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고인이 된 어머니 자리를 채워 군청앞 1인시위를 하는 아들 명휘제 군<사진/반핵대책위>

 

반핵전사 고 최경임 님 추모 3주기를 보내며

시인 신석정은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라는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1930년대의 시인지라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아직은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부안읍 서외리에 사는 이상공 씨 이야기입니다. 그는 딱 3년 전의 9월4일에 잃은 아내 최경임 씨를 추모하는 촛불을 그 날 이후 밤마다 켜 왔습니다. 모두가 ‘그때 그 일’을 잊어버린 채 일상생활로 돌아가 있지만 ‘사랑하는 임’이기에 그는 오늘도 애닳게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밤마다 켜는 촛불은 ‘사랑하는 임’을 추모하는 개인적인 서사이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동지’를 기억하는 집단적인 서사의 크기로 타오릅니다. 오늘 만난 그는 술회합니다. “와이프를 잃었다고 생각을 안해요. 동지를 잃었다고 생각하지.” 동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때, 운명의 절대공동체를 지켜내야 했던 투쟁에서 동지였습니다. 남성이거나 여성이거나, 어린 학생이거나 나이드신 노인분이거나,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이거나 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상인이거나, 종교인이거나 전문직이거나 범인(凡人)이거나 우리는 모두 동지였고, 촛불은 그 동지적 연대의 가장 큰 한가운데를 차지하면서 우리를 모두 참여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산들바다’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한 군민은 2003년 11월 3일 촛불집회 100일째에 즈음하여 반핵대책위 홈페이지에 이런 시를 써 올렸습니다. “… / 백일 / 밤이면 밤마다 / 아슬아슬한 촛불 // 타다 남은 / 짜투리 촛불 / 오늘 새것에 이으렵니다. // 갈라진 세상 / 끊어진 세상 / 콧노래로 춤추며 / 촛농으로 이으렵니다.” 그렇게 밤마다 이어지던 집단적 연대의 촛불은 부안 사람들에게 이제는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만, 이상공 씨는 2004년 9월 4일 ‘동지’를 잃은 아픔으로 촛불을 이어내고 있습니다.

 

▲투쟁하는 현장이면 어디든 찾아다닌 고 최경임 씨ⓒ부안21
▲이웃들과 함께 하던 고인의 모습(왼쪽 첫번째)ⓒ부안21

와이프가 아니라 동지로서

그날은 군산으로 투쟁하러 가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오후 3시 반핵민주광장에서 출발하기로 하여 이상공 씨는 집에서 두시반께 나왔습니다. 군산투쟁에 동행할 요량으로 전날 옷들을 다 세탁해놓았던 아내 최경임 씨는 그날따라 이상하게 아침부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습니다. 마음이 아려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자신보다도 더 열심히 싸웠다는 반핵전사이기에 이상공 씨는 그게 마지막 모습일줄 어찌 상상이나 하였을까요. 술에 마음을 잃고 있는 아내가 안스러웠는지 절친하게 지내던 동네 아주머니에게 아내를 부탁하며 나섰던 게 그나마 위안이었을겁니다.

“군산 잘 다녀 오세요.” 이렇게 당부하던 아내는 그러나 그가 나가자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남새밭에 쓰던 농약을 집에 놔뒀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군산으로 가려던 최동호 · 김인택 씨는 급보를 접하고 지인의 경험을 토대로 먹가루와 대나무 뿌리에서 나온 물과 팥을 급히 구해 민간요법 처방을 해보았지만 그이는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술 마시고 우울증세로 울컥 하는 마음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 같아요. 계획적이지는 않았어요. 우발적으로 그랬던 거지.” 파란만장한 일생의 경험을 해왔던 이상공 씨이지만 이보다 더 큰 슬픔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부안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의 가정은 조용하고 평화로웠고,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은 부자였답니다. 식구들도 모두 건강했습니다. 건축 조적공으로 일해왔던 이상공 씨 자신의 말마따나 가난한 자의 행복이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변산면 지서리 출신인 최경임 씨는 집에 놀러오는 동네 사람들하고 수제비를 쑤거나 국수라도 삶아 먹곤 했답니다. 가진 건 없어도 이웃과 나눌줄 알던 그이도 어느새 사나운 전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이를 기억하는 사람들 말에 따르면, 투쟁의 현장 어디든 항상 나타나곤 했답니다. 눈보라 매섭던 한겨울에도 쉬지 않고 함께 부안성당의 촛불집회에 나섰던 때가 이상공 씨에게는 가장 인상적이고 그리움을 주는 장면입니다.

