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터 주민들을 내쫓는 자리에 석정문학관이 들어섭니다 – 부안읍 선은리 선은동

 

 

▲칠석날 마을잔치때 석정문학관 건립사업으로 인한 마을문제로
갑론을박하는 주민들ⓒ고길섶

“마을의 자랑? 마을의 자랑은 무슨 놈의 자랑이여. 몇 대째 여기서 나고 여기서 컸는데, 그런 우리를 내쫒는 게 유명한 시인의 문학관 짓는다고 할 짓여? 보상이라도 제대로 해줘야지, 헐값여 헐값! 그 돈 받아가지고 어디 가서 무슨 집을 져? 우리같은 늙은이들이 어디로 쫓겨가라고. 갈데도 없어! 우린 절대로 못나강게 우리 집 빼고 알아서 허라고 혔어.”

집을 매입당할 처지에 있는 아주머니는 아주 격분했습니다. 해질녘을 그늘 삼아 마당에서 깨를 터는 그이의 바깥양반은 삶의 터전을 잃는다는 위기감으로 크게 짓눌리는 듯 생애의 주름을 무겁게 접는 표정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녀…” 말을 아끼면서도 한마디씩 내뱉습니다. “우린 쌈터여 쌈터.” “쌈터라니오?” “여기서 탯줄 떼고 여기서 쭉 살아왔다는 말여.” 집은 대대로 가꾸어 온 살림살이의 흔적들이 역력합니다. 한 200평 되는 대지에 두 채의 집이 자리잡고 있고 우물, 감나무, 텃밭 따위들이 시한부인생인 마냥 넋을 잃고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쌈터로 정든 고향집을 떠나라 하니 가슴이 미어지고도 남을 법합니다. 야반도주하는 빚쟁이도 아니고 말입니다. 이웃 주민은 그럽니다. “죄도 없이 마을에서 쫓겨나는 더러운 기분이라잖어.”

 

“죄도 없이 마을에서 쫓겨나는 더러운 기분이라잖어”

선은동은 부안읍내에서 동진면 쪽으로 2km쯤 가다보면 서림공원의 맞은편에 있는 선은리의 한 마을입니다. 한자로는 仙隱洞이라 하니 아마도 신선이 은둔하여 살았던 동네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그럴싸한 옛이야기(구전민담) 따위는 전해오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이 마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석정문학관 때문입니다. 한국의 내놓으라 하는 시인 신석정(1907-1974)을 기념하는 석정문학관이 들어선다는데, 당연히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쏠립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문제가 대단히 큽니다. 그 하나는 ‘석정문학관건립추진위원회’와 같은 문화공공의 민간기구 하나없이 사업이 부안군 주관과 발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2006년도 6월의 인수위원회 보고자료에 따르면, ‘문인 및 신석정 선생 차남 신광연 등 면담’ 방식의 ‘관계자 협의’를 통해 부안군이 직접 주도하여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현대시 문학사의 최고봉’으로 부안군이 평가한다면, 그에 걸맞는 건립추진위원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하여 신석정 시와 삶의 세계를 오늘날의 의미에서 재발견하고 재해석하는 시도를 거치면서 공론화하며 전문가 등의 엄밀한 평가에 토대하는 한편 주민적, 군민적 차원의 참여를 촉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소외되어 있고 군민의 몇몇 정도나 그런 게 추진되는 것만 알고 있지 그 추진과정의 공공성은 경험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부안군이 은밀(?)하되 공공연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왔습니다. 시인의 문학세계를 드러내는 문학관은 관이 일방적으로 주도할 일이 아닙니다. 건립 이후 문학관이 어떻게 운영될지도 걱정됩니다.

주지하다시피 신석정은 부안의 자랑스러운 한국현대사 시인입니다. 시인은 목가시인 혹은 서정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왔습니다만, 참여성을 제거한 음풍농월하는 순수서정시는 거부하며 “시를 쓴다는 것은 시에서 살고 싶은 욕망에서 발로하는 행동의 일단”이라 말해왔습니다. 그는 또한 시의 고향은 바로 “생활이 아니면 안될 것”이라고도 말해온 바 곧 생활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시민적 생활시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게 한국의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생존자 혹은 목격자로서의 현실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까닭입니다. 그는 1974년 간행된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합니다.

