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푹푹 찌는 한여름 날에는 그 어디보다도 모정(茅亭)이 최고의 피서지겠죠? 사방이 터지고 천장과 기둥과 바닥 모두 대개 목재를 다듬어 지은지라 다가가 앉기만 해도 곧장 시원한 바람이 살갑게 맞이합니다. 요즘의 집들은 바람의 흐름을 차단하는 구조로 가고 있어 더 덥습니다. 채광과 통풍을 위하여 만들었던 봉창은 이제 그 말조차 듣기 어려워졌고, 확 트인 마루도 샷시작업을 하여 폐쇄형 거실로 사방을 막아버린 터에 모기장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했다 한들 답답한 구조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새로 짓는 집들도 선풍기와 에어컨을 사용할 요량으로 바람의 순환을 막아버립니다. 에어컨은 전기 소모도 많고 몸에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그 으뜸은 바로 자연바람이고 그 자연바람에 몸을 맡기고자 사람들은 모정으로 몰려듭니다.
우연히 마주치며 일거리를 돕는 아주머니들
재작년 여름 우연히 들러 한낮을 시원하게 보낸 동진면 장등마을의 모정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모정은 동진강을 건너기 직전 23번 국도와 인접하고 사방이 드넓은 논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입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재작년에도 마을 촌부들 예닐곱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정오를 넘어서는 시각, 할머니에 가까운 아주머니들 셋은 모퉁이에서 솔을 다듬고 마늘을 까고 있었습니다. 그이들 옆에 이방인으로 보이는 젊은 처자와 중년의 아주머니는 장부를 접더니만 “어머니, 다음에 뵙게요”하면서 이내 자가용을 타고 사라집니다.
나는 초면인 아주머니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낯선 거리감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마늘 까는 아주머니 옆에 바짝 다가가자 객지에 나간 동네 청년인가 하더니 이내 낯선 나그네임을 알아차립니다. 남정네가 여자들 소일거리하는 곳에 뭐하러 다가오느냐며 핀잔을 줍니다. 어디서 왔느냐, 뭐하러 왔느냐도 묻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이들과 말을 섞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집안이 너무 더워 솔과 마늘을 가지고 나왔고, 여기에 오전에 채전밭을 매고 왔다는 다른 아주머니가 거들어주고 있었습니다. 또다른 아주머니는 직전에 자리를 뜬 두 사람이 장부 기록 일로 호출(?)하여 나왔다가 일을 돕고 있답니다. 모정은 이렇게 다른 이의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하는 우연한 상부상조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근데 아까 그 분들은 누구인가요?” 이렇게 묻자 아주머니들은 이때다싶어서인지 평소 감정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나한테 들려주기보다 자기네들끼리의 대화로 말입니다. “거시기, 보건소에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인가봐요.” “혼자 사는 노인네들 집안일 도와준다는디, 뭐 도와줄게 있어야지, 사람들이 워낙 깨끗이 해놓으니까.”
“○○네는 일을 좀 해준다는디?” “일은 뭔 일,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명단만 적어가는디, 저거들 월급 받아먹을라면 명단은 적어가야겄지.” 아마 독거노인 도우미들인 모양인데, 아주머니들의 반응은 좀 냉정합니다. 그들이 서둘러 자리를 뜨던 모습은 내 눈에도 좀 거슬렀습니다.
이야기거리들은 모정으로 흘러
모정에는 오후 두시가 좀 넘어서야 사람들이 모여든답니다. 오전에는 들일을 하거나 읍내에 다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기껏 열두어명 정도랍니다. 70가호나 되며 정미소도 있고 밀공장도 있는 큰 부락이고 모정 또한 여느 마을 것보다 훨씬 큰 편임에도 북적대지는 않는답니다. 나도 어느새 마늘 까는 일에 동참하고 있었고, 한 아주머니는 바로 앞 마을회관에서 미숫가루랑 수박이랑 내옵니다. 귀찮으면 이게 점심끼니랍니다.
