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글뻐글헌 것이 징그랗게도 많네 그려… 참말로 오져 죽겄네’
호미로 뻘을 긁어 내려가노라면 주어 담기 바쁘게 연달아 누런 몸뚱이를 드러내는 조개를 보며 아낙들이 좋아라 하는 소리다.
해방조개 얘기다. 해방되던 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아스라이 보릿고개를 넘어야할 판국인데 설상가상으로 부안에 흉년이 들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갯벌에 조개가 섰던 것이다. 어른들은 그 해 이 조개로 허기를 면했다하여 ‘해방조개’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 후로 자취를 감췄던 해방조개가 1960년대 초에 변산반도 마포 하섬 앞에서 변산해수욕장에 이르는 갯벌에 다시 섰다. 어찌나 서식밀도가 높은지 뻘 반 조개 반, 뻘 한 평 남짓만 뒤집어도 한 양동이를 채울 정도였다. 연일 사람들은 갯벌로 몰려들고, 갯벌은 화수분처럼 파내도파내도 또 그만큼의 조개를 밀어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고구마 수확하듯 갯벌에 소를 몰고 와 쟁기로 뻘을 뒤엎었다. 가족들은 쟁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살 드러내는 조개를 주워담기 바쁘고…
처치 곤란하게 많은 양의 조개를 부려 놓은 집집마다는 또 한번 바빠진다. 해방조개는 원래 찌개를 해 먹거나 회무침 해 먹어야 제 맛이지만 그 많은 조개를 무슨 재주로 다 깐단 말인가. 그러기에 대부분의 가정은 고추 말리듯 말려 저장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려면 커다란 가마솥 걸고 몇 차례고 삶아 살을 꺼내어 말려야 한다. 담밖의 조개무지는 높이를 더해가고, 광주리, 멍석, 장독대 등 좀 넓다란 도구란 도구는 다 꺼내놓고 그 위에 해방조개 말리는 풍경이라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이렇게 말려 갈무리해 두었다가 겨우내 김치나 무우 넣고 찌개를 끓여 먹는데, 먹어도먹어도 물리지 않고 맛이 있었다.
해방조개를 다른 지역에서는 ‘노랑조개’ 혹은 ‘개량조개’라고 부른다. 큰 것의 몸길이가 4~5cm 정도, 황갈색의 껍데기에 살은 누런 색을 띤다. 60년대 부안 갯벌에 그 많던 해방조개는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요즈음은 구경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작년 9월경에 친구가 운영하는 음식점(변산면 지서리)에 들렀더니 주방에서 아낙들이 해방조개를 한 다라이 앞에 놓고 수다들을 떨고 있었다. 배 타고 깊은 곳에 나가 뻘 바닥을 훑어왔노라고 했다.
‘어! 왠 해방조개?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응게, 빨리 한 접시 대령시키시요. 잉~’
물론 그 이후 일정은 엉망이 되었다. 친구 불러내 옛추억 떠올리며 낮술에 취해야 했다.
해방조개
조찬용
조개들 살이 올라 부풀어 오르는 철이다
동네 사람들 잠시 농사일 제쳐두고
바다 풋것들 입맛 그리워 바다로 간다
‘아무리 생각혀도
이놈의 날씨가 못씨게 변히가는 겝이여’
한숨짓다 둘러보면
날은 가물어 보리는 제 키를 크지 못하고
바람에 흙먼지만 봄이 한창이다
키 작은 민들레 땅에 엎디어 크다 말았다.
바닷물이 어디에 제 몸을 숨겼는지
모래뻘이 십리 끝이다.
물가 따라 호미로 모래뻘을 뒤지면
호미끝에 들킨 황금색 해방조개들
‘뻐글뻐글헌 것이 징그랗게도 많네 그려
참말로 오져 죽겄네’
해방되던 해
먹을 것 없어 날이면 날마다
모래뻘을 뒤지던 동네 사람들 이야기 속엔
살기 좋은 그리움 냄새인지
때때로 바다에 얽혀 산 내력의 신음인지
혀끝에 간간한 조개 국물 생각하면
땀방울이 허기져 보인다.
뜸했었다
해방을 맞아 제 고향으로 다 돌아갔는가 싶었다
해방된지 오래 됐는데
해방조개는 우리 나라가 해방된 지도 모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이곳을 제 땅이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고개가 누이고
어깨가 늘어지도록 바구니에 그득 담긴 해방조개
바닷물 찌꺽거리는 신발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는 모랫길
동네 사람들 허기진 그리움을 보면
아직도 우리에겐
해방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찬용은 변산면 마포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창과를 졸업하고
시인정신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지금은 수원 영복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글쓴이 : 허철희
작성일 : 2003년 01월 22일 06시 14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