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무로 노니는 흥의 산중문화사가 있었으리라 – 진서면 대소뜸

 

 

 

진서면 석포2리의 해발 200미터쯤 되는 산중 ‘오지’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 대소뜸. 사람이 사는 집이라곤 53년전에 들어와 터를 잡아 살아왔다는 조병문 옹 집과 10년 전에 들어왔다는 중년의 모씨 집 두 가호뿐인지라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문명세계(?)와의 거리상으로 보아 오지라고 하기에도 망설여지는 곳입니다. 차라리 오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모씨의 역설은 의미있는 발언입니다.

현대문명의 최첨단물인 인터넷과 핸드폰은 닿지 않지만 두 가호 중 한집에는 마루를 개량해 만든 거실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청정하고 시원한 산중 자연바람도 한여름의 무더위는 물리칠 수 없나 봅니다. 아니면 텔레비전을 통해 구경하는 문명에의 욕망들이 유혹하였거나 문명세계에서 살고 있는 자식들이 효도하는 마음으로 사다 설치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연이야 어떻든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기술문명에 산중바람을 굴복시키고 말았습니다. 집 공간을 개량하여 현대화하다보니 구조상 바람이 통하는 통로들을 막음으로 해서 말입니다.

 

교통로를 허하지 않아 오지 아닌 오지

변산국립공원은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관련하여 참으로 말 많은 곳이지만 국립공원 구역인 대소뜸이 ‘오지’로 남겨지도록 강제하는데 한 역할을 해온 것 같습니다. 그것은 조병문 옹 부부의 발언에서 느껴집니다. 대소뜸은 분지형으로 되어 있어서 농사짓기에 상당히 넓은 땅이 있습니다. 논만 해도 한 스무 마지기 정도 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품삯을 5천원씩 더 주고 아래 마을 일꾼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답니다. 작물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팔아야 하나 가까운 석포마을로 통하는 노릿재(노랫재) 길을 넓히거나 시설물 설치하는 것을 허가해주지 않아 농작물 운반이 어렵습니다.

▲내가 대소를 찾은 날은 마침 일요일인지라 등산객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습니다.ⓒ고길섶
▲대소뜸은 생태적 환경이나 자연경관으로 뛰어납니다. 야트마한 계곡물에는 뭔지 알 수 없는 맑은 물고기들이 유희합니다.ⓒ고길섶

예전에 노릿재 아래로 모노레일까지 깔아 궁여지책을 써봤으나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철거시켰습니다. 한 10년전 쯤에는 도 고위공무원의 말만 믿고 내버려진 뽕밭을 다 밀어버리고 보리농사를 지었건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답니다. 그때 들여온 포크레인이나 콤바인, 트랙터 따위들도 빚더미로 널브러져 있습니다. 어쩌면 대소뜸은 ‘오지’라기보다 육지의 섬입니다. 일주일에 한두번 여객선 다니는 섬처럼, 조병문 옹의 큰아들은 세렉스를 가까스로 몰고 들어오곤 한답니다. 경사가 심하여 가파른 고갯길을 넘나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대소로 통하는 가파른 바위벼랑길ⓒ고길섶

애초에는 석포마을에서 노릿재-대소-북재를 거쳐 변산면 운산리로 통하는 산길이 있었답니다. 장사치들도 모두 이 길로 다녔으며, 예전에 석포마을이 산내면일 때에는 면사무소에 볼일 보러 이 길로 다녔답니다. 그러나 변산반도가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고 1988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면서 이 길은 점차 인적이 끊기고 교통로로서의 의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국립공원이라는 명분으로 오지 아닌 오지가 된 셈이며, 여기에는 관리공단 측과 조병문 옹 부부 사이에 갈등사가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그런지 아무래도 조 옹 부부는 농작물의 판로이자 문물의 교통로가 열리기를 허하지 않는 관리공단을 원망하는 듯합니다.

 

▲조 옹의 부인 김청자 할머니는 50년 전 보안면 상립석 마을에서 중매로 시집왔습니다.ⓒ고길섶

53년 전 이주해와 새로 개척

대소뜸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주민들이 모두 소개되고 텅 비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김제에 살던 조 옹의 부친이 53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와 터를 잡고 개척을 했습니다. 조 옹의 부인 김청자 할머니는 50년 전 보안면 상립석 마을에서 중매로 시집왔습니다. 조 옹은 경기도, 정읍, 부산 등을 떠돌며 살다 마흔 쯤에 다시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너른 평야지대인 김제에서 살다 산중에 살려하니 답답했을 법 합니다만, 시아버지가 괭이질하며 하나하나 일군 땅덩이들을 내버리고 나갈 수는 없다며 붙잡아매는 부인의 뜻을 존중한 모양입니다.

