 소중한 기억들이 모조리 사라질까 두려워 차마 뜨고 싶지 않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있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갈 때도 나는 꼭 감은 눈을 뜨고 싶지 않다. 부안은 내 생의 보금자리이며 삶의 모든 기억이 깃든 소중한 앨범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추억의 여정을 함께 돌아봐 준 우리 친구들이 새삼 고맙다. 어릴 적부터 오늘까지 모든 기쁨과 애환을 오롯이 함께 해 온 벗들에게 큰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이경자(학교법인 낭주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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