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내소사 동종

• 종 목 : 보물 제277호
• 명 칭 : 부안 내소사 동종(扶安 來蘇寺 銅鐘)
• 분 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 수량/면적 : 1구
• 지정(등록)일 : 1963.01.21
•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내소사 (석포리)
• 시 대 : 고려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내소사
• 관리자(관리단체) : 내소사

 

내소사 경내 보종각(寶鐘閣)에 걸려 있는 동종(銅鐘)은 구경(口徑) 668mm, 높이(全高) 1053mm로 조각이나 장식, 형태의 아름다움이 고려 후기의 전형적인 특색을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梵鐘)이다.

범종을 매달기 위한 목적으로 종 위쪽에 만들어 놓은 장치를 종뉴(鐘紐)라고 하는데, 대부분이 용의 형상을 취하고 있어 용뉴(龍?)라고도 한다. 내소사고려동종의 용뉴는 신라시대의 용뉴보다 외형이 섬세하면서 복잡하고 신라시대의 용두(龍頭)는 대체적으로 앞쪽으로 하향(下向)하였으나 내소사고려동종은 전방을 향하고 있다. 이 용은 직경 25mm의 여의주 2개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입에 물고 있고 하나는 왼쪽 발로 받들고 있다.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音筒)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우리나라 동종의 독특한 구조이다. 내소사고려동종의 음통에는 정상부에는 6개의 연주(聯珠)로 장식하여 그 특이함을 더하였으며, 75mm의 간격을 두고 3단으로 윤상(輪狀)의 절부(節部)를 장식하였고 그 사이에는 꽃무늬를 배치하였다. 용의 꼬리부는 대상(帶狀)으로 되어있고 음통 양측면에는 염익(焰翼)이 뻗쳐있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동일하게 모란당초문(牧丹唐草紋)을 화려하게 양각하여 장식하였으며, 상대 위의 입상대(立狀帶)는 여의두문(如意頭紋)과 비슷한 입상화문(立狀花紋)이 양주(陽鑄)되어 있다.

유곽대(乳郭帶)는 그 폭이 27mm로 균등하며 우리나라 범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주대(聯珠帶)가 외측 주변에만 있고, 내측 주변은 2중소선(二重素線)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내부에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이 배치되어 있다. 유곽 안에는 높이 30mm의 9개의 돌출된 유두(乳頭)가 있고, 각 유좌(乳座)는 높이 약 1.5mm로 9개의 연엽(蓮葉)으로 구성되었고 연봉오리로 된 융기유두는 4~5개의 연엽으로 3?3의 배치로 총 9개의 유두로 구성되어 있으며, 용뉴를 기준으로 좌측 유두 1개가 파손되었다.

당좌(撞座)는 전후좌우 4개소에 배체되어 있고 주변직경 136mm의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당좌와 유곽 사이의 각 상부에는 천개(天蓋)를 갖추고 있는 운상(雲狀)의 만개연화좌(滿開蓮華坐)에 삼존상(三尊像)이 양주(陽鑄)되어 있는데, 본존(本尊)은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으로 화관(花冠)은 신라?고려시대 관음보살상에서 같은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협시(脇侍)는 연화대에 서 있는 상(像)으로서 본존 중심 오른편은 합장 예경하는 상이고, 왼편은 보살을 향하여 공양 예경하는 상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형식이며 삼존은 모두 원형두광(圓形頭光)을 나타내고 있다. 각 삼존의 정상에는 폭 90mm, 높이 70mm의 바람에 나부끼는 천개(天蓋)가 각각 배치되어 정밀하고 치밀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당좌와 당좌 사이의 종면에는 다음과 같은 종명(鐘銘)과 종기(鐘記)가 새겨져 있다.

靑林寺 銘
扶寧邊山中有靑林 三韓前寺革古鼎今
堂宇宏麗禪侶?簪 命白公等鑄發鯨音
停離輪苦警悟昏? 凡有耳子開覺本心
壬午六月 日 社主禪師湛?誌

凡有耳者開覺本心
貞祐十年六月 日 社主禪師湛?記

貞祐壬午六月 初七日 邊山靑林寺金鐘 鑄成入重七百斤
棟梁 道人 虛白
道人 宗之
匠 韓仲?

隱士 金性圭 乙酉

余 乙酉九月七日 卜居靑林 翌年九月七日
鑿此金鐘 移懸于來蘇寺
銘曰 性保金剛 體法轉輪 聞聲悟心 花開實新
崇禎紀元後四癸丑九月二十七日 隱士 金性圭記而施焉
持殿 完岩正于

위의 명문에 의하면 본래 고려 高宗 9년(1222) 6월에 匠人 韓仲?가 주조하여 당시 부령(부안의 옛 지명)에 있는 靑林寺의 종으로 달았던 것으로 주지인 담묵선사(湛?禪師)가 주성(鑄成)한 후 종체(鐘體)에 ‘①‘, ‘③‘과 같은 글을 새겼다.

