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 목 : 보물 제292호
• 명 칭 : 부안 개암사 대웅전 (扶安 開岩寺 大雄殿)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 수량/면적 : 1동
• 지정(등록)일 : 1963.01.21
•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개암로 248 (감교리)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개암사
• 관리자(관리단체) : 개암사
변산의 울금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개암사는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묘련왕사(妙蓮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개암사에 전해져 오고 있는 개암사지(開巖寺誌) 의하면 개암이라는 이름은 마한의 효왕 282년(기원전 282년)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의 전각을 짓게 하고 동은 묘암(妙岩), 서는 개암(開巖)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년(1314)에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이곳에 와서 절을 다시 지어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36년(인조 14)에 계효대선사(繼孝大禪師)가 임란 때 불에 탄 자리에 중건을 시작했으나 끝내지 못하고, 1658년(효종 9년)에 밀영(密英)과 혜징(惠澄) 두 선사가 이 사업을 계승하여 완성하였는데 지금의 대웅전 건물은 이때 지어졌다. 그 후 1783년(정조 7년)에 중수를 거친 다음 몇 차례의 중·재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암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가공된 장대석(長台石)과 할석(割石) 등을 사용하여 구성한 기단 위에 남향으로 앉혔다. 건물 정면중앙부에 계단을 설치했다. 건물의 기둥은 규모에 비해 굵은 민흘림기둥이며 우주(隅柱)는 더 굵다.
건물 전면 중앙칸에는 4분합(四分閤)의 정자문살을, 좌·우칸에는 같은 형식의 문을 3짝씩 달고, 옆면에는 전면의 문 좌?우에 각각 외짝문 출입구를 만들었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3출목(內外三出目)으로서 공간포를 중앙칸에는 3개소, 좌우칸에는 2개소씩 다채롭게 구성하였으며, 공포의 일부 조각이 힘 있게 처리되어 장중함을 느끼게 한다.
건물 내부는 충량머리(衝樑頭)와 공포 살미끝에 용머리, 봉황머리를 조각하였고, 그리고 충량의 양두(樑頭)에는 보주를 문 용머리를 조각하여 대량(大樑) 너머로 목을 뻗치고 있고, 공포내부 살미 끝도 모두 작은 용머리와 봉황머리를 새겼고, 닫집 안에 다섯 마리의 용이 석가모니불을 호위하고 있어 용두당이라는 느낌을 준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후면 어간 두 기둥선과 맞추어 두 개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여기에 불벽을 만들었다. 천정은 종보 위부터 우물천정을 가설하였고 불단 위에는 정자각(丁字閣) 형태로 된 화려한 닫집을 따로 설치하여 세련미를 더해준다.
전면 처마 밑에는 2구의 귀면상을 배치해 법당을 지키는 벽사상으로 삼았다. 귀면상의 전체적인 인상은 용과 비슷하며, 네모에 가깝고 모두 뿔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시선을 보면 왼쪽의 것은 정면을, 오른쪽의 것은 눈을 흘겨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귀면상의 연원은 인도 불교사원의 키르티무카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인도의 고대 신인 시바의 성소와 불교사원에서 흔하게 마주치게 되는 장식용 벽사의 탈이다. 그 모습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귀면상의 양상과 전체적인 인상이 매우 닮았다. 범어로 이것을 키르티무카(Kirttimukha)라고 하는데, 이는 키르티(Kirtti)의 합성어로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시바신의 무서운 측면을 표현한 것으로 사악한 자를 물리치고 참배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개암사 대웅전의 건축양식은 백제의 안정감, 조선중기 다포의 장중함, 조선후기의 장식적인 경향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참고문헌: 문화재지-전라북도> <참고문헌: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허균>
개암사 대웅보전 ‘귀면’
개암사 대웅보전은 건물 전체가 보물덩어리이다. 내부를 들여다보노라면 이게 법당인지 대형 공예품인지 착각하게 된다. 건물 외부도 그렇다. 그 중에서 대웅보전 전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마 밑에 2구의 귀면상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전체 모습이 네모에 가까운 조각품인데 시선을 보면 왼쪽의 것은 정면을, 오른쪽의 것은 눈을 흘겨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악한 무리를 경계하는 벽사의 화신
사찰 법당의 안팎에서 흔히 다리도 없고 팔도 없고 몸뚱이도 없는, 오직 얼굴만 보이는 물상을 만나볼 수 있다. 주로 법당 전면 문짝의 궁창이나 처마 밑, 기둥머리, 창방, 평방, 불단 등에 장식되며 그림이나 목각(木刻)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 물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눈은 반구형으로 돌출되었고 코는 중앙에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며 높이 솟아 콧구멍이 드러나 있다. 귀와 수염, 머리카락을 갖추고 있으며 눈 위쪽 좌우에는 큰 뿔이 솟아 있다. 입을 크게 벌려 커다란 치아를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아래위로 나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압적인 인상을 준다.
