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 목 :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 수량/면적 : 1기
• 지정(등록)일 : 1983.08.24
•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567
• 소유자(소유단체) : 사유
• 관리자(관리단체) : 이계천
부안이 낳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이매창의 시세계
부안읍의 진산인 성황산에 있는 서림 공원 입구에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의 시비가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 시비에 적힌 시조>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그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음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 허경진 역 –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버렸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으므로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매창은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과 만나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贈癸娘 허경진 역>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自恨, 허경진 역>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그가 마음을 준 두 번째 남자는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까지 뛰어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마음이 끌렸음을 보여주는 허균(1569~1618)의 기록이 있다.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 지 서너 달 뒤였다.
신축년(1601) 7월 임자(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허균의 <조관기행> 가운데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더구나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보았다.
계생은 부안의 창녀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허균은 이 해 12월 형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에 병조정랑, 사복시정 등을 지냈으며, 1604년 수안 군수로 있던 중 파직당했다. 당시 수안의 악명 높은 토호 이방헌이란 자를 치죄하자 그의 아들이 황해 감사에 뇌물을 써서 감사가 허균을 추궁토록 했던 것이다. 1606년에 의홍위대호군(종3품 임시벼슬)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이듬해 삼척부사에 부임하였으나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파직당했다. 허균은 불경을 읽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내세웠다. 다음은 파직의 소식을 듣고 쓴 시이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이어라.
여지껏 아내를 내버리지 못했거든
고기를 금하기는 더욱 어려웠어라.
내 분수 벼슬과는 이미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할 건가.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문파관작(聞破官作)>
파직에 이어 허균은 홍문관 월과(月課)에서 아홉 번을 연이어 장원을 하였는데 이 덕으로 12월에 정3품 공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선조가 죽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8월에 다시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성품이 경박하고 무절제하다는 죄였다. 파직당한 허균은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와서 쉬었다.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愚磻)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 출신인 부사 김청(金淸)이 그 중 아름다운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는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지었다. 늘그막에 즐기며 쉴 곳을 마련해 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고 호남을 다니며 정사암의 아름다운 경치는 실컷 들었지만, 여지껏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평소부터 영화와 이욕을 즐기지 않았는지라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올해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고, 장차 우반이란 곳에 묻혀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사에 급제한 김공의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너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공께서 다시 수리하시고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뻤다. 즉시 고달부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말고삐를 가즈런히 하여 그곳에 가보았다.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가자 시냇물이 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풀덤불 속으로 쏟아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 들어갔더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론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다.
–중략–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늙은 당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하략–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
매창은 허균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을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12월에 정3품 승문원 판교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무렵 매창과 가깝게 지낸 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매창이 그를 그리며 비석 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山 )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두고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났다. 다음은 이 소식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기유년(1609) 정월 허균
매창을 잊지 못하는 허균은 또 편지를 보냈다. 다음 편지에서 매창에 대해 연인이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허균
이듬해(1610) 여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哀桂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그가 죽은 후 45년 후(1655)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그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후 세월이 지나 그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서로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에도 그들은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고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 사람들은 그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묘는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그가 간지 3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찾아온 한 시인은 그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뜸’ 전문 이 병 기
1974년 4월 27일 매창기념사업회(회장 김태수)에서 성황산 기슭 서림공원 입구에 매창의 시비(詩碑)를 세웠다. 이 곳은 선화당 후원으로 매창이 자주 불려가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했던 곳이다. 글씨는 송지영님이 썼다.
/허정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