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일, 위도에 다녀왔다. 격포항에서 파장금항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40분, 자동차로 부안에서 격포 가기만큼의 시간이다. 그렇건만 육지의 부안사람들에게 위도는 여전히 낯설고 먼 피안의 세계였다. 부안사태 후론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감성일까.
배에서 내리자마자 파장금항 모퉁이 한 식당을 찾았다. 식탁에 오른 반찬들이 섬 정취를 물씬 풍겨준다. 전어구이, 생굴 넣고 끓인 김국, 그리고 병어회무침이라고 해야 할지 병어김치라고 해야 할지 하여튼 병어를 잘게 썰어 양파 오이 등과 무쳐놓은 찬은 적당히 발효가 되어 시큼달콤한 게 입맛을 당겼다. 그러나 식탐 부릴 겨를도 없이 “반핵한 죄로 그동안 꽤나 부대꼈고, 지금도 마음고생이 심하다”는 식당 주인의 얘기를 듣노라니 마음이 무거워져 먹는 둥 마는 둥 식당을 나왔다.
칠산바다 신화의 중심 파장금항
원래 여행 목적은 들꽃도 좀 보고 봄바람이나 쐬자던 것이었는데 여정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반강제로 일행들을 끌고 파장금항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들꽃 스케치보다는 칠산바다 신화 속으로 빠져보는 게 더 의미 깊을 것 같아서였다.
파장금항이 어떤 곳이던가. 칠산바다가 조기어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 살구꽃 몽오리 맺힐 무렵이면 어김없이 남쪽으로부터 조기떼가 칠산바다로 몰려들고, 이 조기떼를 따라 각지에서 700∼800척의 고깃배들이 칠산어장의 중심지인 위도로 몰려들어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었던 곳이 바로 이곳 파장금항이다.
이 때 이들이 건져 올리는 조기는 배 한 척당 50∼60동, 1동이 1000마리니까, 700∼800척의 고깃배가 건져 올린 조기는 4000만 마리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건져 올려진 조기는 염장 가공되어 ‘영광굴비’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팔려 나갔다. 위도는 원래 부안군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전남 영광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다시 부안군에 편입되었다. ‘영광굴비’라는 이름은 위도가 영광군에 속했을 때 얻은 이름이다.
이 시기에 위도에는 파시(波市)가 들어섰다. 위도의 파시는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 3대 파시 중의 하나였는데 1970년대 중반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파시가 들어서면 기름, 장작, 발동기, 각종 어구, 식량, 부식물, 각종 잡화를 파는 상인들이 모여들고 술집, 다방, 세탁소, 정육점, 이발관, 미용실 등이 들어서 파장금항은 중도시를 이루었다. 그 당시 그 좁은 파장금항에 술집 색시만도 400∼500명이 북적거렸다니 위도의 파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칠산바다를 뒤덮던 조기떼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위도는 한적한 어촌으로 변해 있다. 파장금항 뒷골목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 한 사람 비껴가기도 어려울 좁디좁은 골목, 저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기거할 수 있나 의아심이 드는 성냥갑만한 술집 색시들 방, 그 좁기만 한 골목 담벼락에 아직도 남아 있는 다방, 세탁소, 목욕탕 등의 광고문구들이 그 옛날 칠산바다의 영광을 어슴푸레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위도 파시여! 다시 한 번’을 꿈꾸던 주민들
정말이지 조기떼가 사라진 위도는 팍팍하고 고단하기만 하다. 조기 대신 김양식, 멸치 새우어장으로 대신하지만 어디 옛날 같은가. 아래로는 영광원전 온배수의 영향을 받고, 위로는 새만금의 영향으로 어장은 날로 황폐화되어 시름겹던 차에 웬 낚시꾼이 나타나 위도에 3000억 준다, 집집마다 나누면 3억∼5억이다, 위도-격포간 다리도 놔준다 하고 산자부장관이라는 자는 위도에 대통령 별장도 짓는다는 등 온갖 감언이설로 위도에 핵폐기장을 앉히려 했다. 대부분의 위도주민들은 ‘위도 파시여! 다시 한 번’을 환상하며 이를 반겼는지 모를 일이나 결과는 찬반 주민들 간에 깊디깊은 절망의 골만 파놓고 말았다.
파장금에서 진리 쪽으로 가지 않고 동남쪽인 형제섬 쪽 해안도로를 타기 위해 산을 넘었다. 형제섬은 변산에서는 해넘이로 유명한 섬이지만 이곳에서는 해오름으로 유명하다. 김영삼 정부는 서해훼리호 사고로 상처 입은 위도주민들에게 이 위도 일주해안도로를 선물했다. 그러나 차량통행이 뜸하다 보니 어민들의 그물을 손질해 말리거나 멸치 새우를 말리는 공간으로 변해 있다. 멸치 새우철은 좀 이른 듯 도로 곳곳에서는 실치 말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무형문화재 ‘위도띠뱃놀이’가 보존되고 있는 대리마을에 들어서자 더 큰 규모로 실치 말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진 좀 찍을 게요” 하고 몇 장 찍고 있는데, 저쪽에서 그물 손질하고 있던 건장한 중년 남성이 “왜 찍는 거여”하며 사진을 못 찍게 했다.
멋쩍기도 하고, ‘우리는 이렇게 호의적이다’를 보여주고 싶어 작업하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팔아요? 좀 살 수 있어요?” “2.5킬로 한 박스에 만 원이에요.” “그럼 한 박스만 주세요.” “지금은 덜 말랐으니까 조금 있다 오세요. 금방 말릉게” 그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팔 게 있간디!”하고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급반전되는 순간이었다. ‘왜 저러시나?’ 어물어물 그 자리를 뜨려는데, 뒤에서 “OOO랑 일행이랑게”하는 소리가 들렸다. OOO은 반핵자, 그런 반핵자 일행에게는 안 팔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OOO은 자기 동네에 와서도 꼬리를 축 내린 채, 일행과 저만큼 떨어진 채 서성였던 것이다. 해방공간에서의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바로 그것이었다. ‘아나 참여정부, 아나 국민화합!’ 국민간 갈등이나 부추기고, 서해 고도의 이 여린 공동체를 초토화시키다시피 한 못난 정부에 울화가 치밀었다.
뉘 있어 핵생채기 안고 아파하는 위도를 보듬으랴
썰렁하기 그지없는 마을 공기를 느낀 터라 일행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가급적 주민들 눈을 피해 대리 뒷산에 올랐다. 대리사람들이 아무리 땔나무가 없어도 그곳의 나무에는 손도 안대고 가꾸고 지켜왔다는 후박나무 숲이다. 어찌나 울창한지 대낮인데도 사진기의 노출이 뚝 떨어져 야간촬영에서처럼 감도를 잔뜩 올려 찍어야만 했다. 숲 속에는 참취, 더덕, 애기나리, 반디지치, 제비꽃 등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숲을 가꾸었듯이, 생채기 투성이 아픈 마음들을 서로 보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육지의 부안사람들은 위도를 보듬고….
/허철희
기사출력 2005-06-13 17:23:37
ⓒ 전라도닷컴/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