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포김구선생묘역일원(止浦金坵先生墓域一圓)

 

• 종 목 : 전라북도 기념물 제127호
•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봉토묘
• 수량/면적 : 일원
• 지정(등록)일 : 2009.10.23
•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부안김씨문정공종중
• 관리자(관리단체) : 부안군

 

변산면 소재지인 지서리(知西里) 일대는 예전에 조수가 드나들던 포구마을로 땅이름은 지지포(知止浦)였다. 지금의 지서리는 평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평지말’이라 하였는데, 구한말?일제강점기 초에 간척으로 지지포가 없어지면서 지서리는 지지포의 서쪽마을, 지동리(知東里)는 동쪽마을, 지남리(知南里)는 남쪽마을이라 하여 생긴 이름들이다. 이는 지지포의 ‘知’에 뿌리를 두고 확대된 땅이름 생성의 예다.

지지포는 고려 명현 지포(止浦) 김구(金坵, 1211~1278)와 관계가 깊은 마을이다. 그의 호 지포는 이곳 지지포의 땅이름에서 취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행장(行狀)이나 신도비문(神道碑文) 등에 의하면 그가 말년에 이곳에 별서(別墅)를 짓고 후진을 가르치며 시와 거문고로 소요하였다고 한다<김형주의 ‘부안땅이름?마을이름속의 역사문화이야기’>. 지지포 안쪽 운산리(雲山里, 구루미)에는 ‘지포김구선생묘역일원(止浦金坵先生墓域一圓, 전라북도기념물 제127호)’과 그를 제사하는 재실 경지재(敬止齋)가 있다. 변산팔경 중의 일경인 ‘지포신경(止浦神景)’은 바로 이 서해의 포구마을 지지포와 지포(止浦)계곡, 또 지지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산수미와 어우러진 경관을 말한다.

그렇다면 김구는 누구인가.

부안이 낳은 최고의 인물 ‘김구’

김구는 부안이 낳은 역사상 최고(最古)의 인물이자, 부안에서 최초로 문정(文貞)이라는 시호(諡號 : 학문이나 덕행 충절이 있는 분에게 임금이 내리는 호)가 내려진 인물로 부안김씨들의 중시조이다. 그에 대한 행적은 <고려사(高麗史)>에 20여 회나 나타나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8회나 보이고, <세종실록>의 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사략(東國史略)>, <동국통감(東國通鑑)> 등 역사·지리서에 그의 공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김구의 자는 차산(次山), 첫 이름은 백일(百鎰)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을 잘 하고 하과(夏課, 향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여름에 일정한 과제로 글짓기를 하는 것)마다 동무들 중에 그보다 나은 자가 없으므로 모두 그가 과거에 장원할 것으로 여겼다. 12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22살 때인 1233년(고종 19)에 제2인으로 급제하니 지공거(知貢擧) 김인경(金仁鏡)이 제1인에 못 둔 것을 한탄하였다.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으로 임명되었는데, 고향 사람인 황각보(黃閣寶)가 그를 원망해 문벌의 흠집을 내어 유사에 고소하니, 권신 최이(崔怡)가 그의 재주를 무겁게 여겨 애써 구했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고쳐 임명했다.

뒤에 권직한림(權直翰林)으로 서장관(書狀官, 외교문서의 작성과 사절 일행의 감찰을 맡음)이 되어 원에 갔는데 <북정록(北征錄)>을 지어 세상에 퍼졌다. 한림원에 8년 있다가 당후관(堂後官, 추밀원 정7품관)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고,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옮겼다. 원종 4년(1263)에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서성의 정2품 벼슬)가 되고, 추밀원부사(樞密院 副使)?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吏部尙書), 참지정사(參知內史政事, 종2품 벼슬),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중서성의 정2품 벼슬)가 되었다.

곧은 소신의 정치가

김구는 성품이 질박하고 충실해 겉치레를 하지 않고 말이 적었으나, 국가의 일에는 절절이 바른 말을 하여 피하는 일이 없었다. 왕이 일찍이 성절(원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데 다루가치(원의 벼슬 이름)가 구실아치들을 데리고 오른쪽에 섰다. 그런데 내수(內竪, 내시內侍)인 상장군 강윤소가 다루가치에게 아부하여 또한 일당과 함께 몽고식 옷을 입고 곧바로 들어 와, 스스로 외국 사신에 빗대며 왕을 보고 인사도 하지 않다가, 왕이 절을 하자 함께 몽고식으로 절을 하였다. 왕은 성이 났으나 제어할 수가 없었고 유사도 감히 비난하지 못했으나, 김구가 강하게 탄핵하였다.

