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사응진전16나한상(開巖寺應眞殿16羅漢像)

• 종 목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 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나한상
• 수량/면적 : 16구
• 지정(등록)일 : 2000.03.31
•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714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개암사
• 관리자(관리단체) : 개암사

개암사 응진전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봉안하고, 그 좌우로 다양한 자세를 취한 16나한을 모셨는데, 각자 재미있는 표정들을 하고 있다.

개암사에 전해 내려오는『발원기』와『사적기』등의 기록에 의하면 이 나한상은 조선 숙종 3년(1677)에 조성한 것으로 각각의 나한이 지닌 단아한 형태와 부드러운 양감 등은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한의 전체 높이는 대략 92cm에서 98cm 사이, 옷은 최근에 색칠한 것이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약칭으로 최고의 깨달음(이것을 ‘아라한과’라고 한다)을 얻은 성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소승불교에서 수행을 완성한 사람을 이르며, 대승불교의 보살과 비교할 수 있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부처나 보살 못지않게 공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어서 대개 나한전이라는 전각에 모셔진다. 나한은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며, 진리와 함께한다 해서 응진(應眞),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해서 무학(無學)이라고도 부른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를 중심으로 좌우에 부처의 제자 등 나한에 이른 이들이 봉안된다. 10명 또는 16명, 많게는 5백 제자를 모시기도 한다. 5백 나한을 모신 것은 부처가 입멸한 후 그의 가르침을 정리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하였을 때 5백 명의 제자가 모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나한의 얼굴을 보면 우리 인간의 모습과 닮아 있고 특히 해학적인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자세도 비교적 자유로워서 다른 불상과는 큰 대조를 이루는데 바위에 앉거나 팔을 괴고 쉬는 자세, 선 자세 등이 많은 편이다. 얼굴 표정도 가지각색이다. 눈을 내리뜨고 참선하는 얼굴, 찡그린 얼굴, 미소 짓는 얼굴, 환하게 웃는 얼굴 등 인간의 다양한 내면을 표현하고 있어서 친근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나한상은 육조(六朝)시대부터 그림으로 그려졌고, 당대(唐代)에는 현장(玄裝)에 의해 《법주기法住記》가 번역됨으로써 16나한의 신앙이 시작되었다. 이 경전에는 16나한의 명칭과 주소, 권속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십팔나한, 오백나한을 비롯하여 중국적 해석에 의해 여러 가지 변화형식이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16나한, 500나한이 주로 나한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석왕사를 세워서 500나한을 봉안하기로 하고 하루 한 상씩 옮기며 500일 동안 기도하였는데, 나한의 영험 때문인지 마침내 그는 조선을 개국하여 왕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불교를 억압하였던 조선시대에도 나한신앙은 매우 성행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나한 유물 중에는 16나한에 관한 것들이 가장 많다.

『입대승론』에는 부처가 입멸할 때 16나한들에게 불멸(佛滅) 후 불교를 지키고 유지할 것을 부촉하였다고 전한다. 이 16나한들은 삼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으며, 신통력으로 자신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부처의 진리가 지켜지는 시대, 즉 정법기(正法期)에는 불교를 지키고, 불교의 이상과 실현이 없는 말법기(末法期)에는 불교인들의 복전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16나한의 이름은 빈두로 바바라타사·가락가발사·가라가바리타사·소빈타·낙구라·발타라·가리가·벌사라불다라·술박가·반탁가·라후라·나가사나·인게라·벌라바사·아시다·주다반탁가이다. 

<참고문헌:[네이버 지식백과] 나한상 (한국의 박물관: 불교, 2000.4.20, 문예마당)>

/허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