“동네가 크니 가게도 있겠네요?” 그러나 의외로 가게가 없답니다. 아이들도 없고 해서 있던 가게가 없어졌답니다. “할아버지들 막걸리라도 자실려면 가게가 있을법도 한데요잉?” “막걸리 마실 영감탱이들은 다 죽었어. 영감탱이들은 별로 안되어. 앓아 드러누운 노인네도 없어.” “그리도 가게가 없응게 불편하네요.” “○○네집 영감은 어디 요양소인가 가 있다믄서요?” “한달에 70만원씩 내야혀서 그냥 집으로 오고자픈디 아들이 못오게 헌다는고만.” 수다가 다 그렇듯 이야기는 자꾸 옆길로 빠져나갑니다. 전해들어 또 전달하기도 하고 거기에 촌평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대개의 모정이 마을 입구에 있어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장소인 것처럼, 장등마을의 모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시내버스 종점 정류장도 바로 옆에 있어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상당수 다 보입니다. 읍내에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들, 밭에 일하러 나가거나 들어오는 사람들이 모정을 거치고, 그이들은 또한 모정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 꽂힙니다. 또다른 할머니가 시내버스에서 내려 합류합니다. 거두절미하고 화제는 다시 이 할머니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읍내 약국에 댕겨온답니다. 모정은 마을 사람들의 안부도 듣고 궁금함이 풀어지기도 하는 정보교환의 거점입니다. 모정이 마을의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정보교환은 더 활성화됩니다.
한 동네에 살면서 다 알만해보이는 것들도 때로는 생경한 이야기로 섞여집니다. 뒤늦게 합류한 한 할머니가 다듬고 있는 솔 고동을 꺾어먹자 다른 할머니들이 그것도 먹느냐며 생소해 합니다. 평생을 한 동네에서 살아온 그이들이고 숟가락 갯수도 다 아는 사이라지만 여태 미처 주고받지 못한 먹거리 정보도 있는 모양입니다. ○씨와 ○씨 두 남정네 양반은 왜 모정에 통 안 나오냐는 한 아주머니 말에 다른 아주머니는 한 ○씨는 부안에서 누가 매일같이 택시타고 데리러 오고, 다른 ○씨는 밀공장에 나가 산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마주치며 씨줄날줄로 정보교환이 일어난다 해도 매일같이 달라지는 상황들이 쌓이고, 각자의 사적 공간의 영역(집안)들에서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며 그 모든 것들이 공유되지는 않기 때문에,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항상 새롭습니다. 무엇은 어떻고, 누구네 집에서는 저떻고 하는 정보교환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마을 사람들의 새로운 소식들을 들을 수 있기에 모정은 존재하나 봅니다. 각각의 집들은 각각의 집안일들을 보호하도록 담장쳐 있으되 그 담장들 사이의 골목길들을 따라 모정으로 흘러 내보냅니다.
호남문화 특유의 모정문화
전남대학교 호남사회연구소의 1966년도 조사자료에 따르면, 모정은 전라도 각지에서 대표적으로 ‘시정’(詩亭)이나 ‘우산각’(우산처럼 생겼다 하여 이렇게 부르는 것으로 추정함)으로도 불리우나 줄포에서는 ‘농정’(農亭)이라 부르기도 했답니다. 이는 아마도 모정이 농군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는 데 기원한듯 합니다만, 실제로 장등 마을 사람들이나 다른 마을의 모정 사람들도 들일의 휴식처로 사용하곤 합니다. 모정은 농민을 위한 농민의 것이었습니다. 조사자료는 부안군이나 장성군에서는 일꾼들이 한더위 휴식을 취하고 일하러 나간 후에야 노인네들이 모정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조사 당시 줄포면 읍산리 동읍산 부락의 ‘농정’의 경우, 두레조직의 활동공간으로서 기능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때 당시로부터 57년전, 즉 1909년 부락 두레조직의 운영 이익금으로 농정이 건립되었고 두레 구성원들의 집회소 및 휴식처로 활용되었다 합니다.
일제 말기에는 모정의 건축을 금하거나 강제철거를 시도하였답니다. 모정에서 반일 밀담을 나누고 부락민들을 한량으로 만든다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누구는 1970년대 초에 새마을 운동에 저해가 된다고 모정을 폐쇄하라고 했답니다. 모정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불온’했던 모양입니다. 즉 휴식과 소통과 문화의 공간으로 본 것이 아니라 게으름·한량·무노동으로 상징되는 베짱이들의 공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무더위에 지쳐 잠시 틈을 내 큰대자로 널브러져 잠 한 소금 자는 건 고달픈 농초들의 즐거움 아닐까요?