평화와 행복이 깨진 것은 부안사태가 일어나면서부터였습니다. 투쟁 초기부터 싸움판에 나서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이 또한 돈 벌러 다니기를 포기하고 투쟁이 곧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투쟁을 하다보면 쌈짓돈이라도 들어가는 법이고, 투쟁이 장기화되다보니 생활고가 짓누릅니다. 게다가 최경임 씨는 2003년 11월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갈비뼈 두 대가 나갔고 오른쪽 무릎 관절염까지 왔으며,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상공 씨마저 집시법 및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재판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겉으로는 사나운 전사였지만 속으로는 우울증이 깊어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이 압박했을 터이고, 궁극적으로는 부안사태 때문이었죠.”

 

▲2004년 2월14일 주민투표후 개표장에서 함께 찍은 부부의 모습<사진/이상공>

“길이 보여야 살지, 답답허고…”

가족은 남편과 아들만 남아 있습니다. 투쟁은 군민의 승리로 귀결되었음에도 가정은 더이상 평화롭지가 않습니다. 당장 아내따라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아들을 차마 고아로 만들고싶지 않다는 게 이상공 씨의 고백입니다. “길이 보여야 살지, 답답허고…” 정부보조금에다 하루이틀 있는 일거리로 먹고산다는 예순하나의 이상공 씨, 당시에는 고등학생이었으나 대학생이 된 아들이 아버지를 잡아줍니다. 무슨 이득을 위해 투쟁한 것도 아니고 확실한 가치관을 가지고 싸웠음에도 마음의 한구석에 남아 있는 지인들과의 찬반 갈등의 그림자는 아무래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반목하고 싶지 않아도 골이 깊어진 터라 쉬 아물지 않습니다. 반핵군민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앙금이겠지요.

▲원불교 부안교당에서의 추모3주기 열반기념제 모습

반핵군민들이라면 누구나 당시 투쟁의 현장에 항시 해병대 복장에다 전투화를 신고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곤 했던 이상공 씨의 이미지를 기억할 겁니다. 나로서는 군사문화적이고 남근적인 복장에 대한 어떤 거부감적인 선입견과 오해가 있었음도 사실이나 이번 기회에사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저들의 공권력 진압에 대항하는 의미였지요. 말할 권리마저 막으려 하는데 대항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지 않느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랄까요.” 그의 복장은 이미 그 자체로 투쟁의 실천이자 상징적 기호였습니다. “한 시민으로서 할 도리를 다 했다.” 대중심리로 따라간 게 아니고 분명한 가치관에 따라 핵폐기장 반대투쟁에 동참했다는 부부의 의지가 있었기에 그는 아내를 동지로 느꼈나 봅니다.

사랑하는 동지를 잃은 그는 고독스런 나날들을 못이겨서인지 아내가 거처해온 흔적들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집안은 아내와 살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육신이 되었던 모자, 뱃지, 티, 잠바 등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13종이나 되는 투쟁의 물품들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미용기술이 있어 남편의 머리를 항상 손수 잘라주곤 했었답니다. 그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이상공 씨는 아내의 묘지 벌초를 할 때 가위로 정성스럽게 한답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부안에 핵없는 세상을 만든 것을 보지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살아생전 꽃을 무척 좋아해 풀꽃이라도 아름답게 보듬았다는 고인의 무덤에는 국화꽃이 살아 있습니다. 어쩌면 변산의 시인 고 박영근이 노래했던 바 ‘저 꽃이 불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초들의 아픔이 치유되고 삶의 활력이 되찾아질 날은 언제나 올런지요.

/고길섶( 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