“한때 독립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고 맨 앞장을 내딛던 분들이 학병과 지원병의 권유 유세의 앞장에서 눈물로 호소하던 슬픈 풍경을 목격했을 때, 나는 가슴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소리없는 통곡을 하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들이 한때 생명처럼 여기던 지조를 헌신짝처럼 팔아넘기면서도 그들 나름의 변명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의 총칼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차라리 좋으나, 그것이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는 궤변에는 침을 뱉아주기에는 내 침이 아까왔다.”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

▲신석정 시인

실제로 신석정은 1943년 당시 친일작품으로 한창 미쳐가던 서정주에게 보내는 시를 씁니다.

눈오는 겨울밤
피비린내 나는 네 시를 읽으며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울었다는 청년
그 청년이 바로 우리 고을에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 징글하게 살어보리라”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 – 정주에게’>

뿐만 아니라 4·19 때는 이승만의 사진으로 밑씻개를 하자던 시인 김수영마저도 조롱합니다.

한 시인이 있어
‘딱터 이’의 초상화로 밑씻개를 하라 외쳤다 하여
그렇게 자랑일 순 없다
어찌 그 치사한 휴지가 우리들의 성한
육체에까지 범하는 것을 참고 견디겠느냐!”

<‘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

 

 

마을과 세상으로 열렸던 청구원의 시심, 생활의 발견!

신석정이 젊은 시절 살았던 생가가 1993년 전라북도 기념물 84호로 지정되었고, 사후 30여년이 지난 오늘에야 문학관이 건립되려 하니 뒤늦은 감도 있습니다만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석정은 본디 부안읍 동중리 307-2번지에서 태어났으며, 행안면 역리 서옥부락, 동진면 창북리와 금산리를 거쳐 여덟살 무렵 선은리 568번지로 이사하였고, 20대 때 상경생활을 잠시 하다 27세인 1935년 12월 20일에 선은리 560번지의 아랫집을 마련하여 1953년 전주로 이사하기까지 자신의 거처를 청구원(靑丘園)이라 부르며 <촛불> <슬픈목가>의 시집을 펴냈으니, 청구원이야말로 시인의 영원한 고향이자 기억소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선은동의 석정문학관은 의미 있습니다.

석정문학관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시인이 그 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한 주민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의 시세계는 청구원에만 갇혀 있지 아니하고 마을과 세상으로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선은동의 유년시절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노령산맥이 동남으로 병풍 두르고, 눈이 모자라도록 넓은 벌을 끼고 있는 이 고을 뒷산에 오르면 서해바다의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산 옆에 아름드리 고목이 울창한 서림공원은 내 젊은 꿈이 한 그루 한 그루에 새겨진 유일한 산책의 길이었습니다. 그 숲속에서 베를레르의 ‘가을노래’를 읊으며 해를 지웠고…” 또한 시인은 <슬픈 목가>의 발문에서 “‘생활’이라는 무서운 현실”을 직시하였고, 앞서 보았듯 어느 글에서는 “시의 고향은 바로 생활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고 말합니다. 이 생각은 곧 시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1952년 4월에 <귀향시초(歸鄕詩抄)>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1
껌도 양과자도 쌀밥도 모르고 살아가는 마을 아이들은 날만 새면 피뿌리와 칡뿌리를 직씬 깨물어서 이빨이 사뭇 누렇고 몸에 젖인 띠뿌리랑 칡뿌리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쏘다니는 것은 퍽은 귀엽고도 안쓰러워 죽겠습데다.

2
머우 상치 쑥갓이 소담하게 뇌인 식탁에는 파란 너물 죽을 놓고 둘러 앉아서 별보다도 드믈게 오다 가다 섞인 하얀 쌀을 건지면서
‘언제나 난리가 끝나느냐?’
고 자꾸만 묻습데다.

3
껍질을 베낄 소나무도 없는 매마른 고장이 되어서 마을에서는 할머니와 손주 딸들이 들로 나와서 쑥을 뜯고 자운영순이며 독새기며 까지봉통이 너물을 마구 뜯으면서 보리고개를 어떻게 넘겨야겠느냐고 산수유꽃같이 노란 얼굴들을 서로 바래보고 시서겊어 합데다.

