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 목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1호
• 지정(등록)일 : 1987.12.31
•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319
• 관리자(관리단체) : 부안군
부안농악은 우도가락인 부안지방의 유일한 농악보존회이다. 부안은 김바우걸립패 이후 판굿을 벌일만한 농악단이 없었다. 이 무렵 설장구의 기능보유자이자 우도농악의 제1인자이기도 했던 고 이동원 선생이 50여년의 세월동안 익혀온 우도가락을 부안지방에 보급하여 1983년 전국대회 우승과 1986년 제4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부터 부안농악의 전통이 다시 살아나 1987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1호(상쇠예능보유자 라모녀羅摸女)로 지정되었다. 상쇠예능보유자 라모녀 선생의 쇠가락과 부포놀이를 바탕으로 한 상쇠춤은 짜임새가 다양하고 기교가 넘쳐 달관한 경지를 보이며, 부안농악가락은 호남우도농악 가운데서도 잽이들이 기준 장단 안에서 제각기 기량을 발휘하기 때문에 더욱 섬세하고 멋스러운 농악이라는 평을 듣는다.
부안농악의 쇠가락에는 삼채, 국서리, 두마치, 오채질가락, 오방진가락, 호호굿가락, 도둑잡이가락 등이 있으며, 굿형은 뭇굿, 도둑잽이굿, 당산굿(이사굿), 고사굿, 들굿 등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농악단은 꽹과리 3 또는 4인, 징 2인, 북 2 또는 3인, 장구 3 또는 4인, 고깔소고 10∼15, 채상소고 10인, 나무나팔 1인, 기수 3인(농기 1, 영기 2), 잡색 4인(대포수, 조리중, 양반, 각시)으로 편성된다.
부안농악 상쇠예능보유자 라모녀
부안농악 상쇠예능보유자 라모녀는 1941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7세 때 광주로 이사해 살았다. 성장하면서 임춘앵 창극단 공연을 보고 이에 반한 선생은 1954년(14세) 광주국악원에 입단해 정광수(丁珖秀)에게 판소리 춘향가를, 그 이듬해에는 남원국악원에서 김영운에게 판소리 춘향가 후편을, 김재옥(金在玉)에게 우도 쇠가락을, 1957년(17세)에는 강도근에게 흥보가를 사사받았다.
이후 1961년까지 남원여성농악단과 춘향여성농악단에 소속되어 전국을 돌면서 농악공연을 했으며, 남원여성농악단이 전국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서 상쇠를 맡은 선생의 진가도 아울러 높아졌다.
1961년에는 전주 사는 장금동(張錦東)과 결혼하면서 생활근거지를 전주로 옮겼다. 그리고 김동준(金東俊)에게 심청가를, 홍정탁(洪正鐸)에게 수궁가를 사사받았으며 다시 아리랑여성농악단 상쇠로 활동했다.
이후 1978년(38세)까지 이순태, 장금동, 이방근 등이 운영한 전주여성농악단과 이수복이 이끄는 호남여성농악단, 권일상이 만든 정읍여성농악단, 이정범이 만든 한미여성농악단 등에서 상쇠로 활동했으며, 1985년에는 이리농악단 상쇠로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강릉) 했다.
1987년 12월 31일에는 부안농악이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무렵 라모녀는 부안농악단의 상쇠로 활동했기 때문에 ‘부안농악 상쇠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그해 전라북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2001년까지 전북도립국악원 교수로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상쇠는 쇠가락으로 농악대를 총지휘하는 한편 부포짓으로 그 농악의 얼굴을 상징하는데, 라모녀 선생의 기예는 폭넓고 튼튼한 바탕 위에 상쇠가락과 부포놀이가 정립된 것으로, 춤사위나 그 짜임새가 매우 다양하고 기교가 넘치며, 쇠소리는 신과 영이 감동하는 소리라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전라도 특유의 춤사위를 완전 소화하여 거기에 다양한 기교가 넘치는 상쇠가락에 자신 있게 발산하는 생동감 등이 절묘한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이렇듯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전라도 가락의 맥을 잇고 있는 라모녀 선생은 80을 바라보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제자 양성에 열정을 쏟고 있다.
