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실상사지(扶安實相寺址)

• 종 목 :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사찰
• 수량/면적 : 1,696㎡
• 지정(등록)일 : 1986.09.09
•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164
• 소유자(소유단체) : 실상사
• 관리자(관리단체) : 실상사

 

내소사(來蘇寺), 선계사(仙溪寺), 청림사(靑林寺)와 더불어 변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였던 실상사(實相寺)는 신라 689년(신문왕 9년)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창건하였고, 조선 제4대 세종 임금의 형인 효령대군의 원당이 되어 궁재로 중수하고, 또 숙종 때 영허선사(映虛禪師)가 중수하였다. 대웅전, 나한전, 요사, 산신각 등이 있었다고 하며, 대웅전 안에는 고려초기 작품인 불상과 고사경, 고인경, 화엄경소(華儼經疎) 등의 경판과 효령대군의 원문과 월인천강지곡 등 국보급 문화재들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원불교 창교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실상사 옆 실상초당에서 원불교 교법을 마련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육이오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1986년 9월 9일 실상사터와 그 주변 16,725㎡가 전라북도 기념물(제 77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1925년 3월 하순부터 50여 일에 걸쳐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의 내장산, 금산사, 변산 등지의 남한 각지를 여행하고, 1926년에 기행문 심춘순례(백운사 간)를 출간했는데, 아래는 내소사, 직소폭포를 지나 실상사를 둘러본 후 남긴 글이다.

“…곧 실상사가되니 영락한 지 오래다. 4대 사찰 중 으뜸이던 풍모는 겨우 그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모습으로 볼 뿐이다. 퍽 크게 만든 관음상인데 잘룩한 허릿매와 넓다란 옷자락과 너그럽고도 어우러진 모습이 고려조 초기의 것임이 의심이 없으며, 절에서 전하는 바로는 서역으로부터 배를 타고 원암 앞바다에 와 닿았는데, 처음 수상한 배가 들어오니 주민들이 다투어 붙잡으려 하였지만 속인에게는 물러나더니, 혜구두타가 나가니 저절로 달려들어 비로소 그 위에 앉으신 이 관음상을 모셔 내리고, 그로 인해 이곳을 석포(石浦)라고 일컫게 되었다 한다.

 수십 년 전까지도 당우가 여러 채 더 있고 불상도 오래된 것이 많았었는데, 집들은 불타 없어지고 부처는 많이 파손되어 이렇게 소잔하여졌다 한다. 그 중에서도 한 불상은 보화가 많이 들어있다 하여 일찍이 도적이 들었었다. 도적은 별다른 것이 나오지 않자 실망하고 돌아갔으나, 그 복장에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과 고사경(古寫經) 및 고인경(古印經)이 수백 권 나왔는데, 더러는 도난을 당하고 아직 남아 있는 대부분은 높이 쌓아 두고 있다. 대개는 해인본(海印本)의 제종경론(諸種經論)이요, 그 밖에 고려판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疎) 같은 희귀본도 몇 가지 끼어 있다. 이 밖에 법화경판목(法華經板木)이 불탁 한켠에 쌓여 있을 뿐이요, 다른 아무 불상이 없음은 미상불 소조한 생각이 든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도 실상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변산 가운데에 있다. 본조(조선) 세조 때에 중창하여 큰 절이 되었다. 절 북쪽에 또 부도암(浮屠菴)이 있다. 기준(奇遵)의 시가 전한다.

겹겹의 산봉우리 서쪽에 절 하나 있고
멀리 온 신선 같은 중이 숲속 좁은 길을 찾아 든다
물 찬 못에 햇빛 비치니 물고기 서로 희롱하고
푸른 나무에 가을 깊어지니 새 깃들이지 않는다
묏부리 그림자 누(樓)에 닿으니 절은 환하며 차갑고
샘에 비친 구름 전각(殿閣)에 잇닿아 불등(佛燈)이 흔들린다
향 타는 연기 아직 남았는데 중은 경(磬)을 울리고
옥 같이 둥근 이슬이 달 아래 환하다”

그동안 ‘육이오 전란 중에 소실되었다.’는 막연한 문헌기록만 접해 왔는데, 육이오 당시 변산 빨치산이었던 고 김영권 선생으로부터 실상사가 불탄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51년 여름, 빨치산 토벌대들은 사자동 실상사에 진을 치고 변산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고 한다. 그 당시 변산 빨치산은 병력도 많지 않고, 화력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변산 빨치산을 통틀어 총은 15정 정도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오랫동안 산 생활을 해 그곳 지형을 잘 아는데다. 높은 곳에서 아래의 적진을 훤히 내려다보며 싸우기 때문에 토벌대들은 빨치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빨지산에게 크게 패한 토벌대들은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퇴각했는데, 후미가 막 빠져나갈 무렵 실상사에 불길이 솟았다고 한다. 이때의 작전명은 ‘봉래구곡작전’이었다고 한다.

/허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