4
술회사 앞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수대며 자배기를 들고 나와서 쇠자라기와 술지겅이를 얻어가야 하기에 부세부세한 얼굴들을 서로 쳐다보면서 차표 사듯 늘어서서 꼭 잠겨 있는 술회문이 열리기를 천당같이 기두리고 있습데다.

5
장에 가면 흔전만전한 생선이 듬뿍 쌓여 있고 쌀가게에는 옥같이 하얀 쌀이 모대기 모대기 있는데도 어찌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쌀겨와 쑤시겨전을 찌웃찌웃 굽어보며 개미같이 옹개옹개 모여서야 하는 것입니까?
쌀겨에는 쑥을 넣는 게 제일 좋다고 수군수군 주고받는 이야기가 목놓고 우는 소리보다 더 가엾게 들리드구만요.

<‘귀향시초’ 전문>

 

 

부안군의 폭력성과 ‘슬픈 구도’

그러나 석정문학관은 주민들과 함께 하기는 커녕 안타깝게도 그 이웃들을 잡아먹으며 부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현재 청구원 대지가 200평 정도 된다고 합니다만, 문학관 건립에 소요되는 전체 부지계획은 17,584m²로 5,319평 정도 되는 규모입니다. 매입이 되었거나 추진 중인 부지는 개인집만 해도 5가호이고 가든 등 영업집이 4곳, 그리고 모정과 마을회관, 농지 등이 해당됩니다. 대략 5천여평을 사들여 문학관(복지관, 주차장, 조경시설 등 포함)을 건립한다는 것인데, 결국 한 사람의 문학세계를 기념하기 위해 주변의 쌈터주민들이 내쫓겨야 한다는 몰상식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 주민은 선은동의 4분의 1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마을의 서끄치가 사라진다는 겁니다. ‘서끄치’란 동네의 서끝이란 뜻으로 마을이 워낙 크다보니 동끄치도 있고 우끄치도 있으며, 마을 한가운데쯤은 당산거리라 불리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100여가호 되는 큰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자꾸 줄어 50여 가호 된다 합니다.

“신석정이 뭔데 우리가 피해를 봐야 하느냐?”며 한 아주머니는 격앙합니다. 이 아주머니는 감정평가가 제대로 나온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합니다. 선은동에 정붙이고자 10년 전에 새집지어 이사왔는데 쫓겨나야 할 처지가 되다보니 제값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입니다. 애초부터 비어 있는 집은 이미 보상이 끝났고, 세들어 살던 한집은 동끄치로 새집 지어 이사했으나 나머지 집들은 나간다 해도 갈곳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한 집은 이미 보상이 다 끝났는데도 갈곳이 없어 버티고 있답니다. 두 집은 거부를 하고 있습니다. 논에서 농약치는 일을 다 끝내고 어두워지자 집에 막 도착한 이장 김기석 씨는 “부안군이 애초부터 일을 잘못했어요. 집을 내놓게 되는 주민들에 대해서는 다른 데로 뜨지않고 마을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 일정한 부지를 마련해주었어야 합니다. 답답하죠.” 이장뿐 내가 만난 마을 사람들 모두의 심정입니다.

▲신석정고택과 그 주변ⓒ고길섶

대책도 마련해주지 않고 많지도 않은 보상비를 지급하며 주민들을 내쫓은 터에 문학관을 건립하려는 행정행위는 욕먹어 마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줄어드는 농어촌 인구를 걱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 대책없이 주민들을 내쫓는 지방자치단체의 실체를 봅니다. 사실 그 이전에, 청구원 주변의 마을 주민들을 내쫓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마을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구조에서 문학관을 건립하는 방향을 세웠어야 합니다. 신석정 시인의 탄신 100주년 되는 오늘 고인은 이 사실을 알고 기쁨이 아닌 슬픔과 분노로 부끄러워할 게 틀림없습니다. 신석정은 평소 ‘시서거퍼하다’라는 사투리를 잘 썼습니다. 슬픔이 지나쳐 오히려 허탈해지는 마음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딱 바로 그 마음일겁니다. 석정문학관을 바라보는 신석정은 필시 참담하게 부르짖을 겁니다. “내마음 둘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라고. 1937년에 쓴 시 ‘슬픈 구도’를 반복하며 말입니다. 죽어서 고향땅에 묻히지 않겠다고 한 뜻은 바로 이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이 점이 또 하나의 큰 문제입니다.