우도가락 설장고의 명인 이동원
1922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태어난 이동원은 10~14세 무렵에 이웃에 살던 신쾌동에게 장고가락을 사사 받았다. 그 뒤 15~17세 때에는 당시 장고의 왕으로 불리던 정읍의 김홍집에게 장고가락을 사사 받고, 김승길로부터 후두가락을 이어 받았다.
그 뒤 1940년대 상쇠의 명인 김바우가 소속해 있던 ‘김대근 단체’의 설장고, 정읍 김홍집풍물패의 끝장고로 활동했다.
1950년대에는 부안의 상쇠 김경천?박남석풍물패의 장고, 정읍의 상쇠 김광락(김광래)풍물패에서 이봉문의 부장고, 고창의 상쇠 박성근풍물패와 신두옥풍물패에서 최막동과 함께 활동했다.
이어 1950년대 후반 부안의 김경천, 박남식과 함께 부안여성농악대를 창단하여 김영숙, 유정애 등의 장구명인을 길러냈으며, 전남 여수 임재식, 김제 박판금, 김형순 이리농악단장 등 명인을 배출한 바 있다.
1961년에는 전국민속경연대회(덕수궁대회)에서 전라북도 농악대 부장고로 출전하여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1977년에는 제4회 전북농악대회에서 부안농악대를 인솔, 설장고 개인연기상을 수상하였다.
1977년에는 전경환, 이옥란, 임판식, 전경식, 황규언, 영광굿패와 일본 공연을 했다.
1978년에는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주최로 문화체육관에서 호남우도농악 발표회를 가졌으며, 1979년은 이화여대 강당에서, 1981년에는 국립국악학교호남우도전통농악 발표회를 가졌다.
1982년에는 전북농악경연대회에서 부안상서농악을 지도하여 최우수상, 1986년에는 전국대사습대회 농악부분 차상 수상. 전라예술제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87년에는 호남우도농악 구술구연고증을 채록 정리하여 부안 두레 풍장굿을 40년 만에 재현했으며, 1988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지정(설장고). 부안군 문화장을 수상했다.
1990년 3월 26일 타계하였다.
부안풍물굿의 전설 김바우
부안풍물굿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김바우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없으나 부안풍물굿 꽹가리 계보 중에서는 가장 상위 권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1896년경에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서 태어나 육이오 직후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바우가 아들과 함께 이끄는 풍물패가 있었는데, 흔히 ‘김대근단체’라고 했으며, 김대근은 김바우의 아들이다. 이 단체는 처음 상쇠에 김바우, 부쇠에 김명곤, 수장고에 김대근, 부장고에 이명식이었다고 한다. 당시 소고는 채상소고가 아니었으므로 소고잽이, 징잽이 및 그밖에 치배들은 대개 현지 마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김대근단체’는 항시 공연하는 것이 아니고, 여름철 두레풍장, 꽃대림/굴맥이, 겨울철 지신밟기, 그 밖의 걸립과 같은 일들이 생기면 그 일에 따라 불려가서 굿을 치고, 그런 일들이 없을 때는 각자 헤어져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전설적인 꽹가리 명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김바우는 쇠 잘 치기로 전라도 일대에 소문난 명인으로 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난장 포장걸립에도 빈번하게 뽑혀 다닌 이른바 뜬쇠였다. 한편 그의 아들 김대근은 장구의 달인이었는데, 부자간에 쇠 치고 장구 치고 게다가 김대근의 아들을 무등 태워 꽃나부풍장을 쳐대면 굿판의 신명은 절정에 달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굿을 치면 “아버지가 액상해서(안쓰러워서) 아들이 느꿔줬다.”고 한다.
그 시절에 이웃한 진서면에도 김명근이라는 상쇠가 있었는데, 김바우의 아들 김대근하고 둘이 굿을 치면 “내 아버지 아니고 내 아들 아닝게 굿을 그냥 들어 부쉈다.”고 할 정도로 정신없이 몰아쳤다고 한다.
<참고문헌/풍물굿 부안-부안풍물굿보존회>
/허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