전체적인 인상이 용과 비슷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용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연꽃이나 당초(唐草) 등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 물상을 용으로 단정해버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용은 여의주 이외에 다른 것을 입에 물고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찰에 보이는 이 물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인도 불교사원의 키르티무카에서 그 연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다양한 시선으로 사찰을 지키는 벽사상
인도 고대의 신인 시바의 성소와 불교사원에 가보면 흔히 마주치게 되는 장식용 벽사의 탈이 있다. 그 모습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귀면상의 전체적인 인상과 매우 닮았다. 범어로 이것을 키르티무카(Kirttimukha)라고 하는데, 키르티(Kirtti)와 무카(mukha)의 합성어로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시바신의 무서운 측면을 표현한 것으로, 사악한 자를 물리치고 참배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인도 불교 사원의 하나인 아잔타 석굴 사원의 제1굴 정면 기둥 위와 왼쪽 회랑의 기둥에 키르티무카상이 새겨져 있다. 이 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면상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실에 꿴 진주 다발 같은 장식물을 입에 물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이 키르티무카란 존재는 인도의 고대신화에서 태어났다.
인도 고대신화에 의하면 쟐란다라(Jalandhara)라는 거인 왕이 있었는데, 그는 다른 영역의 신들에 대항하여 그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다. 쟐란다라는 극도에 달한 자존심으로 세계의 창조자이고 유지자이며 파괴자이기도 한 시바에게 도전하여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전령을 보냈는데, 그 이름은 괴물 라후(Rahu)였다.
시바에게 전해진 최후통첩은 시바의 신부가 될 ‘온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포기하고 새 주인 쟐란다라에게 그 처녀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시바는 크게 화를 내며 응수하였다. 양미간의 점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뿜어냈는데, 그것이 폭발하면서 곧바로 끔찍한 사자머리 형상의 악마로 변하였다. 그 악마는 바로 시바가 다른 모습으로 화한 분노의 피조물이었다.
이 괴물의 놀라운 몸뚱이는 깡마르고 야위었으며, 쉽게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굶주려 있었지만 강한 탄력과 불굴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목구멍에선 천둥같이 으르릉 거리는 소리가 울려나왔으며, 눈은 불같이 타올랐고, 텁수룩한 갈기는 우주 공간에 널리 펼쳐졌다. 이 모습을 본 라후는 아연 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괴물이 라후에게 덤벼들자 라후는 최후의 수단으로 전능한 시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비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피신하였다. 이것은 매우 새로운 상황을 불러일으켰다 시바는 즉각 사자 머리 형상의 괴물에게 명하여 탄원자를 살려주라고 하였고, 괴물은 시바에게 자신의 굶주림의 고통을 가라앉혀줄 희생물을 달라고 강요하였다.
시바는 괴물에게 시바 자신의 손과 발을 먹으라고 제안했다. 타고난 굶주림에 지쳐 있던 괴물은 정신없이 먹고 또 먹었다. 손과 발을 삼켜버렸을 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를 삼키고도 그칠 줄을 몰랐다. 급기야 그의 이빨은 자신의 배와 가슴과 목까지 삼켜 결국 얼굴만 남게 되었다.
