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설전(浮雪傳)

• 종 목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0호
• 분 류 : 기록유산 / 문서류/ 민간문서/ 기타류
• 수량/면적 : 1책
• 지정(등록)일 : 1992.06.20
•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산96-1
• 소유자(소유단체) : 월명암
• 관리자(관리단체) : 월명암

 

변산 제2봉인 쌍선봉(雙仙峰 498m) 아래 산상(山上)에 자리한 월명암은 신라 신문왕 11년(691년)에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창하였고, 1863년(철종 14)에는 성암화상(性庵和尙)이 크게 고쳐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나 한말에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과 싸울 때인 1908년에 다시 불타버리자 학명선사(鶴鳴禪師)가 1915년경부터 이곳에 주석하며 만허(滿虛) 등과 함께 중건하였다. 6.25전란으로 또다시 소실되자 월인화상(月印和尙)이 1955년 본당과 요사채 1동을 수축하였고, 이마저 13년의 노후로 도괴 직전에 놓인 것을 종흥수좌(宗興首座)가 1983년 본당은 물론 요사채도 다시 확장 수축하였다.

월명암은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여기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한곳으로 대둔산의 태고사(太古寺), 백암산의 운문암(雲門庵)과 함께 호남의 3대 영지(靈地)로 손꼽힌다. 무쟁처(無諍處)란 범어(梵語)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적정처(寂靜處)라고도 하며, 수행자들이 수행하기 좋은 고요한 숲 같은 곳을 말한다. 그런데 무쟁처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이르기도 하지만, 내면의 대립과 갈등, 시비와 분별을 내려놓고 수행에만 정진해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을 수 있는 그 자리를 무쟁처라고 한다.

월명암에 오르면,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또 지리학에 문외한인 보통의 사람이라도 범상치 않은 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변산의 만악천봉萬嶽千峰이 발아래 펼쳐져 경승을 이루는데, 특히 이른 아침 떠오르는 해와 골골마다 자욱한 구름바다가 어우러진 비경을 연출한다. 이러한 경을 ‘월명무애(月明霧靄)’라고 하며, 월명무애는 변산팔경 중의 일경이다. 또한 월명암의 주산인 쌍선봉(雙仙峰)에 오르면 서해바다가 한 눈에 전개되는데, 마지막 정열을 불태운 불구슬이 진홍으로 물든 바다 속으로 빠지는 변산의 ‘서해낙조(西海落潮)’는 예부터 낙산의 동해일출과 함께 비경으로 꼽았다. 변산의 서해낙조 역시 변산팔경 중의 일경이다.

월명암 터는 신선들이 모여앉아 담론을 펴는 형세라고 한다. 그렇다면 월명암의 주산이 쌍선봉인 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은 것 같다. 쌍선봉은 원래 법왕봉(法王峰)과 귀왕봉(鬼王峰)이라 불렸는데. 후에 두 신선(神仙) 설화에 의해 쌍선봉(雙仙峰)으로 바뀐 것이다.

이와 같은 영지(靈地)에 터를 잡은 부설거사(浮雪居士)는 속인으로서 재가성도(在家成道)한 인물로 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 중국의 방거사(龐居士)와 더불어 세계 불교 3대 거사로서 흠모와 존숭을 받아왔다.

월명암에는 부설거사의 행적을 소설형식으로 기록한 연대와 작자 미상의 「부설전(浮雪傳,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40호)」이 전한다. 내용은 부설거사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행적과 그가 쓴 4부시(賦詩), 그리고 8죽송(竹頌)으로 되어 있는데 4부시와 8죽송의 글씨체가 서로 다르다. 한지 7장을 1면으로하여 총 15면으로 되어 있으며, 1면은 10행이고 매행은 14자이다. 총 2,616자이다.

부설전에 의하면 부설의 속세의 이름은 진광세(陳光世)이며, 신라 진덕여왕이 즉위하던 해 수도인 서라벌 남쪽 항아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일찍이 불국사 원정선사(圓淨禪師)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도반과 더불어 길을 떠나 변산에서 수도하다가 더 큰 공부를 위하여 오대산을 찾아 가던 도중, 만경현 백련지(白蓮池) 옆(현재의 김제 성덕면 고현리)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하룻밤 여장을 풀게 되었다.