조 옹의 증언에 따르면, 대소뜸은 한때는 16가호의 마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한창 나무의 뿌리까지 캐다 불 때던 시절 전라남도 등 각지의 먼곳에서 냄비 하나 들고 들어와 움막을 지으며 살았다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의 대소마을을 이룬 주거민들은 대개 인근의 부안 사람들이 아니라 먼 외지의 사람들이었고, 상당히 큰 마을을 형성했으나 결국 조 옹 부부만 빼고 모두 빠져나갔습니다. 10년 전에 만든 <부안군지>의 기록에는 당시에 다섯농가가 생활하고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집의 8남매 자식들도 모두 바깥에서 삽니다. <부안군지>는 더 덧붙입니다.

“특히 이 지역은 도로가 개설되지 않아 주민들은 높은 산봉우리를 왕래하면서 순수한 인력으로 농자재 및 생필품과 농산물을 시장에 거래하고 있어 문화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등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생활이지만 이곳 주민들은 나름대로 삶의 철학과 보람으로 생활하고 있다.”

▲대소뜸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주민들이 모두 소개되고 텅 비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김제에 살던 조 옹의 부친이 53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와 터를 잡고 개척을 했습니다.ⓒ고길섶

 

 

농부 대 산사람, 마음의 충돌?

▲한 10년전 쯤에는 도 고위공무원의 말만 믿고 내버려진 뽕밭을 다 밀어버리고 보리농사를 지었건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답니다. 그때 들여온 포크레인이나 콤바인, 트랙터 따위들도 빚더미로 널브러져 있습니다.ⓒ고길섶

내가 대소를 찾은 날은 마침 일요일인지라 등산객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습니다. 등산동호회 사람들도 보이고 초등학생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등산객들도 대소뜸의 한가운데 길에서 마주쳤습니다. 서너팀은 터주대감인 조병문 옹 집 옆으로 이어지는 계곡물가에서 닭 백숙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계곡물을 마시는 산중 닭들의 자유로운 활개는 인상깊게 남겨집니다. 그렇게 방목된 산중 닭들은 이곳을 지나치는 등산객들의 식탐거리가 됩니다. 신선대나 북재 등지에서 흘러오는 계곡물은 봉래일곡(蓬萊一曲)인 구시둠벙(대소, 大沼)으로 채워지는 듯 하다 직소폭포와 선녀탕을 거쳐 부안댐으로 흘러들어가 부안과 고창 군민들이 먹는 수돗물의 상수원이 되거나 해창 앞바다로 빠집니다.

대소뜸은 생태적 환경이나 자연경관으로 뛰어납니다. 야트마한 계곡물에는 뭔지 알 수 없는 맑은 물고기들이 유희합니다. 옥녀봉도 내려다봅니다. 자연인으로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에게 발붙이고 살기에도 딱입니다. 모씨도 아마 그런 부류의 한 사람일겁니다. 삶의 태도나 방식에서 조병문 옹 부부와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53년을 지켜온 터주대감인 조 옹 부부는 혹은 산사람이라기보다 농부로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생존하기 위해서는 문명세계와의 교통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모씨는 더 이상 문명세계로 교화되지 않는, 적어도 현재적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는 생태적 삶을 갈구하는 ‘산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요하고 순박해보이는 대소뜸에게도 사람이 살아가는지라 마음의 충돌 내지는 내적 긴장감이 보이지 않게 흐르는 듯 합니다. 산사람이 되고자 들어왔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경우도 어쩌면 이런 데 연유할까요. 잡초들에 뒤덮여 스러져가는 빈집터에 언젠가 서울 사람이 벽돌로 집 한채 짓다 떠나버린 흔적도 있습니다. 어느 곳이나 다 있는 ‘텃새’에 못이겨서일까요. 조병문 옹은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는 방식을 모른다” 합니다. 텃새에 적응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산중마을의 형세지심(形勢之心)에 적응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옹의 부친이 이곳으로 올 때에는 이미 풍수지리를 다 둘러보았답니다. 뛰어난 지형, 지세, 방위의 자연경관은 길흉화복을 점쳐주었을 겁니다.