시바는 극에 달한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 다음, 자기 본질의 또 다른 일면이 생생하게 나타난 것에 만족하여 분노의 피조물에게 미소를 보내며 인자하게 선언한다. “이후로 너는 키르티무카로 알려질 것이며, 너는 나의 문에 영원히 머무를 것을 명한다. 너를 숭배하는데 게을리 하는 자는 결코 너의 은총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다.
키르티무카는 애초에 시바 자신의 특별한 상징이었으나, 시바사원의 상인방 위에 걸어두는 전형적인 장식물이 되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에 수용되어 불교사원의 수호신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연꽃이나 풀잎을 입에 문 귀면
우리나라 사찰의 귀면상을 일명 ‘낯휘’라고도 한다. ‘낯’은 얼굴의 또 다른 말이며, ‘휘’(暉)는 몇 가지의 색깔 띠로 나누어 채색한 것을 가리킨다. 한편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의 귀면상은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입에 아무것도 물고 있지 않은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연꽃이나 풀잎 등을 입에 물고 있는 얼굴이다. 비율로 보면 전자가 주종을 이루고, 후자는 전자보다 적지만 오히려 이것이 귀면상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양한 시선으로 사찰을 지키는 벽사상
귀면상은 그림뿐 아니라 조각상으로 제작되어 법당을 장식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부안의 개암사 대웅보전의 귀면상이다. 개암사에는 대웅보전 전면 처마 밑에 2구의 귀면상이 있는데, 전체 모습이 네모에 가깝고 모두 뿔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시선을 보면 왼쪽의 것은 정면을, 오른쪽의 것은 눈을 흘겨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참고문헌 허균의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개암사 대웅보전 닫집
개암사 대웅보전 닫집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석가모니불을 호위하고 있다.
닫집은 신성하고 숭고한 천상의 세계인 불국정토의 개념에 실재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때 닫집의 기둥은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기보다 매달려 있다.
불전 속에 세워진 또 하나의 궁전
불전 내부에 들어가면 불좌 위에 작은 집의 모양이 있는데, 이것을 보통 닫집이라 부른다. ‘닫’이란 ‘따로’라는 옛말이니, 닫집이란 안에 ‘따로 지어놓은 또 하나의 집’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당가(唐家)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닫집의 일반적인 형태는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와 화려한 장식, 그리고 허공에 매달린 기둥을 특징으로 한다. 얼른 보아도 화려한 궁전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닫집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설치 목적은 무엇인가?
<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 극락정토를 묘사한 장면을 통해 닫집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극락세계에는 일곱 겹의 난순(欄楯, 欄干)과 타아리나무 기둥이 있고, 방울과 금, 은, 유리, 수정의 네 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하늘에서 음악이 들리고 대지는 아름다운 황금색이며, 주야로 세 번씩 천상의 꽃이 떨어진다. 백조, 앵무, 공작 등이 노래 부르며, 이는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노래로, 이 노래를 듣는 자들은 모두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를 생각한다. 이 새들은 모두 아미타불에 의해 화작(化作)된 것이다.
일곱 겹의 난간과 타아리나무 기둥이 있다고 한 부분은 전당(殿堂)의 형태를 묘사한 것이다. 또 불화에서도 불국정토의 전당이나 궁전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출처:허균의 ‘사찰장식 그 빛나는 장식의 세계’>
개암사 대웅보전은 법당인가? 용궁인가?
개암사 법당(대웅보전)은 용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른 절의 법당에 비해 유난히 용이 많기 때문이다. 천정 사방에 한 마리씩 네 마리, 동서 보에 한 마리씩 두 마리 천정 중앙에서 석가모니불을 호위하는 다섯 마리의 용이 있고, 또, 닫집 안에 다섯 마리의 용이 석가모니불을 호위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당 안에만 도합 열여섯 마리의 용이 있고, 법당 밖 용두까지 합하면 도합 열여덟 마리의 용이 이 법당을 수호하고 있다.