고려의 대문장가, 뛰어난 외교가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뛰어난 외교가였다. 한림원(翰林院)의 지제고(知制誥:왕의 명령을 글로 짓는 일을 맡아 하는 직책)를 맡아 하면서 원과의 외교문서를 담당했는데, 당시에 원이 무얼 요구하거나 꾸짖는 일이 없는 해가 없었는데, 김구가 탁월한 지략과 화려한 병려문체(騈儷文體: 변려문)의 표문(表文)을 지으면서는 일마다 하는 일이 다 이치에 맞으므로 원 황제의 회답에 “말이 간곡하고 사실에 맞으니 마땅히 허락해야 한다.” 하였다. 또 원의 한림학사 왕악(王?)은 그의 표문을 볼 때마다 반드시 좋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한 번 만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李奎報)는 최이(崔怡)가 “누가 공을 이어서 글을 맡을만한가.” 하고 물으니 “학유 최안(崔安)이 있고, 김구가 그 다음입니다.” 하였다. 그만큼 김구는 큰 문장가였다. 그런 그는 일찍이 신종(神宗)?희종(熙宗)?강종(康宗) 3대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탁월한 행정가, 제주 밭담 쌓기의 기원

그런가 하면 김구는 탁월한 행정가였다. 제주 밭담 쌓기의 기원은 김구에 의해서이다.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원진(1594~?)의 <탐라지>의 제주의 밭담에 대한 기록이다.

“취석축원(聚石築垣: 돌을 모아 담을 쌓았다). 동문감(東文鑑)에, (제주)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들어 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가 판관이 돼 주민의 고통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주민이 편하게 여겼다.”

밭담은 제주도에 흔하디흔한 검은 돌로 쌓은 돌담으로 밭과 밭, 밭과 길, 밭과 목장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勝覽)>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제주에는 “벼는 나지 않고 오직 보리·콩·조가 날 뿐”이었다. 그나마 마소가 많다보니 궁벽한 토지에 부족한 곡식 농사는 마소에 의한 피해가 많았고, 지방 토호들의 욕심이 커 민중의 피해가 심했다. 김구가 제주판관으로 있을 당시 제주는 중앙 권력과 상관없이 제주민은 토착 지배세력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 제주민은 성주가 조공하는 말, 귤, 해산물, 가죽 등의 방물(方物)을 공급해야 했으며, 또 그 지배세력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세금을 내야 했고, 애써 개간한 경작지를 빼앗기는 고통도 겪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 판관의 ‘밭담을 쌓아 소유권을 분명히 한 조치’는 중앙관리로서 지방 토착 세력자들에게 미움을 사는 행동임에 분명했다. 대개의 중앙 관리들이 지방 토호들과 밀착돼 가렴주구를 일삼는 것과는 달리 김구는 토착 세력이 아닌 제주 민중을 이롭게 했다는 점에서 그의 탁월한 행정능력과 의기(義氣)를 볼 수 있다.

충렬왕 4년(1278)에 죽으니 향연 68세였다. 왕이 “김구는 일찍이 평장사를 지냈으니 제문에 마땅히 평장사로 써야 한다”며, 관에서 장사를 챙기도록 하고, 시호를 내려 문정(文貞)이라 했다.

조선 중종(中宗)때에 고을의 선비들이 그를 추모하여, 부안읍 연곡리(扶安邑 蓮谷里)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세우고 주벽으로 모셨다. 부안읍 선은동에는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지은 유허비(遺墟碑)와 비각이 있다. 시문집(詩文集) <용루집(龍樓集)>과 기행문집인 <북정록(北征錄)>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실전되어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그의 문집 <지포집(止浦集>은 <고려사> 등에 수록되어 있는 96편의 글을 찾아내어 1801년(純祖 1)에 간행한 것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주 돌문화 상징 ‘밭담’의 역사적 기원-김유정』>

/허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