인접한 고창의 미당문학관만 둘러보았더라도 문학관 건립을 위해 주민들을 내쫓는 우는 범하지 않았을 겁니다. 친일작가이자 보수우익작가인 서정주 기념관을 세웠던 것 자체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 서정주 생가는 그 자리에 보존하고 집들이 없는 마을의 한쪽에 미당문학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석정문학관 건립을 기뻐하기만 할 때는 아닙니다. 폭염처럼 쏟아지는 주민들의 공통된 애환을 보아야 합니다. 선은동이라는 마을의 일부를 해체하고 몇몇의 주민들을 내쫓는 자리에 문학관을 세우려는 폭력성에 분노합니다. 이 폭력성에 어떤 기관과 어떤 위인들이 가담했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주민의 삶을 배려하지 못하는 부안군의 폭력적 관료주의는 비난되어야 합니다.

이 폭력성을 비판하지 못하며 찬양하기에 급급한 지역언론들도 비난되어야 하고, 이 폭력성을 눈가리고 아웅하며 가담하고 있는 지역의 문화예술인들도 도의적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너무나 당연시해오고 습성화되어버린 한국사회의 풀뿌리 관행(官行)인지라 뭐가 문제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관변인의 비애일까요? 8월 19일 마을에 찾아와 9월 16일에 있는 추모문학제에 마을 사람들이 많이 참여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시인의 아들은, 그리고 그 아들인지 모르겠으나 문학관 건립사업에 가담하고 있는 시인의 자손은 이점에 대해 떳떳할까요?

 

마을 속내는 우스꽝스러운 꼬라지가 되어

주민들은 오래된 습성대로 “정부가 하니까…” 하는 순응주의에 물들어 있어 어쩌지 못하는 처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육신 속으로 삭여내야 하는 애환을 어루만질 뿐입니다. 보상을 더 받으려는 몸부림으로만 애써 인식하고 회자하기를 즐기는 관료에 대한 불신풍조가 팽배해 있습니다. 취재차 네번째 선은동을 찾은 8월 19일은 칠석날 마을 잔치하느라 마을회관이 분주했습니다. 그동안 익숙해놓은 덕인지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아주 반겨합니다. ‘첩자 아녀?’ 하며 못미더워하는 아주머니의 끔찍한 일침에도 나는 웃기만 했습니다.

▲신석정고택으로 2층집을 짓지못해 좁은 집터로 고민하는 황정규옹 부부
ⓒ고길섶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문학관 건립과 관련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아갑니다. 그이들의 애환 이야기가 반복되었고, 결국 공동의 이해관계가 얽힌 모정과 마을회관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었습니다. 모정과 마을회관에 대한 보상은 끝났지만 그 돈으로 새로 짓지는 못한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정과 마을회관은 군에서 옮겨 새로 지어주기로 했다는데, 본공사가 다 끝난 후에야 지어준다는 군 입장을 성토합니다. 그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어디서 모이고 어디서 휴식을 취하느냐는 겁니다. “다 끝나고 지어줘? 그 사람들은 허물고나면 한오백년이여!” 한 할머니가 겪어온 풍파만큼 관료들을 꿰뚫습니다. 누구는 마을 사람들의 땀이 밴 모정과 회관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못내 아쉬워 합니다. 여러 의견들로 설왕설래하는 주민들의 이야기들 속에는 그이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으며 소외된 이방인임을 실감나게 합니다. “그 자리에서는 우리는 한마디도 못혀요.” 부안군이 주재하는 문학관 건립사업 관련회의에 참석한 이장의 말입니다.

선은동 마을의 속내는 지금 우스운 꼬라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문학관 건립 문제 이야기에 감초처럼 엮이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을의 한가운데에 어린이집 건물이 최근 신축되었습니다. 2층건물인데 3층으로 보이는 큰 건물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건축물이 마을의 전경을 해치고 숨통을 죄며 인접주민에게는 불편을 크게 끼치고 있다고 한마디씩 합니다만, 정작 의아스러워 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청구원의 500미터 이내에는 2층 건물을 신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주민들은 알고 있습니다(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보호구역 500미터 이내의 건설공사시 문화재 보호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검토하도록 되어 있고, 문화재 심의위원회 판단에 따라 허/불허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어린이집 건물은 줄잡아 200미터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는데 건축 허가가 났고 청구원 바로 뒷집의 황정규 옹 집은 2층 신축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황정규 옹 집은 부지가 83평으로 비좁아 2층집을 짓기를 원하고 있지만 지을 수 없습니다.

