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둥 맏형’ 김석성을 그리워하며

앞줄 오른쪽에서 시계방향으로 김태웅, 신삼근, 김형주, 신창근, 윤갑철, 신희영, 최기인, 신조영, 김광평, 박민평, 오하근

 

기억 속에서 건진

나는 1960년대까지 부안에서 보내고 이후에 바깥에서 산 세월이 더 많은데도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리고자하면 항상 부안에서 만난 것들이 먼저 고개를 내민다. 디지털화 되면서는 파일에 저장되어 곧장 응답을 한다. 그것도 이름을 적어 검색어로 부르면 더욱 효과가 있다. 나는 부안의 해산물 가운데 진기한 요리로 뱅어회를 들고 싶지만 시원스럽게 밝혀진 기록이 없고 검색어로도 등록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말하는 뱅어(白魚)는 뱅어포를 만들어먹는 보리뱅어와 구분하였는데 지금은 보리뱅어가 뱅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곰소만 돌개(石浦)에서 눈 오기 전 한 해 한 말밖에 건질 수 없다는 횟감의 뱅어는 부안에서도 맛보기 어려워졌다. 굵기가 이불바늘 정도의 하얀 몸체를 고춧가루와 참기름으로 버무리고 백자단지에 담았다가 눈이 오는 날 백자 잔에 정종을 기울여야 제 맛이 난다는 횟감이다. 이런 이야기도 부안에서 그 횟감을 먹어본 사람들의 말이지 어떤 요리서적에서도 본 일이 없다. 내가 뱅어회를 입에 올리면 그 맛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이 있지만 개운하고 알싸한 것만으로 대답이 될 것 같지 않아 눈이 내리는 날 백자 잔을 기울이는 정경으로 대신하고는 했다. 요즘은 곰소만의 물때에 변화가 생긴 때문인지 그런 백자단지를 구경조차 하기가 쉽지 않다. 요리를 들어본 사람이 몇 명만 되어도 과거 부안의 전통 요리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뱅어회의 추억

부안의 그 시절, 나는 ‘이화장’이라는 요리집에서 뱅어회를 마지막으로 들었다. 변산 의상봉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뱅어회를 들자고 한다며 누군가 동석을 권해서였다. 이화장에서 뱅어회를 대접해준 그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으니, 그날 동석에 나를 끈 사람이 희영인지 조영인지를 먼저 알아내고 물어야 했다.
두 사람은 신석정 시인의 조카들인데 회칙이나 회비도 없는 ‘서림회’에 나와 함께 들어 있었다. 사진 한 장 남겼는데 김형주, 김태웅, 신삼근, 신창근, 윤갑철, 김광평, 최기인, 오하근, 박민평, 신희영, 신조영이 담겨있다.
우리는 희영의 방에서 곧잘 어울렸다. 요즘 구리에 있는 희영한테 먼저 묻고 다음은 남원에 있는 조영한테 묻기로 했다. 휴대폰을 들고 구리에 있는 희영한테 그날 밤 일을 말하고 내 팔을 끈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물었다.
“저예요.” 희영이 대답했다. “그 친구는 이옥선이에요. 백산 금판리가 집이고요. 지금 엘에이에 살고 있어요.” 요즘 부안 사람 중에 그런 횟감을 아는 사람이 없더라는 내 말에도 동의했다. “없어요. 지금들은 몰라요.”
부안에 있는 사람은 모르는데 오히려 부안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군침이 도는 요리다. 현대는 생활 방식이 달라져 태어난 고향을 지키는 사람보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이 많다.

 

2012년 당상마을 최기인의 집 마당에서(맨 오른쪽이 김석성)

 

똠방각하 이야기

소설 『더블린 사람들』의 제임스 조이스는 22세에 더블린을 떠났지만 마음은 늘 더블린에 있었다고 한다. 부안도 우리들의 더블린이나 마찬가지다. 부안을 떠나 살거나 부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부안을 마음의 둥지로 삼고 사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을 편의상 ‘부마둥’이라고 줄이고, ‘부마둥 맏형’으로 언론인과 편집자로 활동한 김석성(金石星)을 들고 싶다.
김석성은 부안을 떠나 산 세월이 많고 외국생활도 했지만 누구보다도 부안을 사랑하고 기록하고 증언하고 챙겼다. 부안의 문화를 정리하여 「부안저널」에 연재하고 책으로 묶기도 했다.
나는 부안농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있던 김석성을 동생 기량한테 듣고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국일보, 중앙일보를 거쳐 세계일보 출판국장으로 있을 때 내 장편소설 출판이 기획되어 원고를 넘기게 되었다. 제목이 촌스럽다고 여겨졌는지 편집부에서 바꾸었으면 했다. 나도 그것만은 고집을 꺾고 싶지 않았다. 국장이 작가의 뜻을 존중하자고 하여 『똠방각하』가 나올 수 있었다. 책이 나오자 평이 좋다고 흐뭇해했다. 얼마 후 내 소설 『처숙』을 MBC 베스트셀러극장에 올려 호평을 받은 적이 있는 박복만 피디로부터 전화가 왔다. 작품 『처숙』은 옥로원이라는 다기점을 인수하여 영업상 다인(茶人)으로 유명한 다로선생을 모셔오려고 찾아 나섰다가 허탕을 쳤는데, 그가 바로 전통차에 대한 책을 내달라고 원고를 맡겼다가 홀대하여 쫓겨난 처숙이었다는 내용을 다룬 소설이다. 나는 인척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돌아다니며 수금하여 해결해주는 분을 뵌 적이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가솔은 건사하지 못하고 떠도는, 부안에서 본 지인을 모델로 그린 게 처숙이다. 나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어디에도 있는 것들이지만 부안에서 만난 모델을 형상화한 것들도 많다.
박 피디는 『똠방각하』를 미니시리즈로 내보내고 싶다고 했다. 부안의 방언을 살리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워 현장에 죽치고 있으면서 동시녹음을 하는 정성을 기울였다. 시청률도 좋고 화제가 되자 1990년 6월 12일 아침 MBC 뉴스 시간에 작가 인터뷰를 내보냈다.

 

‘부마둥 맏형’을 그리며

김석성은 나와 어울리는 작가들과 식사자리를 가졌는데 그 인정에 ‘맏형’이란 호칭을 얻었다. 퇴임하고 부안으로 내려가 부안여중·고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역시 정년퇴직 후 구리에 있는 나를 양재동 식사자리에 곧잘 불러내었다. 그 후 분당에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뽑으며 생활하자 직접 찾아와 부안소식을 전해주고는 했다. 조용히 들어와 문 앞 구석자리에 앉아 빙그레 웃고 있는 얼굴은 수줍은 소년의 그것이었다. 올 때마다 부안 소식과 하는 일을 조곤조곤 전해주고 일어섰다. 한 번은 석정의 삼남 신광연의 초대를 받고 격포에서 함께 자게 되었는데, 코를 곤다며 나와 같은 방에 들기를 원했다. 2012년 9월 8일, 당상리 문래당산에서 가진 아버지 최순환 독립유공자 묘비 제막식에 몇 지인들과 동행하여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생가도 들러 마당을 밟아주었다. 부마둥의 맏형이 나를 찾아준 마지막 발길이었다.

 

/최기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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