모정은 그 오래된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형태나 기능에 있어서 다양한 변천이 있었을 겁니다. 앞의 조사보고에 따르면, 모정은 장유유서의 생활윤리가 배어 있기도 한 모양입니다. 장유유서에 따른 공간의 배치가 있었습니다. 부락에 따라 “장유유서의 윤리관념이 강한 부락의 모정에 노년석과 소년석 사이에 판자로 칸을 막아 젊은이의 흡연의 장소를 마련하여 준 모정”(함평군 기각리, 김제시 반월리 등)도 있고, 또 “마루에 층계를 만들어 노소의 좌석을 구별하여 연로자에게 존경의 뜻을 표시하는 부락”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유유서가 있는 모정들은 모두 사라졌으리라 봅니다만, 모정이 마을 입구에 있는 한, 때로는 동네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의 마을 출입 품행을 의도하지 않게 ‘검열’(?)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꽂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모정 옆을 통과하는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에게는 모정이 불편한 장소일 수 있습니다. 모정에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부터 시나브로 들어오는 동네 사람에 대해 아는 체 모르는 체 가볍게 한마디씩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모정을 통과하는 동안 어른들의 시선 아래 놓이기 때문에 검열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그 ‘검열’은 오늘날 촌락공동체 및 유교사상의 해체라는 사회상을 반영하는지라 아무런 강제성도 힘도 없는, 무력한 마을의 옛그림자일 뿐입니다.
영원한 휴식·소통·정보·놀이의 공간
장등 마을 모정은 좀 특이해보입니다. 전라도 호남문화로 독특하게 자리잡아온 모정은 특히 평야지대 촌락공동체의 공공장소이되 가부장적 환경 속에서 남성들이 주로 점하곤 했습니다만, 이 마을의 모정은 여성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듯 합니다. 내가 있는 동안에도 한 남정네는 아주머니-할머니 들을 지켜보며 홀로 귀퉁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모정은 1998년에 정부 지원금 일천만원과 마을민들 및 출향민들 등 95명이 3만원부터 200만원까지 모금하여 건립하였습니다. 최근에 건립하는 모정들은 샷시, 모기장, 형광등, 간이 취사도구 따위들을 설치하고 있으나, 장등마을 모정은 전선 하나 설치하지 않은 채 기와지붕으로 옛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보통 모정의 지붕은 짚이나 극소수지만 함석으로도 지어졌었습니다. 방이 없는 게 모정의 특징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마루를 두칸이나 세칸으로 나누기도 했었습니다.
장등 마을 모정의 아주머니-할머니 들은 마늘을 다 깐 후 너댓이서 10원짜리 민화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7월 백중날과 12월 동짓날에 동네 사람들이 모정에 다 모여들어 대동계를 한다고 합니다. 모정은 잡담도 나누고, 잡일도 하고, 드러누워 낮잠도 자고, 술도 마시고, 화투도 치고, 때로는 풍류도 즐기고, 마을일 뿐 아니라 군정이나 시국도 논하는 마을 공공의 공간입니다. 또한 공공공간이면서도 주민들 각각의 사적인 사연들을 주고받는 담소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모정의 이런 기능을 통해 한 동네를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알아가고 공유합니다. 모정이 있어 마을은 여유로움이 있어 보입니다.
적어도 삼국시대 때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정은 촌락공동체가 해체되고, 사적 영역이 확대되며 개인주의화가 심화되고, 뉴미디어가 끊임없이 발달하고, 찜질방이 세워지고, 에어컨이 개량한 집안으로 들어오는 오늘날에도, 마을이 존속하는 한, 호남지방 마을 사람들의 영원한 휴식·소통·정보·놀이 공간입니다. 당장 모정에 나가 드러누워 보자고요.
글·사진 _고길섶 문화비평가
* 이 글은 부안독립신문에 게재된 글을 수정·증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