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 종 목 : 보물 제291호
• 명 칭 :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扶安 來蘇寺 大雄寶殿)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 수량/면적 : 1동
• 지정(등록)일 : 1963.01.21
•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내소사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내소사
• 관리자(관리단체) : 내소사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 혜구두타가 세운 절이다. 무조건 화려해야하고 커야하는 시류에 물들지 않고, 작지만 오래된 절 분위기가 잘 살아 있어 정감이 가는 절이다.

문헌에 의하면 이 절이 세워질 당시에는 대소래사(大蘇來寺)와 소소래사(小蘇來寺)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내소사(來蘇寺)는 소소래사로 ‘소래사(蘇來寺)’라고 불렀다는데 언제부터인가 ‘내소사(來蘇寺)’로 불리고 있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고려 인종 때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기록되어 있고,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도 소래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소래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내소사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조선 후기로 여겨진다.

건축양식이 매우 정교하고 환상적이어서 가히 조선 중기 사찰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제291호)은 1633년(조선 인조 11) 청민선사(淸旻禪師)가 임진왜란 이후 화재로 소실된 옛터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그 후 1902년(고종 6)에 관해선사(觀海禪師)가 중수하였고, 1985년 우암혜산선사(愚岩慧山禪師)가 번와 및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남향으로 3면을 석축대 위에 낮은 기단을 두고 자연석의 초석을 배치하였으며, 못을 쓰지 않고 목침을 끼워 맞춘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에 다포계(多包系) 양식으로 기둥은 원주(圓柱)로서 구석의 기둥은 배흘림이 있으나 나머지 평주(平柱)들은 곧고 둥근 기둥이다. 전면 3칸은 중앙이 좌우칸에 비하여 4:3 정도로 넓으며, 공포(?包)의 짜임은 외3출목(外三出目)과 내5출목(內五出目)으로서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고, 밖으로 빠져나온 제공(諸工)의 쇠서들이 겹겹으로 중첩되어 있어 매우 장식적이다.

건물 안의 대들보 위에 걸린 충량(衝樑)의 보머리에는 용이 목어(木魚)를 물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여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후측에는 2개의 고주(高柱, 16.5 곡척)를 세워 후불벽을 만들고 그 앞면으로 불단을 짜서 미타 삼존을 봉안하였다. 원래 대웅보전에는 석가삼존을 봉안하는 것이 원칙이나 내소사 대웅보전에는 주불로 아미타불, 좌우협시 보살은 관음?세지보살이다. 불단 위로는 닫집을 짜지 않고 우물천정으로 대신하였다.

이러한 세련된 의장은 정면 3칸 여덟 짝의 문살에도 이어진다. 정교하게 조각한 꽃무늬 창호가 바로 그것이다. 내부 단청은 금단청으로 채색되어 화려함을 넘어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내소사에 이르렀다. 절 뒤편 봉우리는 곧 실상사 맞은편 산의 바깥쪽이다. 절은 화재를 겪어 중건된 것인데, 비록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못 매우 잘 정돈되어 있었다. 모두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위의 글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그의 아들 강흔(姜?)이 부안현감(1770~1772년)으로 있을 때 직접 변산을 돌아보고 쓴 글로 『표암유고(豹菴遺稿)』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 글을 통하여 그 당시까지 내소사 대웅보전은 단청이 되어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단청은 1772년 이후에야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 후불벽 백의관음보살좌상

내소사 대웅보전 내부 삼존불을 모신 불단 후불벽면에는 백의관음보살좌상(白衣觀音菩薩坐像)이 그려져 있는데 이 벽화는 국내에 남아 있는 백의관음보살좌상으로는 가장 큰 것이다. 백의관음보살좌상은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화불(化佛)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흰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다. 작품의 세부적 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내소사 대웅보전 현판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글자이다.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로 윤순(尹淳)에게 글씨를 배워 진·초·예·전서에 모두 능했고,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를 이룩했다. 저서로 서예 이론서인 『원교서결』, 『원교집선』 등이 있고 그림은 『고승간화도』, 『산수도』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영의정이경석표』 등 다수가 있다. 내소사 설선당의 판도 그의 글씨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우물천정