그 후 절이 소실폐사(燒失廢寺)되어 종의 소재처를 알 수 없었는데, 청림에 복거(卜居)하던 은사(隱士) 김성규(金性圭)가 조선 철종 4년(1853)에 폐사 후 오랫동안 매몰되었던 종을 발굴하여 내소사로 이현(移懸)하고 ‘④’~‘⑤’를 새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②‘는 ‘①‘의 글처럼 글이 깊지 않고 조잡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 누군가가 앞의 명문을 모방하여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내소사지?-능가산 내소사 발행>

변산부 노비도적(奴婢盜賊) 정팔룡이 이끈 무신기병의 근거지 ‘청림사’

청림사(靑林寺)는 상서면 청림리 청림 마을에 있었던 절로 내소사(來蘇寺), 실상사(實相寺), 선계사(仙溪寺)와 함께 변산의 4대사(四大寺)로 손꼽힐 정도로 큰 가람이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마을(청림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마을 뒤편 대밭 가의 남쪽 석축 일부와 동쪽 석축 일부가 양호하게 남아 있다. 마을 한 가운데 길가에는 묘 한 기가 있는데 이곳에 예전에 탑이 서 있었다하여 지금도 ‘탑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마을 남쪽 개울가를 ‘부돗거리’라고 부르는데, 이는 아마도 지난날 청림사의 부도가 있었던 자리로 여겨진다. 옛날 청림사가 한창 번창하였을 때는 이 마을 입구의 큰길 거리에 ‘중장(僧市)’이 섰다고 전해지고 있다.

청림사 터에는 지금도 상당수의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그중에는「靑林寺」란 銘文이 있는 것도 습득되었다고 하며, 습득된 기와조각들의 상당수가 불에 탄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청림사는 늦어도 고려시대에 세워졌으며, 무신란(戊申亂, 일명 ‘이인좌의 난’) 때 부안지역 무신기병(戊申起兵)들의 근거지였다는 문헌 기록으로 보아 이때 관군의 공격을 받아 불타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부안의 향토사학자이신 김형주 선생은 그의 저서 <부안의 땅이름, 마을이름>에서 “1728년(英祖 4) 3월에 역적들의 소굴이 된 청림사(靑林寺)가 관군들의 습격을 받아 소실되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무신란은 1728년(英祖. 4) 무신년(戊申年) 3월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들이 새로 등극한 영조(英祖)의 적통성을 문제 삼아 무력으로 정권을 타도하려 했던 역모사건으로 이인좌(李麟佐)가 주동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에 김일경, 목호룡, 이웅보, 이사성, 정희량, 남태징, 민관효, 그리고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과 박필몽(朴弼夢) 등이 가담했으며, 부안지역에서는 고응량(高應良, 영성군 고희장군의 현손)과 정팔룡(鄭八龍) 등이 이에 적극 동조했다. 특히 무신기병의 가장 중심세력이었던 부안 변산부 노비도적(奴婢盜賊)인 정팔룡은 부안의 청림사(靑林寺)에 근거지를 두고 삼남지역의 청림병(靑林兵)을 지휘했다. 이 때문에 그를 청룡대장(靑龍大將)이라고 했으며, 정도령(鄭道令)이라고도 불렀다. 그가 지휘한 군병(軍兵)은 9,000명이었다고 한다.<영조무신역옥추안>이 사건으로 수천 명이 희생되고, 공주 동학사 등이 소실되는 등 큰 참화를 남겼다. 태인현에서 거병한 박필현은 전주성 입성이 실패로 끝나자 상주로 도피했으나 상주 영장 한속에게 사로잡혀 곧바로 처형되었다. 박필현의 사촌형인 박필몽은 박필현의 군중으로 가 서울로 진군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곰소 앞바다 죽도(竹島)에 숨었으며, 검모포(黔毛浦)로 가 잔당들과 다시 거사하려다가 무장현감 김몽좌(金夢佐)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부안의 주모자 고응량과 우반동 김수종(金守宗)의 6촌 동생인 김수채(金守彩)?김수형(金守亨) 형제가 처형되었고, 김수종은 고응량의 자백으로 붙잡혀 곤욕을 치르고 풀려났다. 무신기병의 우두머리인 정팔용은 한때 김수형(金守亨)의 노복(奴僕)<전경목의 ‘우반동’>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로 본래 전라도 운봉(雲峰) 사람인데, 거사가 실패하자 계룡산 및 지리산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허생이 변산 노비도적과 함께 무인도를 개간하여 이상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을 담은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許生傳)>은 무신기병을 통해 주자학 일변도의 이념과 신분질서를 변화시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로 좌절한 부안 변산 노비도적인 정팔룡을 소설화한 것이라고 한다. ‘허생전’의 이런 개혁적인 내용들은 박지원의 조부뻘되는 무신사태의 핵심 인물 박필현?필몽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청림사 銅鐘이 내소사로 간 까닭은…

청림사 동종이 내소사로 옮겨진 데에는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청림사가 폐사된 후 그 터에는 마을이 들어섰는데,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니 땅속에서 큰 종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청림의 고로(古老)들은 절이 불에 타자 누군가가 동종을 우물에 넣고 메워버렸는데, 나중에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동종을 파낸 자리가 바로 ‘박적시암’으로 1970년대까지 마을사람들 모두가 이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종이 바로 보물 제277호 내소사고려동종이다. 이때가 철종 4년(1853년), 그런데 종을 아무리 쳐봐도 도무지 소리가 나지 않는 벙어리 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궁리 끝에 종을 치면서 변산 안의 모든 절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기로 했다고 한다.

‘개암동의 개암사!’

‘중계의 실상사!’

변산의 모든 절 이름을 다 부르며 쳐보아도 소리가 나지 않더니

‘돌개(石浦)의 내소사!’

하고 부르면서 종을 치니까 비로소

‘우웅…’

하고 맑고도 우렁찬 종소리가 변산 안에 가득히 퍼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종을 내소사로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참고문헌/[내소사지]-능가산 내소사 발행/1990년 전라북도 발행, [전설지]>

 

/허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