불국정토로 인도하는 사찰의 수호신-용
사찰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으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식물은 단연 용이다. 용은 법당 전면 기둥과 처마 밑을 비롯하여 법당 안의 닫집, 천정, 기둥, 벽, 그리고 계단 소매돌 등에 주로 장식된다.
용의 외형을 보면 머리는 소, 뿔은 사슴, 배는 뱀, 꼬리는 물고기를 닮았으며 수염과 여의주, 발톱을 갖춘 신체적 특징이 있어 중국 전래의 용과 유사하다. 그러나 외형이 비슷하다고 해서 성격이나 상징 의미도 서로 같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나라 사찰의 용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상징되어오던 전통적인 용의 모습에 불교와 함께 전해진 인도 용의 성격과 불교적인 의미가 혼합된 또 다른 개념의 용인 것이다.
힌두교에서 전해진 불교의 용
불교 발상지인 고대 인도의 신화에서는 뱀을 신격화한 용신(龍神)이 등장한다. 인도 용신의 개념은 원래 코브라 중 가장 큰 킹코브라의 형상에서 생겨났다. ‘아난다’라는 용신을 그린 힌두교의 채색 그림을 보면 하나의 몸체에 일곱 개의 머리를 우산처럼 펴고 있는 뱀이 등장한다. 또한 6세기경에 건립된 남인도 마말라푸람의 석굴 사원에 있는 부조상에도 ‘비슈누’신과 함께 용신이 등장하는데 역시 머리가 일곱 개인 코브라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뱀을 신격화한 인도의 용신은 불교 성립과 함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용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과는 달랐다.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전래되어 정착하는 과정에서, 용신은 인도 용의 모습을 벗고 중국 전통 용의 도상을 따르게 되었다.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도 중국의 예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불교에서 용신 또는 용왕은 천왕팔부 중의 하나이다. 천왕팔부중은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를 말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불경에 의하면 여덟 용왕이 있다고 하는데 <묘법연화경> 서품(序品)에서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들으러 온 참석자들을 열거한 대목을 보면, ‘여덟 용왕이 있었으니 난타용왕과 발란타용왕, 사가라용왕, 화수길용왕, 덕차가용왕, 아나바달다용왕, 마나사용왕, 우빌라용왕이 각각 여러 백천 권속과 함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경에 나오는 이 여덟 용왕이 중국 전통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와 다른 의인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그 경우 여덟 용왕의 모습이 각기 다른 도상적인 특징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극락을 향해 가는 般若龍船의 船首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용의 형상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법당 어간(御間: 전면의 중앙 칸)의 양쪽 기둥머리에 조각해놓은 용두와 계단 소맷돌에 장식된 용이다. 법당에서는 전면 바깥쪽에 용두를, 안쪽에 용미를 장식한 경우와 건물 앞쪽에 용두를, 뒤쪽에 장식한 경우가 있다. 이때 용두는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반야용선의 선수를 상징한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 또한 반야(般若)는 ‘진리를 깨달은 지혜’를 말하며, 바라밀다(波羅蜜多)는 ‘피안의 세게로 간다’는 뜻이다. 반야심경 끝부분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라는 주문이 있는데, 당나라 승려 법장(643~712)은 이 주문을 ‘갑시다. 갑시다. 피안으로 갑시다. 피안으로 모두 갑시다. 깨달음의 세계로 속히 갑시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피안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탈것이 필요하다. 금강경에서는 피안으로 향하는 탈것을 뗏목에 비유하였으며 뗏목은 배와 상통한다. 법당은 부처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의 선실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그 배가 향해 가는 곳은 피안의 극락정토이다. 이때 법단 앞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용두는 극락정토로 향하는 반야용신의 선수가 되고, 용미는 선미가 된다. 다시 말하면 법당 건물에 조각해 놓은 용두와 용미는 그곳이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출처:허균의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허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