내소사 대웅보전 내부 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 천정에는 큰 들보를 사이에 두고 가로 8칸, 세로 6칸 총 48컨의 ‘우물천정’을 배치했다. 우물천정 가장자리를 빙 둘러 24칸에는 두 마리의 학과 여의주가 있는 그림이, 그 안쪽에는 연꽃 그림 6칸, 연자방 그림 12칸, 모란 그림 6칸이, 그리고 이 우물천정 좌우로는 비파, 해금, 북, 장고, 바라, 나팔, 젓대 등 10개의 악기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며 법당 정중앙에 삼존불이 좌정하시어 법을 설하시니 하늘에서 천상지악(天上之樂)을 연주하는데 수많은 백학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사방에서 부처님을 향해 피어나는 연봉오리와 설법을 듣고 법열에 넘쳐 춤과 음악으로 공양 올리는 모습, 꽃을 공양 올리는 비천(飛天), 황룡을 타고 경전을 모셔오는 모습, 부처님의 법을 전해 온 역대 조사상(祖師像)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함축한 내소사 법당의 내경은 모든 이들에게 잠시 장엄한 극락세계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듯 환희에 넘쳐서 자연히 불심을 일으킨다.” <출처 『내소사지』>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

내소사 대웅보전 전면의 8짝(扉)의 분합창문에는 연화문, 국화문, 모란문 등 여러 무늬를 조각한 꽃 문살을 달고 있다. 문의 문꼴을 아래위로 적당히 구획하여 밑에는 청판을 대고 위에는 간소화된 살을 배치한 것 등 입면적 의장계획이 우수하다. 이처럼 절묘한 꽃잎문살은 그 꽃잎이 한 잎 한 잎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그 예술성은 다른 곳에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고, 여섯 잎 보상화를 조각하여 기묘하게 맞추어 나간 연속문양 솜씨는 더욱 신기롭다. 더욱이 처음 조각한 후 350여 년의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부식되고 뼈만 앙상히 남아 있어 그 아름다움과 무상한 세월을 한층 더 일깨우고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목어를 문 용

법당 양측면의 평주에서는 충량(衝樑)을 내어 대들보 위에 걸었는데 왼편 보머리에는 용이 목어(木魚)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고, 오른편 보머리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어 서로 대비됨이 중생계(衆生界)와 진여계(眞如界)를 나타낸 듯 특이하다.

미완성의 전설

이렇게 공들여 지은 건물이라서 그럴까? 내소사 대웅보전은 유명한 전설들을 간직하고 있다. 대웅보전을 지을 때 목수는 3년 동안이나 말없이 나무를 토막 내어 목침만 깎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미승이 장난기가 발동하여 목침 하나를 감추었다. 그것도 모르고 목침 깎기에만 열심이던 목수, 드디어 깎기를 마치고 목침을 세어보니 하나가 모자라는 것이었다. 목수는 자기가 법당을 짓기에는 정성이 부족하다면서 짐을 꾸렸다. 이를 본 사미승이 잘못을 사과하며 목침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 탄 목침을 쓸 수 없다며 끝내 그 목침을 빼놓고 건물을 지었다. 대웅보전 천정의 남쪽 공포 한 군데에 목침만하게 빈 곳이 있다.

또, 대웅보전을 지어놓고 화공을 찾고 있을 때, 이름도 모르는 한 나그네가 단청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칠을 다 할 때까지 누구도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그러나 속세에서나 절간에서나 방정맞은 사람은 있는 법, 중 하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창에 구멍을 뚫고 안을 들여다보니, 나그네는 보이지 않고 푸른 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천정을 날아다니면서 단청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구멍으로 누군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대웅보전 동쪽 내벽 한 곳엔 미처 다 칠하지 못하고 비어둔 미완성의 공백이 그대로 남아있다. <참고문헌 『내소사지』>

/허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