구씨에게는 십팔 세의 묘화(妙花)라는 벙어리 딸이 있었는데, 부설을 보고는 갑자기 말문이 열렸다. 묘화는 부설과의 삼생연분(三生緣分)이 있다며 죽기를 한하고 부부의 인연을 맺기를 원하자 부설은 “자작자수(自作自受)와 인(因)으로 하여금 과가 따르는 법이며 나를 만나기 위하여 20년을 벙어리로 지낸 묘화를 어찌할 수 없다.”며 묘화의 청을 받아드려 파계(破戒)하고 그녀와 혼인하였다. 영희, 영조는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떠나고 부설 부부는 그곳에 머물며 재가수도(在家修道)에 정진했다.

훗날 영조, 영희가 부설을 찾아와 희롱적인 태도를 보이자 부설이 “우리 셋의 공부의 생숙(生熟)을 시험하여 보자”면서 병 3개에 물을 담아 보에 매달고는 각자 하나씩 깨뜨리기로 했다. 영조와 영희가 병을 때리자 병이 깨지면서 물이 쏟아져버렸다. 그러나 부설이 때린 병은 깨어졌어도 물은 보에 매달려 있었다.

이때 부설은 두 도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몸에 본성의 진상이 나타나니 生과 滅에 얽매이지 않는다. 무상한 환신이 삶과 죽음을 따라서 옮겨 흐르는 것은 병이 깨어져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진성은 본래 신령하여 밝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은 물이 공중에 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들이 두루 높은 지식 있는 이를 찾아보았고 오랫동안 총림(叢林, 사찰)에서 세월을 보냈는데 어찌하여 생과 멸을 섭수(攝受)하며 진상(眞常)을 삼고 환화(幻化)를 공(空)으로 하여 법성(法性)을 지키지 못하는가. 다가오는 업에 자유가 없음을 증험하고저 할진대 상심이 평등한가. 평등하지 못한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미 그러하지 못하니 지난날의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자는 경계는 어디로 갔다는 것이며 함께 행하자는 맹서는 아득히 멀구나…“

이러한 부설거사의 언행에 영조와 영희는 부설 앞에 예배하고 견성하였음을 흠모하고 법설을 청하였다고 한다. 부설의 파계는 영조와 영희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승적(小乘的) 음계(?戒)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타적(利他的)으로 차별 없이 모든 중생을 포용하는 대승적(大乘的) 불교관(佛敎觀)이었던 것이다.

부설거사와 묘화부인은 등운(登雲)과 월명(月明) 남매를 낳았는데, 변산에 월명암(月明庵)과 등운암(登雲庵)을 지어 두 자녀를 출가위승(出家爲僧)케 해 모두 성도(成道)하였다. 묘화부인은 백세의 장수를 누리며 갖은 이적의 도력을 발휘하였고, 또 등운은 충청도 계룡산으로 가서 그곳에서 일대선풍(一大禪風)을 드날렸으며, 월명은 이 자리에서 육신등공(肉身登空)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월명암은 파계의 원죄가 있는 부설과 그의 일가족이 소승적인 계율(戒律)에 얽매이지 않고 대승적으로 차별 없는 평등의 중생구제 사상을 구현하여 재가성도(在家成道)한 부설일가(浮雪一家)의 영적(靈蹟)이다. 월명암에서는 부설일가 외에도 많은 스님들이 큰 도를 이루었다. 월명암에 전하는 승전설화(僧傳說話)에 의하면, 이곳 월명암에서 四聖, 八賢, 十二法師가 난다고 했는데, 四聖은 부설, 묘화, 등운, 월명 등 부설거사의 일가족 4권속으로 이미 나타났고, 八賢 중 誠菴, 行菴, 鶴鳴스님의 三賢이 났다. 전설대로라면 앞으로 五賢과 十二法師가 더 날 것이므로 기대가 된다.

/허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