형평성에 어긋나보입니다. 주민들은 군을 찾아가는 등 공사 저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민들은 의혹을 가집니다. “힘있고 빽있어야 하는 것은 여전혀. 군에서 저 집을 허가해주지 말았어야 허는디…”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청구원 바로 옆에 지상 2층으로 문학관을 건립한다는 것입니다. 이장은 이 대목에서도 허탈해합니다. 도지정 기념물을 보호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뭔가 앞뒤가 맞아야 하지 않느냐며 말입니다. 힘없는 민초만 당하고 아파야 하는 현실이 오늘 선은동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신석정 고택’으로 자리잡고 있는 청구원은 사실 신석정이 살던 애초의 모습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 ‘고택’으로서의 기념물적인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애초 신석정이 재곱나 살기 시작한 청구원은 ㄱ자형 초가집이었고, 신석정이 이 집을 떠나자 새로 들어온 주인은 ㄱ자형을 일자형으로 바꾸어 기와를 올렸습니다. 관에서 그 기와집을 밀고 세운 초가집을 ‘청구원’이라 부른답니다. 전국 어딜 가나 똑같아보이는 ‘판박이 생가’입니다. 주민들 말에 따르면, 그나마 이 기념물 고택마저 엉터리로 지어졌답니다. “지붕 기초를 잘해야 하는디 솔가지로 대충 얹어 볏단 지붕을 올렸으니 지붕 곳곳이 꺼져 있어. 1년에 두번씩 지붕 갈고 그러드만 혈세가 썩어났나벼.” 이 원형가치도 없는 모조품 고택을 전라북도 기념물이라 하여 주변의 신축건물 높이를 제한하는 정책도 우스꽝스럽습니다. 석정문학관이 건립되면서 청구원은 신석정이 가꾸었던 삶의 풍경과 시 세계 그대로의 옛모습을 재현하여 독특한 분위기와 가치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8월에 제출된 설계조감도를 보면 청구원 재복원 계획은 없습니다. 75억원의 사업비가 투자되면서 청구원이 제대로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은 도통 이해되지 않습니다.

 

애환을 보듬고 시인의 꿈을 엿봐야하나요?

민초들과 함께 하는 역사 속에서 시인은 오래도록 존경받고 추앙받으며 기억되는 법입니다. 오늘날 부안의 민초들은 신석정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민초들을 희생시키는 시인의 기념관은 시인을 욕되게 합니다. 세계적인 혁명가로 유명한 체 게바라보다도 국내에서는 더 존경받는 쿠바의 사상가이자 시인이며 혁명가였던 호세 마르티는 “단 한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며 “이 땅 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내 행운을 나누고 싶습니다. 산 속의 냇물이 바다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석정문학관은 이웃의 민초들에게 그 행운을 나누어야 합니다. 3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선은동 마을은 큰 기와집을 가진 천석꾼과 그 밑에 머슴과 소작인들(신석정의 아내도 소작하며 생활을 일구었고 청구원집도 소작을 하며 모아둔 것으로 마련했습니다)이 주가 되어 큰 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과거사는 이미 오래전에 끊어졌고, 오늘은 그 후예들이 탈전통화된 삶을 살아가느라 바쁩니다. 마을에 전래되는 구전설화류는 없다 하나 어쩌면 앞으로는 마을 사람들에게 시인의 이야기가 엮어질 법합니다. 차라리 마을 사람들은 신석정의 시를 읽으며 오늘의 애환을 보듬고 견디며 살아야 할까요. 신석정 시선집으로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창작과비평사, 1990)가 있고, 작가 탐구로서는 윤여탁 교수가 쓴 <신석정>(건국대학교 출판부, 2000)을 권합니다. 시인의 꿈을 엿봐야겠지요.

 

사진·글 고길섶 _문화비평가
*이 글은 부안독립신문에 게재한 글을 수정·증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