 

선사(先史)의 흔적들을 이어 이어

▲계곡물을 마시는 산중 닭들의 자유로운 활개가 인상깊습니다.ⓒ고길섶

대소뜸의 길흉화복은 아마도 시대에 따라 변천해왔을 겁니다. 대소뜸에 조각조각 남겨진 인간의 흔적들이나 구전되고 있는 설들은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들을 제공합니다. 부안성당에서 이곳이 ‘성지’라며 찾아왔었다는 조 옹은 천주교가 박해받던 조선말, 배타고 도망치던 서양선교사를 어민이 구해 이곳에 피신시켰다는 겁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유불선 동서학 합일 갱정유도’를 주창한, 강대성이 세운 일심교 신도들이 신선대마을과 이곳에 살았다 합니다. 대소뜸 어딘가에 큰 내소사격인 대소래사가 있었다는 일부 사학자들의 주장도 있지만, 인간문화재 대목장 고택영 선생은 이를 부정하며 고두암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 옹 부부는 여기저기서 기왓장들은 물론 기와굽던 터들도 발견된다고 합니다. 변산의 빨치산들이 이곳을 피해가지는 않았을겁니다. 밥해먹던 흔적들이 산 오르막 굴에도 있고, 밭을 일구다보면 해골들이 나뒹글기도 했다 합니다.

▲대소마을 폐가. 조 옹의 증언에 따르면, 대소뜸은 한때는 16가호의 마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고길섶

그 흔적들로만 보아도 대소뜸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목적의 다양한 사람들이 거쳐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적어도 한국전쟁 때 주민 소개로 인하여 전통적 단절이 있었음은 분명하며, 그러나 마땅한 문헌기록도 없어 (역사라기보다) ‘선사(先史)’의 흔적들을 재구성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그 흔적들의 어렴풋한 조각들을 이어 대소뜸의 문화사를 창조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과제로 보입니다. 대소뜸 일대의 지명들을 노래부르는 노릿재(노랫재), 북치고 장구치는 북재, 장구바위, 징바위, 퉁소 소를 쓰는 대소(大簫), 봉래일곡(蓬萊一曲) 따위들로 일컬어 온 것으로 보아 가무로 여흥하는 산중 문화사를 일구어온 어떤 시절이 있었으리라 상상됩니다.

대소는 한자로 大簫로 표기해야 옳습니다. <부안군지>에는 大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행정상으로는 오랫동안 일제의 잔재를 버리지 못했나 봅니다. 그것이 바로 잡아졌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진서면사무소 관계자와 통화를 했습니다만, 지금은 한자를 쓰지 않기 때문에 어떤 한자를 쓰는지 당장 확인은 어렵다 합니다. 우리나라 지명들이 그렇듯이 대소를 표현하는 한자 어원도 역사-문화적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을 박물관은 어떨까요

▲대소마을 어느 폐가의 우물ⓒ고길섶

대소뜸은 이제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국립공원이라 해서 칙칙하게 보호되고 보존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개발의 논리를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주민들이 산사람으로만 살아가겠다 하면 그렇게 환경조성해줄 수도 있으며, 문명세계와의 교통이 필요하다 하면 제한된 한도 내에서 그런 숨통을 터주어야 합니다.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선주민으로서 살아온 삶의 흐름과 먹고 살길을 억누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은 아닐테니까요. 혹은 누군가 풍수지리의 명당자리에 ‘가족의 왕국’으로 만들 배타적인 욕심같은 것이 혹시라도 있다면, 공공지역으로서의 대소뜸을 욕보이는 짓이겠지요.

대소뜸의 선사(先史)들을 모아 이야기거리로 재현하고 그 재현된 상상의 문화사를 옛길 탐사객이나 등산객들에게 들려주는 작은 마을 박물관이 있다면, 대소뜸은 더욱 의미있는 산중마을이 될 것입니다. 부안댐 물의 상수원 발원지이기 때문이라도 철저한 유기농 산촌으로 지원하여 생태적 환경을 조성한다면 주민소득도 올릴 수 있고 더 없는 신선놀음의 도원경이 아닐까요?

 

글·사진 _고길섶 문화비평가
*이 글은 부안독립신문에 게재된 글을 수정·증량하였습니다.